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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지은

보험협회장 신년사 후기

2024-01-02 08:22

조회수 :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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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는 누가 키우나, 소는!"
 
한 때 많은 사람을 웃게 했던 코미디 프로그램 '개그콘서트 두분토론'의 유행어죠. 개그맨 박영진씨가 맡은 고지식한 사고를 가진 캐릭터가, 여성 입장에서 호소하는 출연진에게 '그럼 집안일은 누가 하느냐'고 타박하는 의미로 사용한 말이었습니다. 나중에는 이 말 자체가 유행어가 돼 많은 이들이 인용했습니다. 이후 꼭 들어맞는 상황은 아니더라도, 주어가 없는 선언을 보면 이 말이 떠오르곤 합니다.
 
갑진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금융기관장, 유관 단체장들도 새해를 맞아 신년사를 내놨습니다. 저는 이병래 손해보험협회장의 신년사에 특히 눈이 갔습니다.
 
신년사는 크게 인삿말, 지난해 실적, 사업추진 과제, 맺음말 4단계로 구성됐습니다. 인사말에서는 보통 현 상황에 대한 인식과 각오의 말들이 나오는 대목인데요. 각오를 다지는 부분에서 "우리 앞에 놓인 불확실성과 위기를 넘어 손해보험산업이 지속적으로 성장해 나가기 위해서는 장기적인 시각으로 본질에 집중해야 합니다."라는 말이 시작됐습니다. 집중해야 하는 것은 누구인가? 잠시 고민했지만 스스로와 업계 전체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라 이해하고 넘어갔습니다.
 
특히 신년사에서 주목하는 것은 사업추진 과제입니다. 올해 해당 단체가 새롭게 뭘 하는지 엿볼 수 있는 부분이죠. 손해보험협회도 야심찬 계획을 잔뜩 준비했습니다. 크게 요약하면 신시장 개척, 보험 지속가능성 제고, 소비자 신뢰도 제고, 상생금융 상품 개발 4가지에 주력하겠다는 입장입니다.
 
근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의문이 듭니다. 어미라고 하죠. 문장 서술어의 마지막을 온통 '하겠다'가 아닌 '하자', '합시다'라고 맺는 것이 보였습니다. 가령 "갈수록 조직화되고 있는 보험사기의 근절을 위해 보험사기방지특별법 개정도 조속히 마무리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합시다.", "공공·의료 등 다양한 분야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손해보험산업과의 타 산업을 유기적으로 연계하여, 모빌리티·헬스케어 등 신사업의 추진 기반을 마련합시다." 등입니다.
 
협회장이나 협회의 의지를 드러내는 표현인 '-겠-'이 쓰인 곳은 이번 신년사를 통틀어 딱 한 군데였는데요. 그마저도 인삿말에 "올 한 해, '교자채신(敎子採薪)'의 자세로 손해보험산업의 미래를 준비해 나가야 하겠습니다"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하겠습니다'의 '겠'이니 의지 보다는 방향성 제시에 가깝게 느껴지고요.
 
모든 표현이 이런 식이다보니 신년사를 정리하는 내내 머리가 복잡했습니다. 협회장이나 협회가 무엇을 하겠다는 내용을 신년사 기사 핵심으로 두는데, 사업계획에 대해 '업계에 주문했다'고 해야 하나? 새해 이 야심찬 계획을 누구더러 실행하라고 하는 것인가? 협회는 하는 일이 없는 것인가?
 
손해보험협회는 생명보험협회에 비해 회원사인 보험사들로부터 인기가 높았습니다. 손해보험사도 좋아하고, 생명보험사들은 부러워하는 협회였죠. 업권의 이익을 충실히 대변하고 업계가 갖고 있는 고충을 앞장서 해결하려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금융당국의 상생금융 압박이 있을 때 손해보험사를 모두 불러 공동 대응을 할 수 있도록 한 것도 손해보험협회였고, 보험업계 숙원이었던 실손의료보험 청구 간소화법이 통과되기까지 금융당국, 국회를 찾아 다닌 것도 손해보험협회였습니다.
 
그러나 이번 신년사를 보면 손해보험협회의 태도가 달라지진 않을까 걱정스럽기까지 합니다. 단호하게 내가 하겠다, 무엇을 약속하겠다는 포부가 사라진 신년사. 심지어 현 회장이 취임한 뒤 처음 내놓은 신년사입니다. 취임사보다는 상세히 업무계획을 세웠으니 업계에서 받아들이는 제대로된 메시지는 처음인 셈입니다. 그런 신년사라면 분명 단어 하나, 토씨하나까지 신경썼겠지요.
 
 
손해보험협회장 신년사 원문 일부. (자료=손해보험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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