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기자
닫기
이범종

smile@etomato.com

안녕하세요, 이범종입니다.
(뉴게임+)'창세기전' 감동 서사, 눈 아파 못 읽겠네

초반 이후 이야기·연출에 탄력 붙지만

2024-01-02 06:00

조회수 : 8,233

크게 작게
URL 프린트 페이스북
[뉴스토마토 이범종 기자] 눈보라 치는 기간테스 산맥. 망국의 왕녀와 성기사단이 조국 팬드래건 독립을 위한 전투를 마치고 망명국 다갈로 향하고 있습니다. 왕녀 이올린 팬드래건은 5년 전 전쟁에서 아버지와 오빠들을 죽이고 나라를 뺏은 게이시르 제국과 흑태자에게 복수할 날만을 기다립니다. 한편으론 과거의 기억을 잃고 성기사단을 돕는 레인저 'G.S'가 자꾸만 눈에 밟히는데요. 안타리아 대륙을 뒤흔든 전란 속 슬픈 인연이 27년 만에 '창세기전: 회색의 잔영'으로 재현됩니다.
 
이올린 팬드래건이 성기사단과 함께 조국의 독립을 맹세하고 있다. (사진=창세기전: 회색의 잔영 실행 화면)
 
회색의 잔영은 1995~1996년 소프트맥스가 출시한 SRPG(전략 롤 플레잉 게임) '창세기전 1·2'를 합쳐, 지난해 12월22일 닌텐도 스위치 판으로 출시된 리메이크작입니다. 레그스튜디오가 개발하고 라인게임즈가 배급합니다. 분량은 원작의 세부 내용을 다듬어 총 42장, 80시간에 달합니다.
 
원작 창세기전은 1990년대 중반 손노리의 '어스토니시아 스토리'와 함께 한국 RPG의 역사를 쓴 작품으로 평가됩니다. 주연들의 화려한 초필살기로 수많은 적을 말살하는 쾌감은 물론, 눈시울을 붉히는 결말로 지금까지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약 30년 만에 돌아온 회색의 잔영은 아쉬운 점이 많았습니다. 우선 닌텐도 스위치 판인데 '닌텐도 스위치 라이트'의 5.5인치 화면으로 즐기기엔 글씨가 너무 작습니다. 성우들이 모든 대본을 연기했지만, 인물과 지명, '안타리아의 서'에 적힌 각종 인물·세계관 설명을 읽으려면 일일이 홈 버튼을 두 번 눌러 화면을 확대해야 합니다.
 
닌텐도 스위치 라이트(사진 아래)로 '창세기전: 회색의 잔영'을 실행하면 글씨가 너무 작아 읽기 힘들다. 최상위 기기인 '닌텐도 스위치 OLED(사진 위)'로 게임을 실행해야 글씨가 제대로 보인다. (사진=이범종 기자)
 
최고급형 닌텐도로 하면 상황이 달라질까요. 연말 41만5000원에 구입한 '닌텐도 스위치 OLED'로 회색의 잔영을 실행하니, 이제야 글씨가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스위치 OLED 화면은 7인치입니다. 하지만 작중 설정을 설명하는 안타리아의 서 화면 글씨는 여전히 작았죠.
 
SRPG 장르는 원래 스위치 라이트에서 하기 어려운 걸까요? 아닙니다. 같은 장르 게임인 '파이어 엠블렘 풍화설월'은 글씨가 훨씬 커서 스위치 라이트로도 읽기 쉽습니다. 화면이 5인치인 '플레이스테이션 비타(VITA)'로 같은 장르의 또 다른 게임인 '슈퍼로봇대전 V'를 켜 보니, 7인치 OLED 화면으로 본 회색의 잔영보다 대사가 잘 읽힙니다.
 
스위치 라이트 사용자도 회색의 잔영을 즐기려면 똑같이 6만4800원을 내야 합니다. 그런데 개발사는 닌텐도 스위치 일반 판이나 OLED 판을 TV에 연결해 큰 화면으로 즐기는 데만 초점을 맞췄습니다. 사실 그 부분도 문제입니다. 2024년 대작 게임이라고 하기엔 다소 부족한 화질의 그래픽을 큰 TV 화면으로 보게 되니까요.
 
