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강석영 기자] 국회가 내란전담재판부 설치 등 강도 높은 사법개혁안을 추진하는 가운데, 법원이 사법제도 개편에 관한 공청회를 열었습니다. 사법부 안팎의 목소리를 듣겠다는 취지입니다. 공청회는 9일부터 사흘간 진행되는데, 첫날 첫 주제로는 ‘재판 지연’이 선정됐습니다. 국민의 삶과 밀접한 사건은 대부분 1·2심에서 결정되는 만큼 사실심 법관을 충원하는 게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9일 서울법원종합청사에서 열린 '국민 위한 사법제도 공청회'에서 1세션이 진행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대법원 사법행정기구인 법원행정처는 이날부터 오는 11일까지 서울고법 청심홀에서 법률신문과 공동으로 ‘국민을 위한 사법제도 개편: 방향과 과제’라는 제목의 공청회를 엽니다. 천대엽 법원행정처장은 공청회 개회사에서 “많은 국민들이 사법부에 대한 높은 불신을 보여주고 있다”며 “저희 사법부는 깊은 자성과 성찰을 하고 그것을 해소하기 위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공청회 주제는 △우리 재판의 현황과 문제점 △사법의 공정성과 투명성 강화(증거수집절차·판결서공개·재판중계 등) △국민의 사법참여 확대(노동법원 설치와 국민참여재판 확대 중심) △국민의 인권보장을 위한 형사사법제도 개선(압수수색·인신구속·재정신청제도 등) △상고제도 개편 방안 △대법관 증원에 대한 논의 등입니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내란전담재판부 설치에 관한 주제는 이번 공청회에선 빠졌습니다. 다만 마지막날인 11일 내란전담재판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가능성도 있습니다. 마지막 날엔 김선수 전 대법관을 좌장으로 해 문형배 전 헌법재판관 등이 참여하는 종합토론가 열립니다. 주제는 ‘사법부가 나아갈 길’로 정해졌기 때문입니다.
9일 서울법원종합청사에서 열린 '국민 위한 사법제도 공청회'에서 천대엽 법원행정처장이 개회사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첫날 첫 세션에선 사실심 재판 지연에 관한 문제가 언급됐습니다. 발제에 나선 기우종 서울고법 고법판사는 “2020년 이후 사법부의 최우선 당면 과제는 재판 지연 해소”라면서 “2010년대 중반 우리나라의 민·형사재판의 신속성은 세계에서 매우 우수한 편에 속했다. 그런데 2010년대 후반부터 점차 재판의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 코로나19의 직접적 영향을 받는 2020~2022년을 거치는 동안 재판 지연이 가속화됐다”고 주장했습니다.
기우종 고법판사에 따르면, 1심 민사합의 사건 평균 처리기간은 2017년 293.3일에서 지난해 437.3일로 49%나 증가했습니다. 같은 간 1심 형사합의 사건의 평균 처리기간도 150.8일에서 198.9일로 31% 늘어났습니다. 반면 서면으로 심리하는 상고심 재판은 코로나19 등 영향을 받지 않아 오히려 처리기간이 단축됐습니다.
사법정책연구원은 재판 지연의 주요 원인으로 △복잡사건 증가·공판중심주의 정착 등 사법제도 변화에 따른 업무량 증가 △법관 정원의 동결 △법관 평균연령 증가 △고등부장 승진 제도 폐지로 인한 인센티브 약화 △빈번한 재판부 교체 등을 꼽았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법개혁은 대법관 증원이 아닌 사실심 법관 증원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정지웅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시민입법위원장(변호사)은 “정치권 일각에서 주장하는 대법관 증원은 오진에 기초한 잘못된 처방”이라며 “통계가 말해주는 사법 시스템의 진짜 문제는 사실심의 부실화와 지연”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정 위원장은 “이런 상황에서 대법관 숫자만 늘리면 그들을 보좌할 재판연구관도 늘려야 한다. 결국 유능한 부장판사급 인력들이 대법원으로 대거 차출될 수밖에 없다”며 “1심 재판부는 경력이 짧은 판사들로 채워지고, 재판질은 더 떨어지고, 불복률은 높아져 상고심 사건은 더 폭증하는 악순환이 불 보듯 뻔하다”라고 비판했습니다.
정 위원장은 그러면서 “사법개혁의 최우선 순위는 대법관 증원이 아니라 사실심 법관의 대폭적인 증원과 재판 지원 인력의 확충이어야 한다”며 “예산과 인력을 ‘머리’가 아닌 ‘손발’에 집중해 달라”고 주문했습니다.
한편, 이날 민주당에서 추진하는 내란전담재판부 등 특별재판부 설치에 우려를 표하는 목소리도 나왔습니다. 전담재판부는 사건의 무작위 배당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다는 주장입니다.
정지웅 위원장은 “우리 헌법은 모든 국민에게 ‘법률이 정한 법관에 의해 재판받을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이는 권력이 자의적으로 재판부를 구성해 원하는 판결을 얻어내려는 시도를 막기 위한 사법권 독립의 핵심 원칙”이라며 “이를 실천하는 구체적 장치가 사건의 무작위 배당”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정치적 사건일수록 더욱 엄격하게 무작위 배당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강석영 기자 ksy@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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