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채원 서울대 국가리더십연구센터 선임연구위원
20대 총선에서 사라져 가던 정책선거에 불을 지핀 사람은 역설적이게도 강봉균 새누리당 선거대책위원장이다. 그가 '양적 완화' 논쟁을 불러오기 전까지 정책선거라고 할 만한 소재가 딱히 없었다. 각 정당은 숱한 일자리 공약을 쏟아냈지만, 신뢰감은 0%에 가깝다. 유권자들은 공공정책을 통한 일자리는 정당이나 국회가 아니라 행정부가 만드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일자리 공약은 대통령 선거에서나 관심을 받는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정당은 정책 이슈를 개발하여 아젠다를 설정해야 유권자들의 관심을 받는다. 각 아젠다는 총선 이후 입법을 통해 민생에 실질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신뢰를 형성해야 비로소 '정책선거'의 단계로 진입한다. 특히 선거 이슈가 되기 위해서는 한 정당이 제기한 공약이 다른 당의 반대에 의해 논란을 불러오거나 유권자들의 관심을 불러와야 한다. 예컨대 더불어민주당이 국회를 세종시로 이전하겠다는 공약이 나오자 새누리당이 곧바로 이에 대해 반대를 하고 분원을 설치할 수 있다는 역제안을 내놨다. 이때부터 선거 아젠다가 설정되는 단계로 접어든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이 이 공약을 철회함으로써 아젠다 설정은 실패했다.
그런 면에서 새누리당의 '양적 완화'는 분명히 선거 쟁점으로 점화됐다. 이에 대해 더민주는 관치금융이라고 즉각 반발했다. 찬반 논란과 함께 본격적으로 선거 아젠다 설정의 단계로 진입했다. 새누리당에 의해 촉발된 이 아젠다는 총선을 넘어서 내년 대통령 선거까지 핵심적인 정책 쟁점으로 진화할 것으로 보인다. 3%가 안 되는 경제성장률을 감안하면 집권당이 꺼낼 수 있는 정책 카드는 사실상 이것 밖에 없다. 기존의 팽창적인 금융정책과 재정정책의 정책수단들이 시장에서 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집권당이 쓸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을 아껴두고 있을 리가 만무하다.
'양적 완화'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과 일본에서 경기부양을 위해 대대적으로 실시한 정책 수단이다. 미국의 경우 2009년 2월 오바마 정부는 침체된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고용을 확대하기 위해 경제부흥법(American Recovery and Reinvestment Act of 2009)을 제정, 천문학적인 자금을 투입했다. 중장기적으로 성장잠재력을 강화시킬 수 있는 분야를 선정해 연방정부의 지원으로 경제위기를 극복하겠다는 법률이다. 미국은 2009년에서 2019년까지 총 7890억달러의 연방정부 재정을 투입할 계획을 세웠다. 지원분야는 에너지, 과학기술, 경제구조 개혁, 인프라 정비, 교육환경 개선, 취약계층 지원, 필수 서비스 보장 등을 담았다. 미국은 이를 시작으로 양적 완화에 대한 수단을 몇 차례에 걸쳐 대규모로 실시했다.
일본도 2010년 20여년에 걸친 장기불황과 세계적인 경제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신성장 전략'을 발표했다. 이를 통해 2020년까지 GDP 성장률을 연평균 명목 3%, 실질 2% 이상으로 한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2011년 9월에는 동일본대지진 피해 복구와 경제위기 돌파를 위해 이 전략을 강화한 일본재생전략(Strategy for Rebirth of Japan)을 내놨다. 2012년 일본 정부 예산은 전체 99조엔으로 역대 최대 수준으로 뛰었다. 2011년 12월 일본 '국가전략위원회'가 마련한 일본재생전략 제안에는 지진과 원자력발전소 재앙의 극복, 경제성장과 재정 건전성 확보, 신성장 전략의 강화와 재편성 등이 포함돼 있다. 이렇게 시작된 일본의 양적 완화정책은 아베 정권에 이르러서 그 정점에 이르고 있다.
양적 완화 정책이 한국에서 그간 수면 아래에 있었던 이유는 통화정책을 담당하는 한국은행과 기획재정부의 부정적 인식과 태도 때문이었다. 정책이 가져올 부작용을 우려한 관료적 합리성으로 정책 시행을 막아왔다. 그러나 보수정권이 들어선 이후 한국 정치에서 관료적 합리성은 정치권의 외풍에 대부분 굴복해 왔다. 양적 완화 정책도 예외가 아닐 것으로 보인다.
새누리당이 꺼내든 양적 완화 정책은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처럼 통제 불능의 상황으로 빠져들 가능성이 높다. 4월 총선이 끝나고 20대 국회가 6월에 개원하자 마자 각 정당은 내년 12월에 있을 대통령 선거 준비에 본격적으로 돌입하게 된다. 저성장 시대에 선거 공약으로 다양한 경기부양책들이 고려될 것이고, 양적 완화는 이번 총선 공론화를 계기로 그 구체적인 정책들이 우후죽순처럼 제기될 것이다. 이미 미국과 일본에서 대대적으로 시행된 정책이기 때문에 국민적인 설득도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논쟁들이 있겠지만 대세를 거스를 수 있는 정치인은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지금부터라도 진지한 정책적 논쟁이 필요하다. 막연한 정권심판론이나 야권 분열의 식상한 선거이슈를 넘어서 앞으로 10년을 내다보고 치열하게 경제정책의 방향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어야 할 시점이다. 총선이 이제 10여일 앞으로 다가왔다. 유권자들은 제대로 된 정책 논쟁을 보고 싶어 한다. 양적 완화 정책은 이번 총선에서 정책선거로 가는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다.
임채원 서울대 국가리더십연구센터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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