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어로 라파누이(Rapa Nui)라고 불리는 태평양 한가운데 고립된 작은 이스터섬. 이곳은 수백 년 동안 고고학자와 탐험가, 여행객의 상상력을 자극해 왔습니다. 해안가를 따라 일렬횡대로 늘어선 모아이들은 최대 10미터 높이에 86톤의 무게를 자랑하며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이 초대형 석상들이 섬의 동쪽 분화구 라노 라라쿠(Rano Raraku) 근처에서 조각된 뒤 수 킬로미터 떨어진 제단 아후(Ahu)까지 어떻게 이동했는지는 라파누이 연구의 핵심 과제로 남아 있었습니다.
최근 미국 빙엄턴대 인류학과 칼 리포(Carl Lipo) 교수와 애리조나대 인류학과 테리 헌트 교수가 <고고학 저널(Journal of Archeological Science)>에 공동 저자로 발표한 논문 ‘워킹 모아이 가설: 고고학적 증거, 실험적 확인, 비판에 대한 반론(The walking moai hypothesis: Archaeological evidence, experimental validation, and response to critics)’은 이 문제에 대해 한 가지 가설을 뒷받침하는 통합적 증거를 제시해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빙엄턴대의 칼 리포, 애리조나 대학의 테리 헌트와 그들의 팀은 2012년에 18명의 사람들이 줄을 묶어 흔들어 모아이를 움직이는 것을 시연했다. (사진=Lipo and Hunt 제작 동영상 캡처)
지금까지는 모아이를 나무로 만든 썰매 같은 구조물에 실어 통나무 굴대를 이용해 운반했다는 것이 통설이었습니다. 그러나 섬의 숲이 이미 고갈되어 있었던 시기에 이만한 규모의 목재를 확보했을 가능성이 낮다는 것, 눕힌 상태에서 끌려 이동했을 때 생길 법한 손상 패턴과 실제 발견된 손상 흔적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 등 여러 문제점이 꾸준히 제기됐습니다. 특히 이동 중 쓰러진 채 남겨진 모아이들의 파손 형태는 석상이 세워진 상태로 전방으로 넘어지며 손상된 특징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통설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제기된 것이 이른바 ‘워킹 모아이 가설’입니다. 이름 그대로 모아이가 세워진 채 운반되었다는 주장입니다. 이번 논문은 기존의 단편적 자료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며, 이 가설이 고대 라파누이 사회의 기술적·사회적 환경을 설명하는 데 유력한 해석 틀이라고 주장합니다.
워킹 모아이 가설은 우선 모아이 자체의 조형적 특징에 주목합니다. 모아이는 전체적으로 앞쪽으로 미세하게 기울어진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아랫부분의 단면은 앞쪽이 둥글고 뒤는 평평한 D자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이런 구조는 무게중심이 하체 전방으로 실려 석상이 좌우로 흔들리며 전진할 때 안정성을 확보하는 데 유리한 구조입니다.
연구진은 이런 형태적 특징을 바탕으로 모아이 이동 방식이 단순한 굴림이나 끌기 방식이 아니라, 여러 명이 좌우와 뒤편에서 밧줄을 당기며 리듬에 맞춰 흔드는 방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합니다. 흔들림이 한쪽으로 과도하게 쏠리지 않도록 조절하면 모아이는 마치 발을 번갈아 내딛듯이 자연스럽게 한 걸음씩 앞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연구자들은 이 움직임을 항아리나 큰 냄비를 흔들어 전진시키는 방식에 비유합니다.
연구진은 이 가설을 뒷받침하는 고고학적 증거들을 종합해 제시합니다. 특히 모아이 측면에 남아 있는 U자형 홈과 마모 자국은 반복적인 마찰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밧줄이 일정한 리듬으로 당겨지고 풀리기를 반복하며 생긴 흔적으로 해석했습니다. 또 이동 중 균형을 잃고 쓰러진 모아이들의 파손 양상 역시 똑바로 세워진 상태에서 넘어졌을 때의 흔적과 비슷한 구조를 보였습니다.
