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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받지 않을 권리①)인권위 “노숙인 전용병원 없애야”…복지부는 외려 확대
복지부, 의료급여 수급권자 중 노숙인만 “지정병원 가라”
인권위 “폐지하라” 권고 해도 지정병원 숫자만 대폭 확대
“복지부 고시, 평등하게 누릴 건강권 침해…헌법 위배 우려”
2022-06-07 06:00:00 2022-06-07 06:00:00
[뉴스토마토 김응열 기자] 건강할 권리는 모두에게 있다. 헌법 10조와 35조에서 나오는 건강권은 건강하고 쾌적하게 생활할 권리를 말한다. 병에 걸렸을 때 차별없이 진료를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뜻하기도 한다. 그러나 노숙인은 건강권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노숙인이라는 이유로 지정된 병원에 가야 의료급여 혜택을 받을 수 있다. 10분이 채 되지 않는 진료를 받기 위해 이들은 수시간 동안 지정 병원으로 먼 길을 가야 한다. 노숙인에게 유독 높은 의료 문턱을 낮추기 위해서는 근본적 문제인 지정병원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노숙인의 건강권 보장을 두고 국가인권위원회와 보건복지부가 엇박을 내고 있다. 인권위는 노숙인 전담 병원 제도를 폐지할 필요가 있다고 권고했지만 복지부는 오히려 확대했다. 그마저 감염병 유행이 우려되는 시기의 1년간으로 조건을 달았다. 노숙인들은 특정한 의료시설에서만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제도가 굳어지면서, 체감하는 의료 문턱은 좀처럼 낮아지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복지부 관계자는 7일 노숙인진료시설 지정제도 폐지 가능성에 관해 “정해진 사항이 아무것도 없다”며 “연구용역을 해봐야 (제도의)어떤 부분이 부족한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권위에 따르면 복지부는 최근 인권위에 노숙인진료병원 지정을 확대하는 고시를 제정했다고 회신했다. 또 노숙인진료시설 지정제도 폐지에 관해서는 향후 관련 연구용역을 추진해 개선방안을 마련하겠다는 계획을 전달했다.
 
 
복지부가 지난 3월 마련한 ‘노숙인진료시설 지정 등에 관한 고시’는 감염병 위기단계가 ‘주의’ 이상일 경우 1년간 한시적으로 요양병원을 제외한 1차·2차 의료급여기관을 노숙인진료시설로 확대지정하는 내용이다. 복지부는 고시 제정으로 노숙인 진료시설이 기존 전국 291개에서 7만3398개로 늘어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복지부 고시는 인권위 권고에 역행하는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인권위는 지난해 11월 노숙인 진료시설 지정제도를 폐지하라고 권고했다. 노숙인이 주로 이용하는 공공병원이 코로나19 확산으로 감염병 전담병원으로 지정돼 노숙인이 이용하기 어려워지면서 의료공백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인권위는 “노숙인 진료시설 지정제도는 보편적 의료서비스 접근권을 침해한다”며 노숙인 진료시설 지정제도를 전향적으로 폐지하되, 관련 규정을 바꾸기 전까지 노숙인 진료시설을 지속적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진단했다.
 
인권위는 복지부가 노숙인진료시설 지정제도 폐지 등에 관해서는 분명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 연구용역 추진계획 외에는 권고사항을 이행하기 위한 계획도 제출하지 않았다며, 권고 일부만 수용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복지부가 고수하고 있는 진료시설 지정제도는 노숙인복지법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 법 12조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국공립병원이나 보건소, 민간의료기관을 노숙인진료시설로 지정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현행법상 의료급여(노숙인 1종) 대상에 포함된 노숙인들은 지정된 의료시설을 이용할 경우 본인부담금이 면제된다. 마땅한 수입이 없는 노숙인들로서는 사실상 지정병원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의료급여 수급권자 중 지정병원을 이용하도록 규정된 건 노숙인뿐이다. 복지부가 정한 의료급여 수급권자는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이재민 △의상자 및 의사자의 유족 △18세 미만 입양아동 △국가유공자 △국가무형문화재보유자 △북한이탈주민 △5·18 민주화 운동 관련자 △노숙인 △결핵·희귀·중증난치질환자 △중증질환자 △행려환자 등이다. 노숙인을 제외한 다른 수급권자는 특정 의료시설을 이용해야 한다는 등의 제약이 없다.
 
이런 탓에 여전히 노숙인만 특정 의료시설에서 진료하도록 하는 복지부 고시는 노숙인도 평등하게 보장받아야 할 건강권을 침해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복지부가 지정병원을 확대해 노숙인들이 진료시설을 이용하는 데에 차별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감염병 경보 ‘주의’ 이상일 경우 1년간 한시적으로 운영한다고 조건을 달아 여전히 차별의 불씨는 남은 상태다. 
 
서울사회복지공익법센터의 김도희 변호사는 “쾌적하게 살 것을 보장하는 건강권은 헌법에서 정한 기본권이므로 복지부 고시는 헌법에 위배된다고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인권위 역시 “다른 의료급여 수급권자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진료시설 지정제도를 노숙인 의료급여 대상자에게만 예외적으로 적용하고 있다”며 이 제도가 보편적 의료서비스 접근권을 침해한다고 꼬집었다.
 
지난 3월10일 서울 중구 서울역광장에서 노숙인 진료시설 지정제도 전면폐지 촉구 결의대회가 진행되고 있다. (사진=뉴시스)
 
김응열 기자 sealjjan11@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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