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기자
닫기
최기철

(전문)여환섭 "정치 쟁점화 사건 수사, 국민에게 모두 공개해야"

정통 '특수통', 24년 검사 생활 마감…마지막 '작심발언'

2022-09-07 11:51

조회수 : 2,342

크게 작게
URL 프린트 페이스북
[뉴스토마토 최기철 기자] 여환섭 법무연수원장이 정치적 논란이 예상되는 사건을 무작위 추첨으로 구성된 검찰시민위원회의 동의를 얻어 수사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7일, 만 24년간 봉직했던 검찰을 떠나며 남긴 마지막 말이다. 여 원장은 '검경수사권 조정·검수완박' 사태를 제외하고는 현안에 대한 공개적 발언을 자제해왔다. 그러나 이날 작심 발언을 쏟아냈다.
 
여 원장은 지금의 검찰 상황에 대해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고 진단한 뒤 "현재 정치적 상황과 지난 경험에 비추어 보면 앞으로 닥칠 위기는 기존의 것과는 차원이 다를 수 있다"고 했다. 또 "그것은 조직의 존폐와 관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그것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다가올 위기를 너무나도 뻔히 보면서도 우리가 늘 해왔던 대로 대응하거나 가만히 앉아 있으면 그 결과는 역시 예상대로 될 것"이라며 "우리에게는 시간도 많이 남아 있지 않다"고 경고했다.   
 
그는 "검찰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신뢰를 얻는 방법 외에는 다른 방책이 있을 리 없다"면서 사건 처리 기준과 그 처리과정을 국민에게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고 밝혔다. 
 
여 원장은 그 현실적 실행방안으로, 검찰시민위 소집을 통해 영장청구와 기소·불기소는 물론, 수사 착수부터 사건관계인의 소환여부까지 동의를 구하고 참관토록 함으로써 검찰 스스로 수사권을 견제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사종결 이후에는 시민위로 하여금 백서를 발간해 국민들에게 수사결과를 소상히 알리고, 절차나 재판이 끝난 후에는 기록을 모두 공개해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여 원장은 2013년 공영방송(KBS) 수신료 인상안의 국회 부결과 2019년 수사권조정안 국회통과를 빗대 "건국 후 유지되어 온 검찰 제도의 근간이 바뀌는 법안이었지만 반대하는 국민 여론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냉소적으로 말하자면 검찰이 국민들 호주머니 속 천 원짜리 한 장의 가치도 없었다는 말도 된다"고 개탄했다. 
 
경북 김천 출신인 여 원장은 사법연수원 24기로, 윤석열 대통령보다 한 기수 아래지만 현직 시절 특별수사에 관한 한 라이벌 관계로 평가된다. 두 사람 모두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에서 정치인이 개입된 당대의 여러 대형 권력형 비리를 수사했다. 1~2년 차로 대검 중수부 검찰연구관, 대검 중수 1·2과장,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장검사를 역임한 이력도 같다.
 
여 원장은 이날 평소 후배들에게 자주 하던 말을 퇴임사 대신 남겼다. 여 원장의 '당부의 말' 전문을 소개한다.  
 
7일 퇴임한 여환섭 법무연수원장이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성폭행, 뇌물수수 의혹 사건'을 규명할 수사단장 시절인 2019년 4월1일 오후 서울 송파구 서울동부지방검찰청에서 기자간담회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사진=뉴시스
 
1998년 어느 따뜻한 봄날 저는 검찰청에 설레는 마음으로 첫 출근을 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날 오전에 첫애가 태어났습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그 딸은 장성했고, 저는 이 자리에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대과 없이 공직을 마친다는 점에서 안도를 느낍니다. 
 
오로지 검찰 조직을 사랑하는 충심에서 평소 아끼는 후배들에게 자주 하던 말을 다시 한번 당부하고자 합니다.
 
