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우성문기자] "어린이들이 더 이상 과일을 팔지 않아도 되는 때가 언젠가 올 것입니다"
빈민들의 '구제자'인 동시에 '독재자'로 엇갈린 평가를 받고 있는 우고 차베스 전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남긴 말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년, 베네수엘라에는 어린이들이 더 이상 과일을 팔지 않아도 되는 때가 왔을까.
지금 베네수엘라 거리에서는 반정부 시위가 끊이지 않고 국민들은 휴지 등 생필품 부족으로 서로 살인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세계 1위 원유 매장국인 베네수엘라에서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지금 베네수엘라는..피로 얼룩진 시위·치안 불안으로 공포
지난 2월4일, 베네수엘라 서부에서 대학생들과 야권 인사들은 현 대통령인 니콜라스 마두로와 그의 정권에 대한 반발로 시위를 시작했다.
대학생들이 시작한 이 시위는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경제난에 지친 국민들의 지지를 받아 전국적으로 거세졌고 이를 저지하는 정부와의 물리적 마찰로 지금까지 최소 20명이 사망했고 수백명이 다쳤다.
◇시위 현장에서 한 남자가 경찰에게 끌려가고 있다 (사진=로이터통신)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사람들은 식료품조차 살 수가 없고, 거리에 물건을 구하러 나가면 강도에게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베네수엘라 청년 헨리크 틸렌(33)이 기자에게 전달해준 말이다.
가족들이 모두 베네수엘라 수도에 거주하고 있다고 말한 헨리크는 "사람들은 휴지가 없어 싸우는데 마두로 정권은 이를 폭력으로써 탄압하고, 언론을 장악하고 있다. 지금 시위를 하는 사람들은 차베스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지만 더 이상 정치적 입장은 큰 의미가 없다. 그들은 단지 식량과 휴지를 구하길 원한다"고 호소했다.
실제로 현재 베네수엘라에서는 생필품 부족 사태가 심각하다. 심지어 한 대학생이 만든 '생필품 찾아주기'라는 모바일 앱이 인기를 끌고 있을 정도다. 베네수엘라 한 가톨릭교회는 미사에 쓸 포도주가 없어 성찬식을 중지해야 했다.
◇음식을 구하기 위해 슈퍼마켓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베네수엘라인들 (사진=로이터통신)
이로 인해 절도와 도난 강도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등 치안 불안 역시 점점 커지고 있다.
베네수엘라의 비정부기구(NGO)인 베네수엘라폭력관측소는 2013년 살인율이 10만명당 79명이라고 추산했다.
◇위기의 핵심..극심한 경제난
현재 베네수엘라 정정 불안의 핵심 원인인 경제난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다.
국제금융연구원의 배석 연구원은 지난 5일 발표한 '최근 베네수엘라의 정정불안에 따른 경제 리스크 점검'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민족, 종교 지역간 대립 중인 시리아나 우크라이나와는 달리 베네수엘라는 경제 문제가 위기의 초점"이라고 분석했다.
우선 가장 심각한 문제는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율이다.
지난해 베네수엘라의 인플레이션율은 56%를 기록했고 2009년과 2013년 사이 연평균 인플레이션율은 무려 28.6%에 달한다.
이러한 살인 인플레이션율과 생필품 대란은 정부의 가격 통제 정책과 외환 통제 정책에 따른 것이란 분석이 크다.
정부가 빈곤층 지원 목적 등으로 생필품 가격을 임의로 조정해 생산자의 동기 저하를 불러 일으켰고 이는 결국 생산 감소로 이어져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여기에 외환보유액 감소와 자국 통화가치 하락 역시 수입 물가 상승을 부추겼다.
◇중남미 주요국 외환 보유액 (자료=국제금융연구원)
국가금융센터의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Fed)의 양적완화 축소 정책의 영향 등으로 지난해 초 298억 달러였던 외환보유액도 올 들어 217억 달러로 급감했다.
또한 베네수엘라 공식 통화가치는 지난달 달러당 6.3볼리바르였지만 암시장에선 달러당 88볼리바르로 거래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베네수엘라가 생필품의 70% 가량을 수입에 의존한다는 것을 고려했을 때 자국 화폐 가치 하락은 심각한 문제다.