라노 라라쿠 채석장 주변에서도 완성되지 않은 채 버려진 모아이들이 다수 발견되는 데 이들 중 일부는 이동을 시도하다 쓰러져 부서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흥미롭게도 이들의 손상 방향과 균열 형태는 모두 세워진 상태에서 전방으로 넘어졌을 때와 일치합니다. 연구진은 이 같은 증거들이 모아이가 실제로 세워진 채 이동되었음을 뒷받침한다고 설명합니다.
워킹 모아이 가설을 둘러싼 논쟁은 실험 고고학을 통해 한층 구체화되었습니다. 이미 2012년 미국 연구팀은 5톤 규모의 모아이 모형을 제작해 실험 참가자들이 밧줄을 이용해 이동시키는 데 성공한 바 있습니다. 좌우팀이 일정한 박자를 맞춰 밧줄을 당기자 석상은 실제로 좌우로 흔들리며 전진했고, 실험은 전 세계 언론의 큰 관심을 끌었습니다.
이번 논문은 이런 실험을 더 정밀하고 과학적인 방식으로 확장했습니다. 연구팀은 실제 모아이의 치수 비율을 최대한 재현한 모형을 새로 제작했으며, 라파누이 토착 식물성 섬유를 이용한 밧줄을 사용해 당시 환경을 재현했습니다. 이동 지형 역시 섬의 경사도와 유사한 3~12도의 구간을 설정해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연구팀은 소규모 인원만으로도 모아이를 안정적으로 이동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최적의 리듬에서는 시간당 약 80미터의 이동이 가능했습니다.
특히 실험은 워킹 방식이 위험하다는 기존 비판을 정면으로 반박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세워진 거석이 쉽게 중심을 잃을 것이라고 우려했지만, 연구팀은 기울어진 바닥이 오히려 균형을 돕는 방향으로 작용하여 전도 위험이 예상보다 훨씬 낮았다는 결과를 확인했습니다.
위는 리포 교수와 헌트 교수가 이번 고고학 저널에 발표한 논문에서 제시한 모아이 운반 방법, 아래는 그동안 제시되었던 여러 가지 방법들. (이미지=Journal of Archeological Science)
비판과 반론, 가설의 확장
그러나 워킹 모아이 가설에 대한 비판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반대 의견은 통나무 굴림 방식이 더 단순하고 전통적인 기술이며 워킹 방식이 지나치게 현대적 발상이라는 주장입니다.
네덜란드 레이든대(Leiden University)의 얀 보어스마(Jan Boersema) 교수는 “이번 논문에서 제시한 데이터가 정확하다면 모아이가 선 채로 이동했다는 유력한 증거가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썰매와 굴대 등 다른 방법을 썼을 가능성이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1982년부터 이스터섬 석상 프로젝트(Easter Island Statue Project)를 진행해 내년 3월에 600쪽에 달하는 포괄적인 보고서를 제출할 예정인 로스앤젤레스캘리포니아대(UCLA) 고고학과 앤 반 틸벅(Anne Van Tilburg) 교수는 <뉴욕타임스>와 인터뷰에서 라파누이들이 그때그때 가장 실용적인 방법을 사용했을 것이라고 추정하며 “인간 행동의 범위와 풍부한 문화사의 복잡성을 하나의 이론으로 집약하는 것은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논문은 서로 다른 연구자들이 여러 차례 실험을 통해 모아이가 실제로 ‘걸을 수 있음’을 독립적으로 입증해왔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뉴질랜드 오클랜드 대학교의 이선 코크란(Ethan Cochrane) 교수는 과거 라파누이 구전설화에도 모아이가 “스스로 걸어왔다”는 표현이 적지 않게 등장하는데, 이것이 기술적 과정의 은유적 표현일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습니다.
서경주 객원기자 kjsuh57@naver.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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