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황민규·곽보연기자] 미국, 유럽 등 선진국에서는 하루 단위로 새로운 3D 프린팅 관련 아이디어와 제품이 쏟아지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강건너 불구경'이다. 미디어의 집중 조명으로 관심도가 높아졌을 뿐 후발대인 일본, 중국에 비해 보급률이 아직도 월등히 낮은 수준이라는 것이 업계 일반적 견해다.
뒤늦게나마 정부도 이달부터 3D 프린팅 산업에 대한 발전방안 마련에 나섰다. 지난 9일 산업자원부는 '3D 프린팅산업 발전전략 포럼'을 열고 오는 3분기 중 확실한 계획을 마련해 정책화하겠다. 하지만 구체적인 진행 사항을 살펴보면 실천 의지에 의구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산업부 관계자는 "8~9월에 공청회나 포럼형태로 정책을 논의하는 것이 주된 목표인데 투자계획이나 구체적인 내용은 좀 더 장기적으로 봐야한다"며 "실제 3D 프린팅 예상 과제를 발굴해가는 것은 2014년이나 2015년부터나 가능하다"고 말했다.
개인, 기업, 정부 기관을 막론하고 혁신 제품이 쏟아지는 해외 3D 프린터 시장 동향에 비춰볼 때 '안이하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는 대목이다. 국내에서 3D 프린터를 생산해 판매하는 업체가 3개에 불과한 상황에서 우리나라 정부가 일본이나 중국처럼 강력한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면 마땅한 해답이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를 틈타 스트라타시스, 3D 시스템즈 등 선두권 기업을 비롯한 일본, 중국 업체들도 국내 시장을 빠른 속도로 잠식해나가고 있다. 관련 업계에 따르면 올초 한국 시장 진출을 본격적으로 선언한 스트라타시스는 순식간에 점유율 절반 수준을 차지하고 있다. 스트라타시스 관계자는 "한국 시장에 진출한 이후 총 600대 가량의 3D 프린터 모델을 판매했다"고 밝혔다.
◇스트라타시스가 지난 2월 한국에 공식적으로 선보인 이날 시연된 'Objet24'(왼쪽), uPrint SE(오른쪽) 3D 프린터.(사진출처=스트라시스 홈페이지)
◇日, 제조업 시각에서 탈피..한국은?
산업부가 추진 중인 3D 프린팅 산업 발전전략 포럼의 가장 큰 문제는 조직 자체가 '주먹구구식' 구성이라는 점이다. 16명의 전문위원들은 상당수가 3D 프린팅 전문가가 아니라 기계공학, 전자부품 등 제조업 관련 인사들이다. 국내 3D 프린팅 업체인 캐리마, 인스텍 대표이사가 위원으로 참여했지만, 두 기업의 연간 매출액을 합쳐봐야 20억원 수준에 불과한 소규모 기업들이다.
이처럼 우리 정부가 중국, 일본보다 보급 정책의 속도가 한참 늦을뿐만 아니라 3D 프린터의 가능성 자체에 대해 미온적인 이유는, 내부적으로 3D 프린터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기류가 강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번 포럼에 참가한 한 전문위원은 "위원들 사이에서는 3D 프린터 산업의 성장 가능성에 대해 아직도 의견이 갈리고 있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산업자원부의 한 관계자는 "제조업의 관점에서 봤을 때 3D 프린팅을 통해 제작된 결과물이 정밀도가 일반 금형보다 떨어진다는 문제도 지적된다"며 "또 상당수의 3D 프린팅 기술이 특정 소재가 층을 쌓아가며 형상을 구현하는 '적층방식'이기 때문에 내구성이 약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는 세계 시장 기술 동향과 전혀 맞지 않는 얘기다. 실제로 미국, 중국에서는 티타늄 소재를 활용해 스틸 소재보다 무게는 절반, 강도는 월등히 강한 비행기 부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생산단가는 더 저렴하고 제조 시간도 단축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픈 소스인 적층방식의 3D 프린팅도 진화를 거듭해 사출성형을 통해 제작된 제품과 내구성 차이가 거의 없다고 알려져 있다.
◇미국의 항공기 제조업체 보잉(Boeing)은 최근 항공기 부품 제작에 3D 프린터를 활용한다.(사진출처=보잉 홈페이지)
3D 프린터 산업에 대한 이같은 인식은 과거 일본의 전문가들이 피력했던 의견과 비슷해 보인다. 과거 일본 제조업계 전문가들은 "3D 프린팅 기술은 이미 제조업 분야에서 30여년전에 개발된 이후 지난 20년간 시제품을 생산하는데 종종 사용돼 왔기 때문에 전혀 새로운 기술로 볼 수 없으며 어떤 부분에서는 비효율적"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당시 일본 산업계의 가장 큰 고민도 ‘3D 프린팅 산업이 투자할만한 가치가 있는가’였다. 하지만 이제는 시각이 달라졌다. 최근 일본 내 주요 매체들은 "어떻게 3D 프린터가 주도하는 시장 환경에서 제조업 강국 일본의 강점을 발휘할 수 있을까"에 대한 제언이 넘쳐난다. 인식의 변화는 정부가 직접 3D 프린터 확산에 나서며 관련 업계 종사자들이 3D 프린터를 직접 체험해볼 기회가 많아진 것이 주효했다.
