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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락가락 근로시간 개편안…중견·중기·벤처 혼란
"주 60시간 캡 씌우면 차라리 현행 주 52시간이 나아"
유연성 희석에 우려 커져
2023-03-23 16:14:17 2023-03-23 16:45:06
[뉴스토마토 변소인 기자] 윤석열정부의 근로시간 개편안 초안에 환영의 뜻을 내비쳤던 중견·중기·벤처기업계가 주 60시간 근로시간 상한 '캡' 추진으로 가닥이 바뀌자 일제히 의구심을 드러냈습니다. 앞서 기업계는 업종 특성상 집중 근로가 필요한 경우 유연하게 근로시간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 반색했지만, 이제는 표정이 달라진 모습입니다. 주 60시간으로 상한선을 정해버리면 기존과 크게 달라질 게 없다는 입장입니다.
 
앞서 이달 6일 정부는 비상경제장관회의에서 근로자들이 일주일에 52시간까지만 일하도록 하는 현행 제도를 개선해 바쁠 때는 주 최대 69시간까지 일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장기 휴가를 사용할 수 있게 하는 내용의 개편 방안을 발표했습니다. 기업의 자율성을 대폭 강화해 몰아서 일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이에 중견·중기·벤처기업계는 근로시간의 유연성 확보가 가능해진 진일보적 개편안이라고 반겼습니다.
 
그러나 지난 21일 윤 대통령이 돌연 주 60시간 이상은 근무는 무리라고 못 박자 기업계는 우려의 뜻을 내비쳤습니다. 고용노동부와 대통령실 간 의견 합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업계는 혼란스럽다는 반응입니다.
 
지난 15일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읍 일대 모습. (사진=연합뉴스)
 
중견·중기·벤처기업에는 하청업체로서 납기를 맞춰야 하는 기업, 소재 특성상 중간에 생산을 멈추기 힘든 제조업, 프로젝트성 일이 많은 IT기업, 집중적인 연구가 필요한 연구·개발(R&D) 기업들이 포진해 있습니다. 이들은 업종별 특성상 몰아서 근무하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예컨대 납기를 앞둔 주물을 제작하는 경우, 열을 가해 금속을 용해해둔 상황에서 근무시간에 맞춰 퇴근을 해버리면 용해해둔 금속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게 된다는 설명인데요. 다음날 다시 용해하기 위해서는 에너지도 많이 허비됩니다.
 
이같은 상황을 고려할 때 주 60시간 상한이 있다면 근로시간 개편에 의미를 찾기가 어렵다고 업계는 입을 모읍니다. 벤처기업협회 관계자는 "자꾸 시간에 대한 프레임이 씌워지는 것 같은데, 업계에서는 근본적으로 근로시간 유연화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라며 "현행 주 52시간 안에서 연장근로를 하는 것은 지금도 하고 있는 것이어서 주 60시간 상한선이 있는 것은 유연하지 못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차라리 현행제도가 낫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박양균 중견기업연합회 정책본부장은 "근로시간의 개편 이유가 갑작스럽게 일이 몰리거나 부득이하게 추가근로를 해서 납기를 맞춰야 하는 상황, 시간을 집중 투자를 해야 하는 R&D 업종 등이 유연하게 집중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면서 "현재도 탄력근로 등을 추가로 하면 주 64시간도 가능하기 때문에 주 60시간 상한선은 현행 주 52시간제보다 더 후퇴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많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오히려 근무시간 상한 캡을 씌게 되면 인력만 구하기 힘들어져서 기업들이 더 어려워질 수 있다"며 "일각에서는 개편하지 말라는 목소리도 나온다"고 덧붙였습니다. 박 본부장은 만약 주 60시간 상한 캡이 생길 경우 특별연장근로나 탄력근로 활용 조건을 대폭 완화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중소기업중앙회와 한국경영자총협회는 23일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근로시간제도 개선 방향' 토론회를 열고 문제점과 개선방안을 논의했습니다. 이정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기업경쟁력을 높이고 일자리를 유지·창출을 위해 근로시간제 유연화 방안 모색이 필요하다"면서 연장근로 단위 개편, 탄력적 근로시간제 보완 등 8가지 개선방안을 제안했습니다. 
 
이날 토론에 참석한 황인환 한국전기차인프라서비스사업협동조합 이사장은 "중소기업은 갑자기 주문이 몰릴 때 납기를 맞추려면 추가연장근로가 불가피한데 현행 주 52시간으로는 너무 빠듯하다"며 "납기 맞추다가 주 52시간 근무를 초과하면 형사처벌까지 무릅써야 하는 상황"이라고 꼬집었습니다. 채효근 한국IT서비스산업협회 상근부회장은 "IT·소프트웨어 업종은 고객과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과업이 결정되고, 프로젝트가 가시화될수록 요구사항이 증가해 근로시간을 사전예측하기 어려운 특성이 있다"며 "정부 개편안이 근로시간 유연성 제고 측면에서 도움이 되지만 11시간 연속휴식 등 건강권 보호 조치에 있어서는 기업과 근로자간 자율성을 좀 더 존중할 필요가 있다"고 발언했습니다.
 
김강식 한국항공대 교수는 "근로시간제도는 노사의 자율적 선택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개선돼야 하며 이를 통해 기업경쟁력 향상과 근로자의 삶의 질 향상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변소인 기자 byline@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나볏 중기IT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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