화면이 5인치인 '플레이스테이션 비타(사진 위)'로 '슈퍼로봇대전 V'를 켜 보니, 7인치 닌텐도 스위치 OLED(사진 아래) 화면으로 본 회색의 잔영보다 대사가 잘 읽힌다. (사진=이범종 기자)
 
이 게임 개발 도구는 언리얼 엔진 4인데요. 네오위즈 'P의 거짓'이 같은 엔진으로 만들어졌다는 걸 생각하면 그래픽 품질 차이가 더욱 커 보입니다. 개발사가 주인공 이올린 등 캐릭터의 특징을 잘 표현했지만, 수십 년 만의 리메이크라는 점을 감안할 때 시각적 수준에 대한 기대에는 다소 못 미쳤다는 뜻입니다.
 
혹시 엔진이 아니라 플랫폼 차이에 기인해 발생한 문제라고 봐야할까요? 실제로 P의 거짓은 플레이스테이션(PS)5와 엑스박스 시리즈 X, PC와 맥(Mac) 등 하드웨어 성능이 높은 플랫폼으로 개발됐습니다. 반면 회색의 잔영이 타깃으로 삼은 닌텐도 스위치는 2017년 출시된 플랫폼으로, 현세대 스마트폰의 절반 정도 성능으로 평가받습니다. 한두 해 사이에 2세대가 나올 것이라는 소문이 종종 나오기도 하죠.
 
그러나 플랫폼 차이라고 하기엔 이미 닌텐도 스위치 용으로 '젤다의 전설'이나 '파이어 엠블렘' 같은 고품질 애니메이션풍 게임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죠. 때문에 일각에선 개발사 역량 문제라는 의견도 나옵니다.
 
닌텐도 스위치 라이트(사진 아래)에서 실행한 '파이어 엠블렘 풍화설월' 글씨가 닌텐도 스위치 OLED(사진 위)에서 실행한 '창세기전: 회색의 잔영'보다 크다. (사진=이범종 기자)
 
결과적으로 회색의 잔영은 애매한 게임이 됐습니다. 휴대용으로 하려니 글씨가 너무 작고, TV로 하려니 타사 대작 게임과 비교됩니다. 게다가 TV 화면으로 봐도 안타리아의 서 글씨가 여전히 작습니다.
 
시점 문제도 있습니다. 회색의 잔영은 사물을 위에서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쿼터뷰 시점을 택했는데요. 주변을 살피기 좋아서 많은 RPG 게임이 이 방식을 씁니다. 그런데 회색의 잔영에선 외려 사물이 눈 앞을 가리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합니다.
 
일례로 주인공 이올린 일행은 3막 '북극광'에서 은자들의 계곡을 통과할 때 레인저 레이몬드를 발견합니다. 그런데 플레이를 하다보니 일행이 고블린에게 둘러싸인 레이몬드를 발견하는 화면이 나뭇잎에 가려진 채 출력됐습니다. 
 
고블린에게 둘러싸인 레이몬드가 나무에 가려져 안 보인다. (사진='창세기전: 회색의 잔영' 실행 화면)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요. 이 게임은 닌텐도 스위치의 오른쪽 스틱으로 화면 방향을 이리저리 돌리며 진행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보기 편한 방향으로 전투를 진행했는데, 그러다가 구출 대상인 레이몬드를 발견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이때 게임은 제가 일행을 비춘 각도 그대로 화면을 오른쪽으로 움직이며 대화를 출력했는데요. 이럴 경우 제작진은 구출 대상이 제대로 보이게 카메라 시점을 이동시키든가, 화면 앞을 가리는 물체가 임시로 사라지게끔 해야 합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번 회색의 잔영에선 이런 디테일한 제작이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표 캐릭터가 돌아다니며 아이템 상자를 찾거나 적과 조우하는 과정에서도 건물 벽이나 나무 등이 화면을 가리는 일이 잦습니다.
 
그럼에도 오랜 팬들이 창세기전을 하는 이유는, 이 게임 부제이기도 한 '회색의 잔영'이 지칭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 또 그 서사에 매력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성우들의 열연과 새로운 연출에 대한 기대가 더해진 까닭에 이 게임을 내려놓지 못합니다.
 
지난해 12월30일 롯데몰 수원점 내 토이저러스에 '창세기전: 회색의 잔영'이 진열돼 있다. (사진=이범종 기자)
 
하지만 창세기전을 모르는 사람이 '세며들기(창세기전에 스며들기)'까지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해 보입니다. 캐릭터 하나를 움직이는 데 버튼을 너댓 번 누르고 상대 진영 움직임도 다 봐야 하는 턴제 게임의 지루함을 이겨내기엔, 화려하고 빠르고 재밌는 게임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이범종 기자 smile@etomato.com
 
  • 이범종

안녕하세요, 이범종입니다.

  • 뉴스카페
  • email
  • face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