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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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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범종입니다.
도리언 그레이가 그린 'P의 초상', 인간의 가면을 마주하다

(이범종의 게임 읽기)'P의 거짓'⑤음악으로 얻은 인간성, 그림으로 확인한다

2023-09-2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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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토마토 이범종 기자] 사람은 거울로 자기 모습을 확인하고 집을 나섭니다. 집 밖에선 사진으로 자기 모습을 친구들과 나누곤 합니다. 하지만 내면은 어떻게 마주하고 있나요? 일기를 적으면 되겠지만 매일 펴 읽기는 어렵습니다.
 
처음엔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초상화를 그리는 건 어떨까요. 그것도 방 한 구석에 숨겨두고 몰래 봐야 할 정도로 자기 영혼의 변화를 반영하는 그림이라면요. 'P의 거짓'은 이런 방법을 고민하는 데 참고가 될 만한 게임 콘텐츠입니다.
 
네오위즈(095660) 산하 라운드8 스튜디오가 만든 'P의 거짓'은 이탈리아 동화 '피노키오의 모험'을 프랑스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대라는 뜻, 19세기 말부터 1차 세계대전 발발 전인 20세기 초의 기간)로 옮겨 성인용 잔혹극으로 재해석한 액션 롤 플레잉 게임입니다.
 
검은 토끼단을 물리친 뒤, 이들이 훔친 그림 가운데 피노키오와 똑같이 생긴 소년의 초상화를 발견할 수 있다. (사진=P의 거짓 실행 화면 캡처)
 
이 작품 속 피노키오(P)도 모험 도중 초상화를 얻게 되는데요. 이 초상화 이야기를 하기 전에 그동안 피노키오가 인간성을 얻어온 방법을 돌아보겠습니다. 앞서 우리는 이 게임 속에서 P가 인간성을 얻는 수단 중 하나가 음악이라는 걸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질 들뢰즈의 철학으로 읽었습니다. P는 사람의 내면에서 잠재력을 끌어내는 매체인 음악을 감상함으로써 '에르고(이야기를 잇는 접속사이면서 이성 활동이라는 뜻도 있음)'의 속삭임을 듣고, 나중엔 온기도 얻게 됩니다.
 
이번엔 거짓말과 음악으로 인간성을 얻어가는 피노키오의 내면이 어떻게 그림으로 표현되는지, 그 그림은 왜 중요한지 살펴보려 합니다. P의 거짓 속 피노키오 초상화에 새겨진 의미를 한 번 읽어볼까요.
 
작품 속 P는 크라트 시의 악명 높은 도적 '검은 토끼단'을 몰아낸 뒤, 이들의 숙소에서 자신과 똑같이 생긴 어린이의 초상화를 찾아냅니다. P에게 이 초상화를 받은 제페토는 한편으로 기뻐하면서도 "하필...네가...찾아줄 줄은..."이라며 당황합니다. 의미심장하지요?
 
제페토는 (로봇이라면 존재하기 어려운) 어린 시절 피노키오의 초상화를 'D. 그레이'라는 화가가 그렸다고 말합니다. 초상화와 그레이. 그렇습니다. 오스카 와일드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주인공 도리언 그레이가 생각나지요.
 
라운드8에서 P의 거짓을 만든 '너프'팀은 소설 속 초상화 모델인 D. 그레이를 화가로 바꿔놨습니다. 앞서 우리는 제작진이 이 작품 곳곳에서 원작 동화 피노키오 설정과 데카르트 명제(코기토 에르고 숨) 등을 뒤집거나 비틀었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그렇다면 P가 얻은 인간성의 내면을 거울처럼 비추는 초상화를 왜 하필 D. 그레이가 그려야만 했을까요?
 
