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대출을 중단하거나 문턱을 높였던 은행들이 최근 감독당국과 간담회 이후 빗장을 열고 있다. 정부가 제시한 가계대출 규제 기준(증가율 5~6%선)에 여전히 근접해있지만, 은행들은 갑자기 얼굴을 바꿔 실수요자 피해 최소화를 위해 대출을 재개한다는 이상한 논리를 편다.
보수적인 은행들이 입장을 바꾼 것은 단순하다. 강도 높은 규제 상황에서 정부의 주문 없이 행동에 나섰다는 건 상상이 어렵다. 정부가 변심한 배경은 알 수 없지만, 당장 정책 변화는 금융소비자들의 숨통이 조금 트일 만한 이유에서 반길만하다. 그러나 오락가락 정책은 장기적으론 득보단 실을 만드는 게 분명하다. 은행들 스스로가 대응력을 갖출 양분을 앗아가서다.
올해 신한은행은 주요 은행들 가운데 유일하게 대출 대란에서 한 발짝 빗겨나 있다. 지난해 12월 규제비율 준수를 위해 기업대출 비중을 늘려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면서 서민금융상품을 제외한 가계신용대출 일시 중단한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진옥동 신한은행장은 사태의 심각성을 뼈저리게 느껴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대책 마련을 주문했다.
농협은행이 8월부터 대출을 중단하면서 시중은행 중 오프라인 지점이 가장 많은 국민은행부터 대출 잔액이 빠르게 차올랐다. 증가율은 7월말 2.58%에서 8월말 3.62%로 불어났다. 허인 국민은행장은 높은 증가세에도 은행을 찾아오는 고객에게 최대한 대출이 가능하도록 방안을 주문했다. 이를 통해 전세대출 갱신 시 증액분에만큼만 대출하는 실수요자 보호 대책이 나왔다.
은행들이 저마다의 묘수를 찾은 것은 이해가 어렵지 않다. 규제 속에서도 이익을 내야 하기에 해법을 만든 셈이다. 이 과정에서 이익을 얻는 것은 당연 소비자다. 예컨대 신한은행을 주거래은행으로 두고 있는 소비자는 상대적으로 대출 중단 리스크에서 벗어나 있다. 국민은행에서 최근 전세대출을 받은 소비자는 정부가 말하는 '상환 여력'에 맞는 대출에 나설 수 있게 돼 건전성을 높일 수 있다.
그래서 정부는 일관된 정책을 펴는 게 중요하다. 특히 숱한 지적을 참아가면서 가계부채에 숨은 '회색 코뿔소'의 심각성을 알린 상태다. 또 풍부한 유동성에 기대 무리한 대출 영업을 한 은행들을 질책하고, 대외적으로 개선의 필요성을 알렸다. 하지만 따끔했던 지적과는 달리 최근 들어 장단을 달리하는 모습은 이해가 어렵다.
은행들은 최근 정부 규제를 핑계 삼아 대출마진을 높였다. 증권가에서도 이들이 대출 규제를 오히려 반긴다는 분석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가계대출 규제에서 피해를 보는 건 소비자밖에 없다는 뜻이다. 때문에 정부는 일관된 정책으로 형평성을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간 은행 창구를 찾았다가 발길을 돌린 소비자를 단순히 타이밍을 못 맞춘, 불운한 사례로 모는 일은 없어야 겠다.
신병남 금융팀 기자 fellsick@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