아울러 미국의 셰일 혁명으로 인한 유가 하락 역시 불난 베네수엘라 경제에 부채질을 하고 있다.
지난 2012년 베네수엘라의 총수출액 대비 원유수출액 비중은 96% 이상으로 베네수엘라 경제의 원유 의존도가 매우 크기 때문이다.
◇경제 원칙 무시한 포퓰리즘 한계?
베네수엘라의 경제 시스템이 이토록 망가진데는 전 차베스 대통령의 실패한 '포퓰리즘 정책' 때문이라는 원망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집권 기간 동안 차베스는 극빈곤층에게 무료 임대 주택, 휘발유를 제공하는 친서민 정책과 부르주아들과 미국을 배척하는 반미 정책을 고수해 왔다.
실제로 차베스 정권 동안 최빈곤층의 생활은 개선됐다.
미국 경제정책연구센터(CEPR)에 따르면 2013년 기준으로 베네수엘라에서 빈곤율은 지난 2004년 이후 50% 감소했으며 극빈율도 같은 기간 동안 70% 줄었다.
차베스가 빈곤층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선택한 수단은 1000여개가 넘는 민간기업을 국유화하고 상품 가격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기름 회사 등을 비롯한 많은 회사들을 국유화했고 여기서 벌어들이는 돈을 빈곤층에게 돌려줬다. 그러나 이는 중산층과 기업인의 큰 반발을 샀고 외국인 투자 역시 멀어지게 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이는 결국 기업의 경쟁력 악화로 이어졌다.
이제는 베네수엘라 내부에서도 차베스의 경제 원칙을 벗어난 무분별한 극빈층을 돕는 포퓰리즘 정책이 궁극적으로 베네수엘라 경제를 망가뜨렸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지난 2008년 이후 정부 부채는 2배나 증가했고 바클레이즈는 베네수엘라의 연간 재정적자가 국내총생산(GDP)의 20%에 달한다고 지적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차베스 시절의 포퓰리즘이 근본적 한계에 부딪혔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마드리드 정권이 이러한 차베스의 정책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는 것이다.
헨리크는 이에 대해 "차베스는 폭탄을 만들어 놓았지만 적어도 그는 어떻게 폭탄을 다뤄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두로스는 폭탄을 다루는 법을 몰랐고 결국 그 폭탄을 터뜨린 것이나 마찬가지다"라고 토로했다.
그러나 차베스의 열렬한 지지층은 여전히 자신들에게 무료로 따뜻한 음식과 의료서비스를 제공해주던 '아버지'와 같은 차베스 대통령을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다.
◇차베스 대통령의 서거 1주년 추모식에서 그를 그리워하는 베네수엘라인들 (사진=로이터통신)
◇시위 쉽사리 끝나지 않을 것..디폴트 가능성도
베네수엘라의 시위는 쉽사리 잠잠해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마두로 정권이 차베스가 펼쳤던 경제 정책을 그대로 고집하면서 반정부 시위대를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마두로 정책은 반정부 시위대를 "극우주의자"들이라고 규정하고 물리적 압력을 가하고 있다.
남미대륙 12개국으로 이루어진 정치기구인 남미국가연합(UNASUR)은 오는 12일(현지시간) 칠레에서 외교장관 회담을 열어 베네수엘라 시위 사태에 관해 협의할 예정이지만 여기서 사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지난 7일 마두로 대통령은 남미국가연합에 긴급회의를 요청하면서 "사회와 정치를 무너뜨리고 있는 소규모 단체들의 공격과 폭력을 극복하는 베네수엘라에 대해 설명하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반정부주의자들과 일절 타협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경제전문가들은 정정불안이 길어지면 베네수엘라가 경제 불황 속에서 물가 상승이 동시에 발생하는 '스태그플레이션' 을 피해 가기 힘들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또한 외환 보유액이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기 때문에 디폴트 위협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노무라는 "베네수엘라는 우크라이나, 아르헨티나와 더불어 디폴트 가능성이 가장 높은 국가군에 포함된다"고 경고했다.
이에 따라 일각에서는 베네수엘라 시위가 우크라이나와 같은 사태로 확대되는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다만 로이터 통신은 이에 대해 "베네수엘라의 학생 시위대의 규모가 우크라이나에 비해 작은 데다, 마두로 대통령이 군사력을 손에 쥐고 있어 정부가 전복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