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밤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남편의 생일이었던 그날, 아이들을 재운 우리 부부는 맥주 한 캔으로 가볍게 자축의 시간을 나누려던 참이었다. 대통령의 담화가 있다는 소식에 '왜 굳이 이런 시간에'라는 불평으로 TV를 틀었고, 그곳에서는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발언이 던져졌다.
"비상 계엄을 선포한다."
그로부터 1년 하고도 한 달이 조금 넘는 사이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대통령이 바뀌었고, 무너졌던 국격과 국민들의 자존심은 차츰 회복이 됐다. 무정부 상태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할 것 같았던 미국과의 관세 협상은 기대 이상으로 마무리됐고, 경주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는 전 세계인이 한국을 다시 보는 계기가 됐다. '박스피'라는 오명을 떨치지 못했던 증시도 꿈의 지수라 불렸던 5000포인트를 돌파했다. 달러당 1400원이 뉴노멀이 된 환율과 천정부지로 치솟은 집값, 고공행진 중인 밥상 물가 정도의 아쉬움만 제외한다면 '비정상의 정상화'가 이뤄지고 있다.
그럼에도 유일하게 해결되지 않은 한 가지, 내란 청산이다. '반국가세력'을 척결한다며 비상계엄을 선포한 이는 구속과 석방과 재구속을 반복하며 여전히 자신이 정당했음을 주장하고 있고, 계엄 선포가 잘못됐음을 인정하면서도 내란죄를 물을 수 없다고 항변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러던 중 의미 있는 판결이 나왔다. 지난 21일 한덕수 전 국무총리의 내란 재판에서 12·3 비상계엄을 처음으로 '내란'으로 판단한 것이다. 재판장이었던 이진관 판사는 "12·3 비상계엄은 헌법과 법률이 정한 요건과 절차를 완전히 무시한 채, 오로지 헌법 기관의 기능을 마비시키기 위해 행사된 국헌 문란 목적의 폭동"이라고 규정하며 한 전 총리에게 징역 23년을 선고했다. 검찰이 구형한 징역 15년을 훌쩍 뛰어넘는 결과다.
이날 재판에서는 비상계엄의 위법성을 지적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할애했다. 이 판사는 "12·3 내란이 '위로부터의 내란에 해당한다"며 "그 위험성의 정도가 '아래로부터의 내란'과 비교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런 형태의 내란을 이른바 '친위 쿠데타'라고 부른다"고도 덧붙였다.
'비상계엄이 몇 시간 만에 종료됐으니 내란으로는 볼 수 없다'는 내란 일당의 주장에 대해서는 "무장한 계엄군에 맨몸으로 맞서 국회를 지킨 국민 용기에 의한 것"이라며 "결코 내란 가담자에 의한 게 아니다"라고 명확히 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내란을 무명의 시민들의 힘으로 막아냈고, 내란을 유발한 이들에 대한 처벌이 정당함을 법적으로도 확인한 것이다. 법정구속된 한 전 총리를 시작으로 내란 청산 작업은 속도를 내야 한다. 다음달로 예정된 내란 우두머리에 대한 선고를 비롯해 모든 내란 가담자들에게 엄벌을 처해 다시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내란 일당에 자비는 사치다.
김진양 산업2부 팀장 jinyangkim@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