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최기철 기자]문재인 대통령이 사실상 마지막 카드로 뽑은 이진성 헌법재판소장 후보자는 군인의 아들이다. 이 후보자의 부친은 전남 장흥이 고향으로, 여순사건부터 6·25, 월남전까지 참전한 백전노장이었다.
준사관으로 오랫동안 군생활을 한 부친 때문에 태어난 곳은 부산이지만 가평, 연천, 포천, 춘천 등 전방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떤 때는 1년에 3번 이사한 적도 있어 어린 시절이 매우 힘들었다고 한다.
서울 경기고와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한 이 후보자는 사법연수원을 10기로 수료한 뒤 1983년 9월 법관생활을 시작했다. 여느 동료 법관들과 별반 다를 게 없었지만 1985년 5월 법관으로서의 일생에 큰 전환을 맞게 된다.
그는 2012년 9월12일 헌법재판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당시 계엄포고령을 위반한 민간인에 대해 비상계엄 해제 이후에도 군법회의 재판권을 일시 적용할 수 있다는 전원합의체 판결에 대한 반대의견을 읽고 법관으로 새로 태어나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이 반대의견은 고 이일규 전 대법원장이 냈다. 당시 이 전 대법원장은 대법원 판사, 지금의 대법관 중 한명이었다. 그는 반대의견에서 “다수설이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고 규정한 헌법정신에 눈을 뜨지 못해 헌법적 감각이 무딘 점을 통탄할 따름이다”라고 비판했다.
이 후보자는 이 대목을 읽고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규정한 헌법의 규범성과 중요성을 새삼스레 깨우쳤다”고 회고했다. 또 “그때부터 저는 헌법적 이념과 기본적 인권이 재판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구현될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모든 재판에 임했다”고 말했다.
그의 고민은 세 개의 판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중 하나는 학교 체벌이 일상적으로 이뤄지던 1985년 11월 국민학교 교감이 체벌로 손해배상 청구를 당한 사건이다. 이 후보자는 이 사건에서 당시 분위기와는 달리 교사의 징계권 남용으로 판단해 교감에게 손해배상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다. 또 하나는 1991년 3월 국가안전기획부 피의자 박노해 시인에 대한 변호인 접견과 면회신청 불허처분에 대한 준항고를 인용한 사건이다.
서울고법 판사 시절에는 전두환 정권의 삼청교육대 피해자들에게 국가가 위자료를 지급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 후보자는 당시 판결문에서 “자유민주주의 국가는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보장할 의무를 단순히 이념이나 구호로 내세우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실질적으로 담보하는 나라”라고 역설했다.
이 후보자는 스스로에게 부여된 헌법적 사명에 대해 “보편성을 가지는 헌법가치가 무엇인지 발견하는 한편, 사회갈등과 분쟁의 현장에서 균형감각을 잃지 않음으로써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최후의 보루로서 역할을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또 재판관으로서는 “국민의 고통을 함께 느끼면서 분출하는 국민의 요구를 헌법적 가치에 부합하도록 판단하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게 희망의 길을 제시하는 재판관이 되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이 후보자가 재판관 인사청문회에서 이런 자신의 각오를 강조하기 위해 모두발언 말미에 시를 낭독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가 낭독한 시는 김종삼 시인의 ‘장편2’이다. 일제 강점기 거지소녀가 거지장님 어버이를 식당으로 이끌고 온 것을 보고 식당 주인이 소리를 질렀으나 거지소녀는 태연히 “어버이 생일”이라며 10전짜리 두 개를 내보였다는 내용이다.
그는 “흔히 사람을 출신이나 지위, 행색이나 장애 유무와 같은 겉모습으로 선입견을 가지고 속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 속의 소녀와 같이 사회의 밑바닥에서 고달픈 삶을 살지만 의연함을 잃지 않는 많은 국민이 계십니다. 저는 그들이 내미시는 손을 따뜻하게 잡고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헌법재판관이 되고자 다짐합니다”라고 말했다.
헌법재판소장 후보에 지명된 이진성 헌법재판관이 27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퇴근하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최기철 기자 lawch@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