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다른 시선으로 보자. ‘미투’(#MeToo)를 무조건적으로 존중해야 할까. 변질에 대한 우려는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 논쟁처럼 소모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 사회 건강한 자생력을 믿기에 지금에선 한 번 쯤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나는 성폭력의 피해자입니다.’ 이 짧은 문장에 담긴 끔찍함은 비단 피해자들의 고통을 들여다 볼 수 있다는 것도, 그 고통을 가늠해 볼 수 있단 무례함도 아니다. 살펴보면 이 문장의 결은 꽤 폭력적이고 ‘무감각적’이다. 나아가 수단이 되고 목적이 될 수 있는 가능성도 처음부터 품고 있다. 우리 사회의 암묵적 폭력의 카르텔이 이 문장 속에 숨겨져 있고 그것이 드러나면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뀌어 버리기도 한다. 이미 '미투'는 본질 자체가 변질됐다. 결과적으로 피해 고백은 폭력의 또 다른 형태가 됐다. 우려되고 두려웠던 지점이다. ‘미투’ 변질. 이를 막을 도리 없는 제도적 장치.
시작은 정직했다. 보이지 않는 힘을 과시하던 문화계 인사들의 추악함이 드러나면서 온 국민은 분노했다. 그들은 뻔뻔했다. 관행이었단다. 한 사람의 희생으로 모두가 편하면 그것은 폭력이 아니었단다. 연극계 엘리트집단 ‘연희단거리패’ 수장 이윤택 총 예술감독과 그의 수제자들의 궤변이다. 고개를 숙이며 사죄했다. 하지만 진심은 보이지 않았다. 여론을 의식해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들은 인정하는 것과 인정을 당하는 것에 대한 차이를 증명해 냈다. 가해자인 그들은 억울해했다. 비단 이들 뿐이었을까. 셀 수도 없을 만큼 너저분하다.
원인은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누구도 정확하게 설명하긴 어렵다. 팔순의 한 노배우는 ‘카메라 밖에 있어야 할 사람이 카메라 앞으로 나오려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연예계만이 아닌 사회 곳곳이 품은 모든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스스로가 서야할 자리가 아닌 한 발 앞에 서려고 할 때 암묵적 그리고 물리적 비물리적 폭력이 발생한다.
순기능으로만 달릴것 같던 이 운동이 변질될 것을 우려한 시선은 처음부터 존재했다. '미투' 자체가 수단과 목적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반대 우려도 마찬가지다. 폭로 당사자에 대한 무조건적 관용의 시선을 말한다. 정봉주 전 의원 사건이 대표적이다. 그의 정치적 성향에 대한 관용은 오히려 폭로한 이의 목적을 의심케 했다. 결과적으로 정 전 의원이 잘못을 시인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음에도 말이다. 배우 곽도원 논란도 진흙탕이다. 이윤택 성추행 피해 고소인 17인 가운데 4인이 금품 요구를 했단다. 그의 소속사 대표인 현직 변호사 주장이다. 양측은 ‘사실이다’ ‘아니다’로 공방 중이다.
‘미투’는 이제 변질이 됐다. 예견된 일이었다. 아무런 준비 없는 상태에서 미투는 쓰나미처럼 밀려왔고, 여론은 들끓고 진실공방 속에 이제 본질의 색깔이 흐려졌다. 수단과 목적을 생각하고 본질에 접근하는 잘못이 드러나고 있다. 이건 미투가 가고자한 방향이 결코 아니다. 이제라도 가해자를 처벌하고 피해자를 보호할 또는 무고한 피해자를 보호하고 무분별한 가해자를 처벌할 최소한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김재범 기자 kjb517@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