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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희재

뿌리부터 흔들린 'EU'…영국은 왜 43년만에 '브랙시트'를 택했나

2016-06-26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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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토마토 어희재기자] 영국의 국민투표와 함께 결정된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로 유럽 통합 모델에 대한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 과거 ‘대륙 문제의 조정국’을 유지했던 영국은 유럽 공동체가 처음 발족된 순간부터 발을 담그지 않았지만 유럽 공동체의 결속력이 강화되면서 영국도 이에 합류해 인연을 이어왔다. 하지만 이후에도 독립국가로서의 정체성이 강했던 영국은 ‘반쪽 회원국’인 동시에 ‘반쪽 지위’를 갖고 현실과 이상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걸어왔다. 그리고 43년 만에 유럽 공동체 탈퇴를 결심했다. 영국은 유럽 공동체를 나가기로 한 첫 국가인 것이다. 전문가들은 유럽연합의 회의론 확산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유럽을 떠나는 두 번째 국가는 과연 누구일까. 유럽 공동체의 결성부터 브렉시트까지 그 과정을 들여다봤다. 
 
 
1952년 ECSC 출범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국가들은 전쟁을 견제하고 평화 유지의 목적으로 유럽 통합 목표에 의견을 모았다. 1950년 프랑스 외무장관 폴 슈망이 관세 철폐 내용의 ‘슈망플랜’을 제안하면서 프랑스를 주축으로 이탈리아, 벨기에, 독일, 벨기에, 룩셈부르크가 유럽 통합 목적에 동조했다. 이에 따라 1952년 8월 유럽에 석탄과 철강 단일 시장을 형성하는 목적 아래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가 출범했다. 유럽연합(EU)의 시초 모델이다. 
 
 
 
1973년 영국 EEC 가입
 
1967년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와 유럽원자력공동체(EAEC)는 유럽경제공동체(EEC)로 통합됐다. 통합된 유럽경제공동체의 결속력은 더욱 강해졌다. 이전까지 프랑스와 영국·덴마크로 양분됐던 유럽 내 관계가 협조적으로 변화했다. 유럽 공동체에 가입을 거부했던 영국도 EU 결속력 확대에 따라 합류를 결정하게 됐다. 1973년 EEC(EU의 전신)에 가입하면서 영국은 유럽 통합에 첫발을 디디게 된 것이다.
 
 
 
1975년 영국 국민투표
 
하지만 EEC에 가입한 이후에도 당시 집권층이었던 영국 노동당 내부에서는 분열이 지속됐고 이들은 유럽의 자유시장 정책이 영국의 성장을 저해한다고 말했다. 결국 1974년 국민투표를 시행하기로 결정했다. 1975년 6월 시행된 국민투표 결과 잔류가 67.2%, 탈퇴가 32.7%를 기록해 압도적으로 잔류가 결정됐다. 당시 보수당이었던 에드워드 히스 영국 총리는 투표 결과는 곧 ‘국민의 결정’이라며 환영했다. 
 
 
 
1980년 마가렛 대처 총리 ‘유럽 통합 모델 반대’
 
이후에도 유럽 공동체 속 영국의 정체성은 꾸준히 문제시됐다. 1979년 총리로 당선된 마가렛 대처 전 총리는 총리로 선출 이전부터 유럽 예산에 대한 영국의 기여분에 대한 환불을 요구하는 등 유럽 공동체에 대해 반대해왔다. 특히 마가렛 대처 총리는 EEC 이상으로 유럽 공동체가 성장하면 영국의 목표를 위태롭게 한다고 우려했다. 이때부터 유럽 공동체에서 분담하고 있는 분담금 대비 영국 수혜가 적다는 목소리가 제기됐다.
 