일본 산업기술종합연구소는 최근 보고서를 통해 "3D 프린팅 기술이 일반인들뿐만 아니라 전통적으로 제조업과 관련이 없던 의학, 디자인, 전기전자 부문에서 활용되기 시작하며 생각지도 못했던 아이디어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는 점은 더 이상 3D 프린터를 전통적인 제조업의 관점에서 볼 수 없다는 가장 단적인 증거"라고 설명했다.
◇위기의 한국 제조업, 현실 보고 미래 준비해야
"우리 제조 기업들은 하드웨어, 제조 마인드를 통한 공급자 중심의 생산에 의존하다 보니 저원가 대량생산 체제란 양적 성장만 추구해왔다. 고속성장의 한 그늘인 경직된 기업문화도 창의성을 발휘하기 어려운 구조를 만들었다."
지난 18일 정준양 포스코 회장은 작정이라도 한 듯 국내 제조업계 현실에 대해 날선 비판을 쏟아냈다. 정 회장의 이같은 발언에는 일종의 '위기감'이 깔려 있다. 실제 국내 제조업계의 공급과잉률은 자동차산업 25%, 철강이 30%에 달한다. 아베노믹스 여파로 글로벌 시장에서 일본과의 가격 경쟁이 어려워지고 중국과의 기술 격차도 좁혀지고 있다.
한국과 유사하지만 더 탄탄한 제조업 기반을 자랑하는 일본, 독일 등이 3D 프린팅 산업을 위기가 아닌 기회로 여기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3D 프린팅 산업이 개화하면 제조업 침체에 신음하는 일본, 독일의 사출성형 업체들도 프로토타입 제작비용 절감, 재고 물량 효율화 등을 위해 3D 프린터를 적극 활용할 수 있다. 일부 제조업체들도 제품 생산 과정에 고급 3D 모델링을 도입해 직접 소비자 주문 방식의 사업으로 전환할 움직임도 나타내고 있다.
◇일본의 3D 프린터 기업 파소텍(Fasotec)은 산부인과와 협력해 태아의 모습을 3D 프린터로 제작해주는 '천사의 모습'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사진=파소텍 홈페이지)
박근 서울산업대 교수는 "제조업체 입장에서 봤을 때 제품 디자인, 제작 난이도에 따라서 3D프린팅을 공정에 적용하는 방법이 훨씬 유리할 수 있다"며 "또 3D 프린터의 가격, 재료가 내려간 만큼 제조업에서만 쓰던 전유물이 디자인, 의료 등 다양한 영역으로 넓어지고 있는 만큼 대중화에 따른 더 큰 파급 효과도 주목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3D 디자인에 대한 교육 문제도 시급한 사안이다. 국내 3D 프린팅 업계의 최대 과제는 활용 분야를 넓히는 것인데 3차원 콘텐츠가 많지 않아 어려움이 큰 상황이다. 이때 3D 스캐닝 기술이 3차원 모델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지난해 미국 3D시스템즈가 세계 시장 1위의 3D 스캐너 업체인 '아이너스기술'을 인수한 것도 3D 콘텐츠 확보의 중요성 때문이다.
국내 3D 프린터 생산업체인 로킷의 오아름 매니저는 "영국의 경우 초등학교 교과 과정에 3D 프린팅을 넣는 등 3D 프린터를 창조 활동을 지원하는 디바이스로 인식하고 있다"며 "3D 프린팅이 앞으로 어느 부문에서 급성장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보급률을 높여 창조적 아이디어가 나올 배경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스티브 잡스가 발견한 '첨단기술 대중화'의 위력
애플의 성공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현대 소비사회에서 가장 폭발적인 성장 동력은 '첨단기술의 대중화'다. 첨단 기술을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는 형태로 만드는 것이 애플의 기술철학이었고 이는 아이폰이 '시대의 아이콘'으로 급부상하는 데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같은 견지에서 보면 3D 프린터가 지니는 가능성도 무궁무진하다. 해외에서는 디자인, 의학, 제조업, 전기전자 등 다양한 업종의 아이디어와 '융합'하며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결과를 창출하고 있다. 당장은 3D 프린터의 보급률을 높이는 것이 가장 큰 과제라는 얘기다. 이는 산업부의 소극적인 발전전략이 위험해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중화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바로 국산화다. 갈수록 치열해지는 3D 프린터 업체 간 글로벌 경쟁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그 어떤 것보다도 '자생력'이 중요한 변수다. 하지만 정부의 3D 프린팅 산업 육성 정책은 일본이나 중국과는 정반대로 가고 있다.
◇국내 3D 프린터 대표기업 캐리마의 광조형기와 이를 통해 만든 캐릭터제품들.(사진=캐리마 홈페이지)
이병극 캐리마 대표이사는 "현재 국내 시장에서 외국 기업의 시장점유율이 엄청난데 문제는 바로 정부라고 본다"며 "현재 캐리마의 매출은 58%가 수출에서 발생하고 있는데, 이는 정부가 국산 제품보다 외제를 선호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3D 프린터가 미래 산업의 새로운 핵으로 떠올랐다는 근거는 이미 충분하다. 소설가 윌리엄 깁슨의 말을 빌리면 '미래'가 이미 와 있다는 얘기다. 당면한 문제는 이미 한참 앞서나간 국가들과의 기술력 차이를 어떻게 극복하느냐, 다시 말해 3D 프린터를 통해 어떤 혁신이 가능한가의 문제다. 입으로만 창조경제를 외칠 것이 아니라 진정한 창조를 받아들여야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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