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1. 신년사의 약속
이재명 정부는 스스로를 ‘국민주권정부’라고 이름 붙였다.
이재명 대통령은 올해 1월 신년사에서 경제성장 전략의 대전환을 강조하며 지방과 청년, 벤처·스타트업에 더 큰 기회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후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같은 메시지를 입버릇처럼 강조했다.
우리는 그 말을 믿었다. 아니, 신주단지처럼 받들었다. 지방에서 출발한 청년 창업가와 혁신 벤처가 기존 질서의 높은 벽을 넘어설 수 있는 시대가 마침내 열릴 것이라 기대했다. 정부가 말하는 혁신과 성장이 단지 연설문 속 수사가 아니라 정책 현장에서 구현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 약속과 너무도 달랐다.
이재명 대통령이 1월2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2026년 신년인사회에서 신년사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장면 2. 잊혀지는 약속
"또 하루 멀어져간다.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 (중략)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 조금씩 잊혀져 간다."
고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한 구절이 입가에 맴돈다. 정부가 약속한 지방과 청년, 벤처·스타트업의 이름도 그렇게 조금씩 잊혀 가는 것은 아닌가.
떠난 것은 혁신기업이 아니다. 약속에서 먼저 멀어진 쪽은 정책이었다. 대통령의 말은 여전히 귓가에 남아 있는데, 정작 관료의 문턱을 넘는 순간 그 약속은 힘을 잃었다.
루센트블록이 운영하는 부동산 조각투자 플랫폼 '소유'(왼쪽)와 비대면진료 플랫폼 닥터나우 로고. (사진=각사)
장면 3. 루센트블록에 재도전의 기회를
조각투자 분야 기업인 루센트블록은 2018년 창업한 뒤 8년을 버텼고, 2021년 금융위원회 혁신금융서비스로 지정된 이후 조각투자 시장을 개척해왔다. 그러나 금융당국은 올해 신년사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장외거래소 예비인가 심사 탈락이라는 사실상의 사형선고를 내렸다.
창업자는 36세 청년이고, 회사는 대전에 뿌리를 둔 혁신 벤처이자 샌드박스 기업이다. 대통령이 강조한 청년·지방·벤처·스타트업이라는 조건을 모두 갖췄다. 더욱이 샌드박스 기간 동안 시장을 개척하고 제도의 가능성을 입증했으며, 누적 투자유치액만 350억원에 이른다.
그런 기업의 운명이 관료들의 펜 끝에서 한순간에 결정됐다. 대통령이 관계 부처 관료들을 불러 비공개 회의까지 열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정책적·정무적 판단은 이미 내려졌다고 여겼는데, 관료 조직의 '자기 식구 챙기기'라는 오래된 의심만 다시 살아났다.
물론 관료들은 언제나 정교한 논리를 내놓는다. 절차를 말하고, 안정성을 말하며, 제도의 일관성을 말한다. 하나하나 떼어놓고 보면 틀린 말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그 논리가 매번 혁신기업의 퇴출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된다면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의 국정 철학을 관료가 집행하는 것인가. 아니면 관료의 논리에 대통령의 국정 철학이 종속되는 것인가.
장면 4. '닥터나우 방지법'에는 대통령 거부권을
비대면 진료 플랫폼의 의약품 도매업 진출을 막는 이른바 '닥터나우 방지법'도 마찬가지다.
기존 산업의 이해를 보호하기 위해 신산업의 싹부터 자르는 것이 과연 국민을 위한 입법인가. 아니면 특정 이익집단의 요구에 국회가 포획된 결과인가.
비대면 진료와 의약품 유통을 둘러싼 안전성과 공공성 문제는 엄격하게 따져야 한다. 그러나 위험을 관리하는 것과 혁신 자체를 봉쇄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문제가 있다면 투명한 기준과 사후 감독을 강화해야지, 시장 진입 자체를 금지하는 방식으로 답해서는 안 된다.
관련 이해집단의 요구를 앞세워 신산업의 가능성을 외면한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와 민주당 의원들의 각성을 촉구한다. 그들이 공익과 보호라는 이름으로 휘두르는 규제의 칼날은 결국 스타트업의 목을 겨누고 있다. 그 칼날이 잘라내는 것은 기업 하나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미래일 수 있다.
국회가 스스로 바로잡지 못한다면 대통령이 나서야 한다. '닥터나우 방지법'에 재의요구권을 행사해야 한다. 그것이 지방과 청년, 벤처·스타트업을 키우겠다고 약속한 대통령의 말에 책임지는 길이다.
장면 5. 대중은 이미 알고 있다
인공지능(AI) 시대, 초연결된 대중은 더 이상 정보에서 소외된 수동적 존재가 아니다. 누가 어떤 이해관계를 대변하는지, 어떤 명분 뒤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 대중은 빠르게 파악한다. 이제는 모르는 것이 없다고 봐야 한다.
정치의 기본은 '대중의 요구에 기초해 실정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중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외면한다면 실정(實情)은 순식간에 실정(失政)이 된다.
지금 대중이 요구하는 것은 분명하다.
루센트블록에는 재도전의 기회를 줘야 한다. '닥터나우 방지법'에는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해야 한다. 이것이 대중의 요구에 부응하고 현실에 맞게 행동하는 길이다.
이 외침이 한낱 넋두리로 남을지, 혁신을 다시 일으키는 출정가가 될지는 정부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달렸다.
정재호 뉴스토마토 고문·K-정책금융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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