초상화를 받은 제페토는 “하필... 네가... 찾아줄 줄은”이라며 당황한다. (사진=P의 거짓 실행 화면 캡처)
 
미모 지키려다 내면 흉측해진 D
 
우선 초상화를 그린 도리언 그레이가 어떤 인물인지 파악하기 위해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잠시 호출해보도록 하죠. 이 소설 속에서 런던의 화가 바질 홀워드가 그리는 초상화 모델 도리언 그레이는, 헨리 워튼 경이라는 사람을 소개 받습니다. 헨리는 도리언의 완벽한 외모가 한때의 젊음과 함께 금방 사라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에 도리언은 자신과 달리 늙지 않고 영원히 아름다울 초상화를 질투하지요. 그는 자기 대신 그림이 늙을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내주겠다고 혼잣말 하는데, 그 소원이 이뤄집니다.
 
대신 도리언은 냉소적인 헨리가 자극한 이기심을 키우며 전과 다른 사람이 되어갑니다. 그는 아름다운 여배우 시빌 베인과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생각했지만, 본인 때문에 무대 밖 진짜 사랑을 알게 돼 연기에 실패한 그녀를 경멸하며 매정하게 떠납니다. 도리언이 초상화 속 자신의 모습(예술)과 자신의 삶을 동일시했듯이, 그는 시빌과 그녀의 연기를 동일시했습니다. 그래서 도리언은 실제 시빌이 아니라 그녀의 연기를 사랑했고, 그 연기가 실패하자 사랑도 식은 겁니다.
 
비탄에 잠긴 시빌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초상화 속 도리언의 입술은 비뚤어지며 잔인함이 묻어나게 됩니다. 영혼의 거울처럼요.
 
도리언은 자신의 '추한 가면'이 된 초상화를 다른 사람에게 들킬까봐 두려워합니다. 한편으론 자신의 이기심을 정당화해주는 헨리의 말에 감화되지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화는 이후에도 그의 격정과 죄의 무게를 짊어집니다. 도리언은 '망자의 관'을 덮는 보로 쓰일법한 덮개를 찾아 초상화를 덮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어렸을 때 쓰던 꼭대기 방에 그림을 숨겨두고는, 시들어가는 그림과 여전히 젊은 자신을 비교합니다. 초상화를 그린 바질은 주변 사람들을 파멸시키는 도리언에게 충고하러 그의 집을 찾아갑니다. 도리언은 반인반수가 된 자신의 초상화를 바질에게 보여줍니다. 충격 받은 바질은 함께 기도하자 했지만, 도리언은 초상화 앞에서 그를 살해합니다.
 
도리언은 자신의 타락을 정당화해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망가져가는 자신의 모습을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헨리에게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인용해 초상화의 정체성을 "슬픔이 담긴 그림처럼 심장이 없는 자의 얼굴"이라고 밝힙니다.
 
결국 도리언은 자기 파멸의 원인이 그토록 열망했던 젊음과 아름다움이었다고 결론 냅니다. 그래서 "그의 아름다움은 그에게 가면에 불과한 것"이었고, 그를 괴롭히는 건 "살아있으면서 죽은 그 자신의 영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도리언은 착한 사람이 되겠다는 결심이 그림에 미친 영향을 확인하러 계단을 오릅니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는 건 교활한 눈과 위선의 주름으로 가득한 입이었습니다. 화가를 해칠 때 그림 속 손에 생겨난 혈흔은 크고 진해졌습니다.
 
마침내 도리언은 무거운 양심의 거울인 초상화를 없애고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기로 합니다. 그는 바질을 찔렀을 때 쓴 흉기를 자기 영혼의 거울에 찔러넣습니다. 끔찍한 비명을 듣고 방에 들어간 하인들은 젊고 아름다운 주인의 초상화와 '찌글찌글 늙고 주름살 늘어진 흉측한 얼굴'을 한 사람의 시신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흉기는 그림이 아닌 시신의 가슴에 꽂혀있었습니다.
 
