[뉴스토마토 김나볏기자] 연극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희곡작가 겸 연출가인 김재엽은 젊은 세대의 목소리를 담고자 노력하는 연극인입니다. 그동안 그가 쓰고 연출한 작품은 대부분 대한민국 2030의 시대의식을 화두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런 성향의 대표적 작품으로는 ‘386세대’에 대한 ‘386 이후 세대’의 시각을 드러낸 <오늘의 책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정치 참여에 소극적인 20대에 대한 고민을 담은 <누가 대한민국 20대를 구원할 것인가?> 등을 들 수 있지요.
그런데 세월이 참 야속합니다. 김재엽 연출가도 어느덧 40대에 접어들었습니다. 지난해였던가요. 인터뷰에서 만난 김재엽은 이제 사회를 비판하는 것 말고도 사회에 대해 어느 정도 책임을 져야 하는 나이라고 말한 일이 있습니다. 인식의 변화를 반영하듯 자신이 이끌던 ‘극단 드림플레이’의 이름을 ‘드림플레이 테제21’로 바꾸기도 했지요. 그리고 ‘풍자와 비유를 벗어던지고 현실에 대해 직설화법으로 이야기하자’는 취지로 ‘연극이 아니어도 좋은 연극’이라는 타이틀 아래 일련의 공연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 첫 작품인 <알리바이 연대기>는 지난해 연극계의 고른 호평을 이끌어내기도 했습니다.
갖은 상찬에 대한 우쭐함과 부담감이 동시에 있었을 법한데 김재엽은 서둘러 다음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오늘 소개할 연극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가 바로 그 작품인데요. 한국 현대사를 온 몸으로 마주하며 살아갔던 시인 김수영(1921~1968)의 시를 모티프로 한 이번 작품은 시 ‘어느 날 고궁(古宮)을 나오면서(1965)’의 첫 소절을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자신의 가족 이야기와 근대사를 병치시킨 <알리바이 연대기>처럼 이 연극 역시 다큐멘터리적 성격을 띄고 있네요. 이번에는 시인 김수영, 그리고 배우 강신일, 작가 '재엽'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사진제공=남산예술센터)
◇과거와 현재, 연극과 현실 사이를 거닐다
대강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작가 재엽은 시인 김수영에 관한 작품을 구상 중입니다. 재엽은 배우들을 설득해 자기 안의 김수영을 찾아가는 연극을 만들고자 합니다. 아직 대본도 없는 상태라 배우들은 선뜻 공연 출연을 결정하지 못하는데요. 어쨌든 김수영의 시를 이해하면 김수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란 믿음으로 김수영의 시를 읽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광복 후 한국전쟁의 발발과 함께 삶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 김수영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연극을 만드는 과정 자체가 바로 작품의 내용이기도 한 셈이네요.
배우 강신일을 캐스팅하는 과정부터 극은 출발하는데요. 강신일을 비롯해 현재를 사는 인물들의 경우, 연극 안에서의 배우와 실제 삶에서의 배우 역할을 오가며 연극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듭니다. 시인 김수영,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과 그의 측근 등 과거의 인물 역시 활동 반경이 좀 넓습니다. 이들은 과거에만 머무르는 게 아니라 현재에 속한 인물들과 계속 조우합니다. 이 중 김수영의 경우 배우들이 발견하고자 하는 대상이지만 나머지 과거 속 인물들은 그냥 시시때때로 출몰한다는 점에서 좀 구분되긴 하지만요.
그런데 말입니다. 듣자하니 최종 대본이 첫 공연 바로 전날에야 완성됐다고 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사실 전작에 비해 공연의 완성도가 떨어집니다. 어쩌면 필연적인 귀결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수십년에 걸쳐 관계를 맺어온 가족 이야기를 할 때와는 달리, 아무래도 '이제 막 새롭게 취재한 내용'을 담아내야만 했을테니까요. 김수영도 김수영이지만 강신일 배우의 인생에 대한 언급도 공연 중 상당부분 차지합니다. 내용 외에 연극의 형식까지 충분히 고민하기에는 아무래도 시간에 쫓겼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진제공=남산예술센터)
◇그리고 마침내 자기고백
일제강점기, 4.19혁명, 5.16 군사정변 등 근대사의 질곡 속에서 위정자들에게 속는 민중의 모습, 그리고 정권을 잡든 자가 누구든 그 옆에 붙어 권력을 세습하고 있는 부역자들(친일파와 그들의 후예)에 대한 것까지. 솔직히 이 작품, 많은 사람들이 대강 다 아는 이야기를 너무 직설적으로 설명하듯 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1막을 보고 나서 잠시 쉬는 시간 동안 ‘이거 왜 이리 진도가 안 나가?’ 하는 생각에 적잖이 실망한 게 사실입니다.
극의 흐름이 지지부진하다고 느낀 결정적 이유가 있습니다. 공연팀이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라는 탄식 섞인 질문을 던져놓고는 분명한 이유와 실천적 답을 내리기 주저한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연극의 전반적 내용은 본 제목보다는 오히려 작품의 부제인 ‘내 안의 김수영을 찾아서’에 더 가깝습니다. 긴 공연시간 동안 무대 뒤 스크린에서는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가다오 나가다오’, ‘제 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은 없는가’, ‘절망’, ‘구름의 파수병’, ‘긍지의 날’, ‘그 방을 생각하며’ 등 김수영의 시가 10편 이상 나오는데요. 이런 설정은 관객에게 김수영의 시와 삶을 좀더 깊게 들여다 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합니다.
하지만 관객들에 한 발 앞서 김수영을 만난 배우들의 실질적 반응이 무엇이었나 하는 대목에서는 아쉬운 점이 많습니다. 과거의 강신일은 극 중 ‘재엽’에게 행동과 실천의 길에 대한 자극을 주지만 현재의 강신일은 스스로에게 그리 떳떳하지 못합니다. 그저 과거 투쟁의 기억을 회상하고, 오늘의 나에 대해서는 자조 섞인 말투로 읊조리는 데 그치지요. 상황이 이러다보니 극 말미에 이르러 '재엽'의 입을 빌려 나오는 솔직한 자기 고백이 의외의 울림을 줍니다. '재엽'은 술에 취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내뱉고 쓰러집니다. “제 연극 안에 제가 없어요!”
'연극이 아니어도 좋은 연극'이라지만 그것이 작품의 거친 부분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겠지요. 이 작품은 약점이 많은 연극입니다. 그런데요. 역설적이게도 이 약점들이 작가 김재엽에 대한 신뢰를 높입니다. '김수영을 세밀하게 들여다봤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혹은 '우리'는 여전히 관찰자로 머물러 있더라'는 성찰 혹은 부끄러움이 어쩐지 미덥게 느껴지는 것이죠. 워낙 가짜 고백이 판을 치는 세상이니까요. 더디더라도 온전히 자기의 힘으로 발걸음을 떼려고 하는 점에 대해서만큼은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답이 선뜻 나오지 않더라도 나를 향해 물음표를 계속 던지다보면 언젠가는 더 나아진 나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요?
-공연명 :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제작 : 남산예술센터·드림플레이 테제21
-작.연출 : 김재엽
-출연 : 강신일, 지춘성, 유준원, 선명균, 백운철, 정원조, 오대석, 우정국, 이갑선, 서정식, 유종연, 김원정, 윤안나
-무대 : 서지영
-조명 : 최보윤
-의상 : 오수현
-음악 : 한재권,
-영상 : 윤민철
-소품 : 서정인
-문의 : 02-758-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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