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칼럼)'덕망·도리' 가훈 잊은 허영인 SPC그룹 회장
2026-08-03 06:00:00 2026-08-03 06:00:00
양천 허씨의 시조는 허선문입니다. 그는 왕건이 궁예, 견훤 등과 후삼국 통일을 놓고 자웅을 겨룰 때 왕건을 도운 인물입니다. 특히 왕건이 전투에서 지고 군량미도 떨어져 사경을 헤맬 땐, 재산을 모두 털어 보급을 지원하고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웠다고 전해집니다. 왕건은 고려를 세운 뒤 '백성과 군사의 배를 채워 나라를 구한 공이 크다'고 해 허선문을 수양아버지로 삼았고, 공암현(지금의 서울 강서구 일대) 땅도 하사했을 정도입니다. 이후 그의 후손들은 오늘날의 양천 허씨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조선 초 영의정을 지낸 허종은 양천 허씨 13세손입니다. 그는 문신으로서 국정을 안정적으로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북방 여진족을 물리치는 등 문무 양면에서 큰 공을 세웠습니다. 흥미로운 일화도 전해집니다. 젊은 시절 친구들과 절에서 공부하던 중 하루는 도둑이 들어 옷과 신발을 모두 빼앗겼다고 합니다. 하지만 허종은 놀라거나 분노하는 기색 없이 "옷을 가져갔으면 신발은 두고 갈 일이지, 옷과 신발을 모두 훔치는 건 의리에 어긋난다"고 했습니다. 도둑에게조차 의리를 되물으며 '최소한의 도리'를 강조한 셈입니다. 
 
고 허창성 회장은 34세손입니다. 광복 직후인 1945년 10월, 고향인 황해도 옹진에 '상미당'이라는 작은 빵집을 연 것이 오늘날 SPC그룹의 시작이었습니다. 허창성 회장은 "우리 사회를 보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만들겠다"는 경영 자세를 지켰고, 회사를 국내 최대 식품 재벌로 키워내는 초석을 다졌습니다.
 
그러나 허창성 회장의 뒤를 이은 허영인 회장의 행적을 보면 가문 대대로 내려온 덕망과 도리, 부친이 강조했던 경영자의 자세가 무색해집니다.
 
허 회장은 파리바게뜨 노조를 조직적으로 탄압하고 와해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으며, 2년째 피고인석에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허 회장의 노조 파괴 혐의 재판은 7월22일로 공판 97회차를 맞았고, 100회를 눈앞에 뒀습니다. 공판이 100회를 넘는 사례는 대형 경제 사건이나 거물 정치인이 연루된 특수 사건처럼 증인신문과 증거조사가 방대하게 이뤄지는 경우에나 볼 수 있습니다. 단일 기업에서 벌어진 노조 탄압 재판이 이토록 길어지고 있다는 건 허 회장의 혐의가 간단치 않다는 방증입니다.
 
실제로 SPL 등 계열사에선 지금도 노조 탄압과 보복성 인사 조치가 버젓이 일어나는 중입니다. 허종은 도둑에게도 최소한의 도리를 말했건만, 허 회장은 헌법이 보장한 노동자의 기본권마저 훼손하는 셈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반복되는 산업재해입니다. <뉴스토마토> 취재에 따르면, 2022년부터 올해 6월까지 SPC그룹 주요 계열사인 삼립과 SPL에서 일어난 사고 산재는 총 82건(승인 기준)으로 집계됐습니다. 기간별로 따지면, △2022년 25건 △2023년 22건 △2024년 10건 △2025년 11건 △2026년 6월 기준 14건 등입니다.  
 
SPC삼립에선 지난 4월10일 새벽 경기도 시흥시 공장에서 햄버거빵 생산 라인 컨베이어 센서 교체 작업을 하던 노동자 2명의 손가락이 절단되는 사고가 일어난 바 있습니다. SPL에선 지난 2022년 경기도 평택공장 내 소스 배합기에 20대 노동자가 끼어 사망하는 사고가 벌어졌습니다. 회사는 사고를 막겠다며 대규모 안전 투자까지 약속했지만, 현장의 노동자들은 실질적 변화가 충분히 체감되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가문의 시조인 허선문은 굶주린 백성과 군사를 살리기 위해 재산을 내놓고 '선한 부'를 행사했습니다. 하지만 허 회장의 SPC그룹의 '죽음의 빵' 공장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습니다. 아무리 돈이 중요해진 시대고, 재벌가라지만 선조의 얼굴에 먹칠하는 꼴입니다.

최병호 뉴스토마토 공동체부장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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