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공주' 포스터 (사진제공=무비꼴라쥬)
[뉴스토마토 함상범기자] 어머니는 가족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재혼했다. 몇 개월만에 만났는데 "다신 오지 말라"고 한다. 아버지는 늘 술에 취해서 산다. 말 끝마다 욕이 붙는다. 딸을 생각하는 마음은 알겠는데, 부담스러운 건 지울 수 없다.
그리고 끔찍한 사건을 경험했다. 40여명의 남자들이 차례로 자신의 몸을 함부로 대했다. 그 일을 같이 겪은 유일하게 속을 털어놓는 친구는 얼마 후 자살한다. 오갈 곳이 없어 전 학교 선생님의 어머니의 집에 얹혀살고 새 학교로 전학을 간다. 영화 '한공주' 속 공주(천우희 분)의 처지가 이렇다.
상처를 깊게 받은 공주의 삶은 이름답지 않게 처절하다. 친구들하고도 말을 섞지도 않고 오롯이 혼자 지낸다. 스마트폰도 없고 컴퓨터도 없어서 세상을 사는 방식이 남들보다 느리다. 새롭게 만난 사람들도 조금은 이상하다. 여러모로 힘든 상황이지만 그래도 살아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천우희 (사진제공=무비꼴라쥬)
어느덧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하기 시작한다. 이유도 없이 자신에게 잘해주는 친구 은희(정인선 분)에게 조금씩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다. 불륜 중이지만, 자신을 챙겨주는 선생님 어머니에게도 마음을 연다. 조금씩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잃어버렸던 웃음을 찾아간다.
하지만 다시 세상은 그를 궁지로 몰고 피해자인 공주는 또 어딘가로 도망쳐야 한다. 그러면서 "전 잘못한 게 없는데 왜 계속 도망쳐야 돼죠?"라는 말을 남긴다. 마음이 '쿵'하고 내려앉으면서 안타까운 감정이 든다.
'독립영화계가 건진 수확'이라는 평을 듣는 이수진 감독은 공주를 바라보는 시선을 최대한 냉정하게 그린다.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듯, 감성을 빼고 건조하게 묘사한다. 인물의 얼굴을 보여주기보다는 뒷모습을 더 많이 따라간다. 절제의 미학이 엿보였다는 영화 '소원', '우아한 거짓말'보다도 몇 배는 더 건조하다.
그래서인지 가뭄에 콩 나듯 나오는 공주의 웃음에서 더욱 진한 안도와 감동을 만난다. 친구들의 호의에도 버럭 화를 내는 모습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때문에 더 안타깝다.
◇천우희 (사진제공=무비꼴라쥬)
영화는 공주의 대사와 행동을 통해 부조리한 세상과 어른들의 이기심에 일침을 던진다. 힘없는 공주가 계속 밖으로 내몰릴 수 없는 이유를 냉소적으로 그려낸다.
영화 말미 가장 힘들어할 수 밖에 없는 현실에 처한 공주가 건 전화를 끝내 받지 못하는 은희의 장면은 우리들의 속마음 속에 숨겨진 진실이 아닌가 싶어 부끄럽다. 이수진 감독의 탁월한 심리묘사가 느껴진 대목이다.
타이틀롤이면서 영화를 이끌어내는 공주가 그 어떤 역할보다 중요하다. 이 역할은 연기파 배우 천우희가 맡았다. 괜히 전 세계가 극찬한 게 아니다. 런닝타임 내내 영화의 분위기에 맞는 연기를 펼친다. 화를 낼 때도 웃음을 보일 때도 공감 가는 연기다.
가녀린 몸이지만 악착같은 느낌의 비주얼을 살려, 공주의 살겠다는 의지를 표정으로 표현한다. 문소리나 문정희와 같은 연기파 배우가 될 것 같다. 충무로가 주목해야만 하는 배우다.
◇정인선 (사진제공=무비꼴라쥬)
정인선은 웃음을 잃지 않는 표정과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은희를 연기했다. 이유없이 공주를 좋아하고 챙겨주는 모습에서 진심과 순수함이 느껴진다. 천우희와 마찬가지로 '한공주'가 낳은 연기파 배우라 할 수 있다.
차갑고 무거운 영화지만, 신파는 없다. 감성보다는 건조함으로 승부한 이 영화를 보고나면 마음에 돌덩어리가 생긴 듯 무거워진다. 그래도 끝까지 살기위해 발버둥치는 공주의 모습은 희망이라는 문구를 떠올리게 한다.
신파를 싫어하는 관객들이나, 독립영화식 건조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관객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영화다. 수준 높은 작품성을 원하는 관객에게도 추천한다. 완성도 면에서는 딱히 흠잡을 곳 없는 영화다.
다만 무거운 소재를 싫어하는 관객은 피해하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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