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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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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범종입니다.
섭종하면 '게임 끝'

2024-01-16 17:43

조회수 :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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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내고 정 준 게임을 못 하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바로 '섭종(서버 운영 종료)'입니다. 엔씨소프트가 최근 청산을 결정한 자회사 엔트리브소프트의 MMORPG '트릭스터M' 서비스가 오는 3월13일 0시에 끝납니다. 그간 이 게임 아이템 구매에 얼마를 썼든, 캐릭터에 담은 애정이 얼마나 깊든 상관 없습니다. 이 게임 자체가 세상에서 없어지는 겁니다.
 
저는 지난주 이 게임을 아이패드(iPad)에 설치해 실행해봤습니다. 귀여운 캐릭터들이 저를 반갑게 맞이하며 트릭스터의 세계로 안내했는데요. 서비스 초기부터 이 게임을 즐겨온 사람들이 여기서 쌓았을 정과 추억을 감히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기대와 우려 속에 서비스를 시작한 게임도 있습니다. 라인게임즈 산하 미어캣스튜디오가 만든 '창세기전 모바일: 아수라 프로젝트'입니다. 같은 모회사를 둔 레그스튜디오 내 패키지 판 '창세기전: 회색의 잔영' 개발팀 해체 후 창세기전의 명맥을 모바일 판이 잇게 됐습니다.
 
팬들의 기대와 다른 모습을 보여준 패키지 판과 달리 모바일 판은 괜찮다는 평가가 나왔지만, 이 역시 씁쓸하긴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전 팬들이 기다린 건, 세월이 흘러도 언제든 할 수 있는 패키지 판이었으니까요.
 
소니 플레이스테이션 비타(PS VITA) 2세대 제품 상자와 PS 비타용 패키지 게임들. (사진=이범종 기자)
 
저는 요즘 플레이스테이션 비타(PS VITA)로 '총성과 다이아몬드'라는 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경찰과 계약한 프리랜서 교섭인 오니즈카 요이치가, 인질극을 벌이는 범인과의 교섭에 성공하는 게 목표입니다.
 
이 게임의 그래픽 품질은 낮습니다. 이전 세대 게임기인 플레이스테이션 포터블(PSP)용 게임을 후속기기인 비타에서 즐길 수 있게 호환성만 확보했으니까요.
 
하지만 주인공 오니즈카가 범인과 전화로 교섭할 때 어떤 선택을 해야할지 실시간으로 정하는 데서 오는 박진감이 요즘 나온 대작에 밀리지 않습니다. 이 게임은 지금도 PS 비타의 플레이스테션 스토어에 접속해 구매·내려받기 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PS 비타는 2019년 3월에 단종됐습니다. 그럼에도 이 기기를 가진 사람 누구나 실물 게임 카드를 꽂아넣거나 내려받기 형식으로 패키지 게임을 즐길 수 있습니다.
 
이처럼 '언제든 구입하거나 꺼내 즐길 수 있는 명작'은 패키지 게임의 존속과 팬들의 지지를 끌어내는 근원적인 매력입니다. 이번 회색의 잔영 개발팀 해체는, 창세기전의 추억을 웃으며 꺼내 볼 수 있는 기회를 없앤 셈이라 안타깝습니다. 걸핏하면 끊기는 화면에 밋밋한 연출, 불편한 조작감과 낮은 가독성을 고쳐줄 패치가 요원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서사의 재미와 무관하게 반드시 고쳐야 할 점입니다.
 
최근 제가 쓴 기사 아쉬운 마침표, 콘솔판 '창세기전'이 남긴 과제에 대한 팬들의 반응을 전해들었습니다. 이 글이 공유된 카카오톡 단체 대화방에선 '기사 내용에 반박할 수 없다는 점이 화를 돋운다'는 취지로 한숨섞인 대화가 오갔다고 합니다. 팬들 사이에선 1996년 원작 출시 당시 창세기전이 '당대의 첨단'을 보여준 반면, 이번 회색의 잔영은 '당대의 퇴보'를 보여줬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패키지 게임의 존재 의의는 10년 뒤에 꺼내도 그 시절로 돌아가 즐길 수 있는 콘텐츠라는 점입니다. 저는 지금 회색의 잔영을 이야기 중심으로 즐기고 있지만, 다음 두 가지 질문에 "그렇다"고 답할 수 있을지 망설여집니다. '시대에 역행한 품질로 평가 받은 게임을 10년 뒤에 다시 하고 싶은지', '출시 첫날 전체 그래픽과 조작법을 수정한 '데이 원 패치'가 있어야 제대로 할 수 있는 게임의 실물 패키지에 소장 가치가 있는지'입니다. 슬프게도 '회색의 잔영이 창세기전의 마지막 패키지 판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면 구매 가능성이 열려있습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데이 원 패치가 온라인으로 제공된다는 점입니다. 한 번 발매된 게임 카드는 존속하지만, 온라인 서비스는 영속을 장담하기 힘듭니다. 우리는 언젠가 원본 게임 카드만으로 회색의 잔영을 즐겨야 할 겁니다. 그 때 회색의 잔영의 체감 품질은 지금보다 낮을 거라는 우려가, 패키지 판 창세기전 소장 가치를 낮출 거란 사실은 자명합니다.
 
이 때문에 완성본 디스크를 공장에 넘기는 '골드행'을 마친 뒤에야 데모 판을 공개한 개발사의 행보가 두고두고 뼈아픈 패착으로 기억될 겁니다. 개발사는 데모 판 공개 후 수렴한 의견을 완성본에 반영하는 순서를 지켰어야 합니다.
 
섭종은 온라인 게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패키지 게임은 언제든 꺼내 할 수 있지만, 애정이 섭종하면 생명을 잃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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