위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현재 정치적 상황과 지난 경험에 비추어 보면 앞으로 닥칠 위기는 기존의 것과는 차원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조직의 존폐와 관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가올 위기를 너무나도 뻔히 보면서도 우리가 늘 해왔던 대로 대응하거나 가만히 앉아 있으면 그 결과는 역시 예상대로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시간도 많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상투적으로 들리겠지만, 국민의 신뢰를 얻는 방법 외에는 다른 방책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신뢰는 투명성에서 나옵니다. 
사건 처리 기준과 그 처리 과정을 국민에게 투명하게 공개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과거 정치권에서 논쟁이 된 사건을 최선을 다해 공정하게 처리했다고 생각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정치권의 쟁점으로 부각되어 더 심한 정쟁의 소재가 되는 모습을 자주 보아왔습니다. 그 결과 검찰의 명성과 신뢰는 치명적인 손상을 입곤 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정치 쟁점화된 사건 속에 빠져들어 조직 전체가 휘말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적으로 논란이 예상되는 사건에 대해서는 획기적인 투명성 확보 방안을 마련하여 과감하게 실행하여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정치 쟁점화된 사건에 대해서는 사건 처리의 전 과정을 국민들에게 투명하게 공개해야 합니다. 
 
현실적인 실행방안을 제안하면, 무작위로 추첨한 시민들로 구성된 검찰시민위원회를 소집하여 수사의 착수 여부, 사건 관계인의 소환 여부, 각종 영장의 청구 여부, 기소와 불기소 여부 등 모든 단계에서 위원회의 동의를 구하고 조사 과정에도 참관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수사가 종결된 후에는 위원회로 하여금 백서를 발간하여 국민들에게 수사결과를 소상히 알리고, 절차나 재판이 끝난 후에는 기록을 모두 공개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이처럼 절차가 투명하게 공개된다면 더 이상 권력이 검찰을 도구로 활용하여 정치적 이득을 취하려는 속셈도 통하지 않을 것이며, 검찰이 정치의 한복판에 빠지지 않고 권력투쟁의 재료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사건 처리와 관련된 정치권의 소모적인 논쟁과 국민적 갈등 상황도 대부분 해소될 것입니다. 
 
정치는 권력 쟁취를 목표로 하는 탐욕이 본질적 요소이고, 법치는 보편적 이성에 근거하여 정치의 폭주를 막는 역할을 하므로 항시 서로 충돌하고 갈등합니다. 
 
그러므로 정치권에서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지켜 줄 것이라는 아름다운 환상을 가지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투명한 제도와 관행을 정교하게 만들어 법치주의를 지켜야 합니다. 
 
2013년 공영방송(KBS) 수신료 1,500원 인상안이 방송통신위원회를 통과했습니다. 그러나 국회에서 발목이 잡혔습니다. 수신료 인상에 부정적인 국민 여론 때문이었습니다. 지금도 수신료는 같습니다. 국민들께 천 원짜리 한 장의 부담을 지우기가 그렇게 어렵습니다. 
 
지난 정부에서 수사권조정안이 국회에서 손쉽게 통과되었습니다. 건국 후 유지되어 온 검찰 제도의 근간이 바뀌는 법안이었지만 반대하는 국민 여론은 거의 들리지 않았습니다. 냉소적으로 말하자면 검찰이 국민들 호주머니 속 천 원짜리 한 장의 가치도 없었다는 말도 됩니다. 
 
우리는 국민들이 필요로 하는 일을 찾아서 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소하게 보일 수 있고 법률적으로 반드시 우리가 해야 할 일인지도 불분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민이 검찰에서 해주기를 바라는 일이라면 작고 사소한 일이라도 해야 합니다. 
거기에서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고 신뢰를 얻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 노력이 모여야 언젠가 검찰을 국민들께서 주머니 속 천 원짜리 한 장의 존재로 느끼게 될 것입니다. 
 
검찰의 변화는 독임제 관청들의 집합인 조직의 특성상 구성원 전체의 일치된 공감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수뇌부 몇 명의 의지로 관철되는 것이 아닙니다. 조직 구성원 전체가 정치적 외압에서 검찰을 지키겠다는 뜻을 확고하게 하고 투명성 확보 방안과 국민 신뢰 회복을 위한 중지를 지속적으로 모으고 실천할 때 다가오는 위기를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후배들에게 어려운 과제를 남긴 채 검찰을 떠나지만 밖에서 늘 같은 마음으로 응원하겠습니다. 
 
늘 사랑과 믿음을 주셨던 선후배 검사님들, 수사관님들, 실무관님들을 비롯한 검찰 가족 여러분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2022. 9. 7. 
 
법무연수원장 여환섭 올림
 
최기철 기자 lawch@etomato.com
 
  • 최기철

  • 뉴스카페
  • ema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