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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판사들 등장으로 FTA 논란 새로운 국면
대법원 대응 미숙 땐 사법파동 우려, 정부 부담도 가중
2011-12-02 11:55:42 2011-12-02 16:28:45
[뉴스토마토 최현진기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판사들이 늘고 있다. 사회 각계각층의 한·미 FTA 반대 움직임에 사법부가 본격적으로 뛰어든 모양새다.
 
양승태 대법원장을 비롯한 법원 수뇌부들은 판사들에게 공개적인 입장 표명을 자제해달라는 주문을 하고 있지만 일선 판사들의 FTA비판은 멈추지 않을 기세다.
 
◇ 최은배 부장판사가 페이스북에 남긴 짧은 글
 
사법부 FTA논란의 시작은 최은배 인천지법 부장판사(45·사법연수원 22기)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남긴 짧은 글이었다.
 
최 판사는 한나라당이 국회에서 한·미 FTA 비준안을 강행처리한 다음날인 지난달 23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뼛속까지 친미인 대통령과 통상관료들이 서민과 나라 살림을 팔아먹은 2011년 11월22일, 난 이날을 잊지 않겠다'고 썼다.
 
파장은 컸다. 최 판사가 남긴 글을 본 많은 동료판사들은 최 판사의 의견에 동의를 보냈다. 하지만 보수언론들은 최 판사에게 "정치편향적"이라며 본격적인 꼬투리잡기에 돌입했다.
 
논란이 계속되자 대법원은 최 판사를 대법원 공직자윤리위원회에 회부했고, 이에 따라 지난달 29일 열린 공윤위는 최 판사에게 면책 판정을 내리는 대신, 대법원장에게 판사들의 SNS 사용기준을 마련하도록 건의하기로 결정했다.
 
한·미 FTA와 공윤위의 결정에 대한 법원 내 갑론을박이 거세지고 있는 가운데, 김하늘 인천지법 부장판사(43.사법연수원 22기)는 "한·미 FTA 재협상을 요구하겠다"는 취지의 글을 지난 1일 법원 내부게시판인 코트넷에 올려 다시 한 번 논란에 불을 지폈다.
 
스스로를 "합리적 보수주의자"라고 밝힌 김 판사는 "한·미 FTA가 여러 독소조약을 품고 있고 우리의 사법주권을 명백히 침해한다는 점, 일방적으로 불리한 불평등 조약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 동의한다"면서 "자신의 글에 동의하는 판사 100명이 있으면 양 대법원장에게 법원행정처 내 한·미 FTA 재협상을 위한 TF를 구성할 것을 청원하겠다"고 밝혔다.
 
현재 김 판사의 글에 동의하는 판사들의 숫자는 이미 120명을 넘어섰다.
 
◇ 법관들, 직접 방송 출현해 입장 표현하기도 
 
법관들은 이제 직접 방송에 출현해 목소리를 통해 자신들의 입장을 표명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다.
  
한·미 FTA 논란을 처음으로 촉발시킨 최 판사는 2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현해 "FTA의 투자자-국가 소송제(ISD) 조항은 사법 주권의 침해소지가 있다"는 의견을 밝혔다.
  
최 판사는 "현행법상으로는 (분쟁이 일어나면) 직접보상의 원칙 안에서 직접 들였던 비용만을 보상하도록 되어 있다"며 "향후 생길 수 있는 수익까지 다 계산을 해서 주지는 않을 뿐더러 문제는 우리 법원이 (결정하지) 못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최 판사는 자신의 발언을 문제 삼고 비난한 보수언론들을 비판하고, 전날 김 판사가 "한·미 FTA 재협상을 위한 TF를 구성할 것을 청원하겠다"고 올린 글에 대한 동조의사를 분명히 했다.
  
이정렬 창원지법 부장판사(42·사법연수원 23기)도 이날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한미 FTA로 우리나라 사법주권이 침해됐다"며 비판에 가세했다.
  
이 판사는 "우리 법원의 사법권이 박탈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서 "미국 투자자가 협정 위반을 이유로 우리 정부를 상대로 해서 분쟁을 벌이면 재판권이 엉뚱하게 제3의 중재기구에 관할권이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이 판사는 "한·미 FTA 협정 중에서 ISD에 관한 문제는 사법주권에 관한 거고 법적인 내용이기 때문에 법률가인 판사들에게는 본연의 업무에 관한 것"이라면서 "이건 법적인 문제고 정치적 중립의무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법부 내부에서 불어오는 FTA 비판이 날로 거세지고 있다. 향후 이 바람이 어떻게 변화하게 될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 양승태 대법원장, 사태 해결 미숙 땐 사법파동 우려
 
상황이 심각해지자 양 대법원장은 지난 1일 열린 신임 법관 임명식에서 "독특한 신념에 터 잡은 개인적인 소신을 법관의 양심으로 오인해서는 안된다"며 본격적으로 진화에 나서는 모습이었다.
 
양 대법원장은 "재판의 독립을 수호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무기는 바로 국민의 신뢰"라며 "법관은 모든 언동이나 처신에 있어 균형감각과 공정성을 의심받을 행위를 결코 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평소 같으면 원론적인 발언에 불과하지만, 때마침 SNS 논란과 맞물려 비판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다.
 
양 대법원장은 2일 열린 법원장회의에서도 법관들의 FTA비판을 에둘러 비판했다.
 
양 대법원장은 "개개인의 이해관계가 모두 다를 수 있다"고 운을 뗀 뒤 "그러나 나라와 법원을 위한다면 각자가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전체적인 법원구조와 틀을 먼저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양 대법원장은 또 "선비는 오얏나무 아래서 갓끈을 고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면서 "법관은 항상 조심하고 진중한 자세로 끊임없이 성찰해야 해야만 모든 일을 올바른 방향으로 잡고 나갈 수 있다"는 의견을 나타냈다.
 
하지만 양 대법원장이 이번 사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미숙하게 대응할 경우 사법파동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다.
 
◇ 2일, FTA 협정문 번역오류 공개 판결까지 선고돼
 
일선 판사들의 등장으로 양 대법원장의 리더십이 시험대에 오른 것은 물론, 정부도 예기치 않은 반대세력의 등장으로 한미FTA를 둘러싼 논란이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하고 있다.
 
판사들의 집단적인 반발 움직임에 더해 2일 서울행정법원 행정4부(이인형 부장판사)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회장 김선수)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정문 한글본의 번역 오류 내용을 공개하라"며 외교통상부 장관을 상대로 낸 정보비공개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원고승소 판결했다.
 
외교부는 지난 6월 협정문 한글본의 번역 오류를 재검독한 결과 잘못된 번역이 166건, 맞춤법 오기 9건, 번역 누락 65건, 번역 첨가 18건, 일관성 결여 25건, 고유명사 표기 오류 13건 등 총 296건의 오류를 찾아내 정정했다고 밝힌 바 있다.
 
한미 FTA 비준안이 이명박 대통령 서명까지 끝났지만 사태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국면으로 진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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