피노키오가 거짓말로 인간성을 얻은 뒤 제페토의 방에 들어가면, 초상화의 코가 길어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사진=P의 거짓 실행 화면 캡처)
 
길어진 P의 코, 추함인가 인정인가
 
도리언은 완벽한 초상이라는 이상을 자기 인생과 동일시하면서 파멸했습니다. 예술과 실제 삶의 간극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무대 밖에서 도리언을 사랑한 여인을 경멸하며 버리기도 했지요. 그런 그에게 제작진이 피노키오 얼굴을 그리라며 붓을 쥐어준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건 초상화 속 피노키오의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원작과 철학의 문법을 뒤집어온 제작진이 도리언의 초상을 어떻게 뒤집었는지 살펴봅시다.
 
처음 제페토의 방에 걸린 초상화엔 어린 피노키오의 모습만 있습니다. 이후 P가 거짓말로 인간성을 얻은 뒤엔 초상화 속 피노키오 코가 그림 밖으로 자라납니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 그의 영혼을 비췄듯이, P의 거짓 속 초상화도 거짓말쟁이 피노키오의 내면을 거울처럼 비추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화가 도리언이 그린 피노키오의 초상화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초상화의 코가 더 길어지기 전에 거짓말을 그만둬야 하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게임 속 피노키오가 검을 든 이유는 초상화 속 인간 소년이라는 이상과 현실 속 자신을 동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고한 사람들을 구하고 자신도 인간이 되겠다는 대의명분 때문입니다. 그러니 소설 속 도리언과 달리 초상화의 변화, 즉 길어진 코를 오히려 인간이 될 잠재력의 증표로 여기면 되는 겁니다. 오스카 와일드 소설에서 도리언이 자신의 아름다움은 스스로에게 가면에 불과했다고 결론 낸 점을 떠올려 봅시다. P의 거짓 제작진은 이를 뒤집어 '초상화의 길어진 코는 P에게 가면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P의 거짓 속 초상화의 길어진 코가 진정 무엇을 보여주려 하는지는 P의 수많은 죽음 끝에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카를로 콜로디 원작 동화 ‘피노키오의 모험’에서 피노키오를 상대로 사기와 강도짓을 벌인 여우와 고양이는 인간이 가면을 쓴 모습으로 재해석됐다. 이들이 진실을 말하는지 의심하며 도움을 줄지 말지 결정해야 한다. (사진=P의 거짓 실행 화면 캡처)
 
동물 가면으로 인간의 내면 반영
 
인형인 P의 내면이 초상화로 드러나는 반면, 그를 상대하는 인간의 내면이 동물 가면으로 나타나는 점도 재밌습니다. 이 작품 배경인 벨 에포크 시대 파리에선 밤마다 가면 무도회가 열렸다고 하죠. 클로드 드뷔시 등 당대 예술가들도 가면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P의 거짓 제작진도 가짜 얼굴인 동물 가면으로 진실의 애매함을 말하는 한 편의 우화를 보여줍니다. 카를로 콜로디의 원작 동화에서 피노키오를 상대로 사기·강도짓을 한 여우와 고양이는, 게임에서 해당 동물 가면을 쓴 남매로 등장합니다. 누나가 여우 가면, 동생이 고양이 가면을 씁니다. 처음엔 폭주 인형이 대량 생산되는 베니니 공장에서 마주치지만, 이들의 본격적인 사기 행각은 원작 동화에서처럼 빨간 가재 여관 앞에서 시작됩니다. 하지만 이후 남매가 다시 나타나 하는 이야기가 진실인지 거짓인지 확신하지 못한 채 우리는 도움을 줄지 말지 고민해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가면을 쓰고 있습니까. 오스카 와일드는 소설 속 도리언 그레이가 자신이 되고 싶던 존재이고, 냉소적인 헨리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자기 모습이고, 도리언에게 충고하는 화가 바질은 실제 자신의 모습이라고 정의했습니다. P의 거짓 결말도 와일드가 밝힌 등장인물과 자기 정체성의 숫자처럼 세 가지로 나뉩니다. 자신이 되고 싶은 P, 사람들이 생각하는 원작 동화의 P, 실제 자신의 모습을 반영한 P를 생각하며 P의 거짓을 즐겨보는 건 어떨까요. 초상화 밖 피노키오는 자기 운명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습니다.
 
이범종 기자 smile@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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