 
1987년 단일 유럽법 서명
 
1987년 유럽 국가들은 단일 유럽법에 서명했다. 상품과 사람, 서비스, 자본 등에 있어서 자유로운 이동이 보장되는 국경 없는 유럽에 대한 협력이었다. 이로 인해 유럽 내부 시장의 결속력은 더욱 강화됐다. 1991년에는 유럽 각국이 마스트리흐트 조약에 서명해 ‘유로화’라는 단일 유럽 통화를 만들었다. 당시 영국은 존 메이저 보수당 총리에 의해 ‘옵트 아웃’ 조항을 얻게 돼 파운드화 사용을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2008년 금융위기 발발
 
1993년 지금의 유럽연합(EU)이 형성됐으며 유로화 사용으로 EU의 경제적 번영은 본격화됐다. 그러나 2008년 남유럽 국가 부채문제로 발발된 금융위기로 영국 등 강대국들의 부담은 커져갔다. 성장만큼이나 위기 역시 감수해야 함을 느끼게 되면서 EU 회의론이 제기됐다. 특히 영국은 독일과 맞먹는 분담금을 지불하면서도, 비유로존 국가라는 이유로 EU 내 반쪽 회원국이자 EU 내 반쪽 지위를 갖게 되면서 EU 탈퇴 목소리는 커졌다.
  
 
2015년 보수당 승리로 국민투표 사실상 확정
 
금융위기 이후 실업률이 높아진 영국은 유럽 이민자들이 일자리를 빼앗아 간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난민 사태로 이민자 문제와 테러 위기까지 논의되자 영국 국민은 브렉시트 국민투표 시행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정치권에서는 분열이 심화됐고 이를 잠재우기 위해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지난해 총선 당시 국민투표를 공약으로 내세워 보수당의 승리를 이뤄냈다. 보수당의 승리로 국민투표는 기정사실화됐다. 
 
2016년 두 번째 국민투표
 
2016년 6월23일, 국민투표가 시행됐다. ‘탈퇴’ 진영의 적극적인 캠페인으로 지난해까지만 해도 잔류층이 60%를 웃돌았으나 투표 직전 여론조사는 박빙이었다. 투표 결과 탈퇴는 51.9%, 잔류는 48.1%로 탈퇴가 확정됐다. 이날 개표 결과가 전해지면서 글로벌 금융시장은 혼란에 빠졌다. 유럽 범스톡스지수는 8.62% 급락했다. 유럽과 아시아, 미국 시장까지 하락하면서 이날 하루 동안 세계증시 시가총액은 2440조원이 증발했다.
  
 
WHO’S NEXT?
 
영국의 브렉시트가 현실화되면서 유럽 경제통합 모델의 근간이 송두리째 흔들릴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전문가들은 영국이 EU 탈퇴의 시작에 불과할 수 있다며 극우세력과 포퓰리스트들을 중심으로 EU 국가들의 탈퇴 움직임이 본격화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브렉시트에 힘입은 EU 내 극우세력들은 세계 경기 둔화에 원인을 세계화로 꼬집고 있다. 아울러 이들은 지난해 유럽에서 발발한 끔찍한 테러의 원인을 유럽의 ‘무제한 난민 수용’ 정책으로 지적했으며 실제로 극우 세력뿐만 아니라 많은 유럽인이 이민자 문제에 대한 문제점을 우려하는 것이 사실이다.
EU 전문가들은 우선 브렉시트를 시작으로 덴마크(덴시트)와 체코(첵시트), 핀란드(픽시트) 등을 추가 탈퇴 가능 국가로 꼽고 있다. 프랑스와 슬로바키아, 네덜란드에서도 국민투표의 필요성이 언급되고 있다. 영국의 투표 결과 직후 주말 새 각 유럽의 극우 정당들은 자국의 국민투표가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따라 전문가들은 지도자들의 행보가 EU 결속력을 좌우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전문가들은 유럽 지도자들이 위기를 파악하고 문제를 수정해나가지 않는다면 EU 공동체 회의론이 가속화될 수밖에 없다고 전망했다. 
 
어희재 기자 eyes417@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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