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루드빅스하펜에 있는 글로벌 화학회사 바스프의 공장 전경. 사진/바스프
글로벌 대형 화학기업들이 생명과학(Life science) 사업 육성에 나서고 있다. 최근 독일 기반의 바이엘은 소재과학 사업의 분리·상장을 발표하면서 전문생명과학기업이 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미쓰비시화학도 기존 제약과 별도로 새로운 헬스케어 사업을 추진할 자회사를 설립했다.
LG경제연구원이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2014년 매출 기준 글로벌 20대 화학기업 중 전문기업 9개사를 제외한 종합화학기업 11개사 가운데 8개 기업이 생명과학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생명과학'은 생명에 관계되는 현상이나 생물의 여러가지 기능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의료나 식량, 환경보존 등 인류복지 증진을 추구하는 종합과학 분야를 말한다. 생물학을 기초로 화학과 의학, 바이오기술 등 다양한 과학기술이 경합된 융합 학문이다.
구체적으로는 제약·의료기기·헬스케어 소재 등 헬스케어 분야, 작물보호제·종자·뉴트리션(영양)등 농업·식품, 바이오연료·바이오소재 등의 환경 분야가 포함된다.
자료/LG경제연구원
생명과학사업으로 사업의 중심축 자체를 전환한 기업으로는 바이엘과 듀폰, DSM이 대표적이다. 생명과학 중심의 기업으로 변신한 이들은 이 영역에서 메이저기업이 되어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1990년대의 바이엘은 제약과 작물보호제, 소재(폴리머), 정밀화학, 사진필름(아크파) 사업까지 보유한 다각화된 기업이었다. 이후 지속적인 포트폴리오 최적화를 통해 2000년대 중반부터 제약·농업과학·소재과학 등 3개의 독립자회사 구조로 운영되고 있다. 최근에는 2016년 소재과학사업의 분리 상장을 통해 '순수 생명과학기업'이 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듀폰도 2012년 코팅사업 매각에 이어 2015년 기능성화학사업 분리상장을 마무리하고 농업과학과 뉴트리션 및 산업용 바이오 사업에 주력하고 있다. DSM은 틈새시장을 공략해 뉴트리션과 식품첨가물 사업을 주력으로 바이오소재와 생체적합소재를 육성하고 있다. 최근 소재과학사업 매출의 40%를 담당했던 섬유중간체 사업을 분사·지분매각해 철수 작업을 진행 중이다.
임지수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듀폰의 매출은 2004년 296억 달러에서 2014년 347억 달러로 10년간 매출 성장은 크지 않았다"며 "이런 기업들은 양적 규모(매출, 자산) 보다는 질적 가치(차별성, 지속가능성)을 더 중요시하고 시장지위 유지 및 강화를 위한 노력을 현재도 치열하게 진행하고 있는 과정으로 이해된다"고 설명했다.
종합화학기업의 특성은 유지하면서도 생명과학사업을 지속가능한 성장의 대안으로 육성하는 기업들도 많다. 바로 바스프와 다우케미칼, 미쓰비시화학과 스미모토화학, 아사히카세이 등 다수의 일본 종합화학기업들이다. 이들의 생명과학사업 매출비중은 전체 매출의 10~20% 수준이다.
사업 기반이 되는 로컬지역이 어떤 수요기반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이들이 집중하는 생명과학 분야도 차이가 있다. 거대 산업화 된 서구지역의 바스프와 다우케미칼은 농업·식품 분야에, 대표적 고령화 사회인 일본 종합화학기업은 헬스케어 분야를 강화하고 있다.
특히 미쓰비시케미칼은 2007년 일본 7위의 제약기업인 미쓰비시다나베제약을 자회사로 편입하고, 2013년 의약 캡슐시장의 메이저기업인 미국의 Qualicaps를 인수했다. 지난해 헬스케어 신사업 육성을 주도할 자회사 LSII(Life Science Institue Inc.)를 설립해 폭넓은 신사업 기회를 탐색하고 있다.
수익성도 안정적이고 양호하다. 바스프의 농업솔루션 부문은 18.4%(영업이익률 기준), 다우케미칼의 농업과학 부문은 14.7%(EBITDA 마진율 기준)로 두 회사 모두 전사 평균 수익성을 상회하고 있다. 지난해 기준 미쓰비시화학과 미쓰이화학의 매출비중은 15% 수준이지만 영업이익은 30~50%를 담당하고, 스미모토화학은 생명과학사업이 영업이익의 68%를 담당하고 있다.
이 유형의 종합화학기업은 적극적인 자본력 동원이 어렵고, 사업경쟁력도 제한된 범위에서만 선두그룹에 포함돼있으며, 기존 화학사업과 업의 특성이 달라 경영이 복잡해지는 등 문제도 존재한다는 설명이다. LG경제연구원 관계자는 "이들 종합화학기업은 생명과학사업의 추가 육성 및 경쟁력 강화가 충분하지 못할 경우 현재의 시장지위가 유지되기 어려울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자료/LG경제연구원
생명과학사업이 부상한 요인으로는 선진국을 중심으로 환경안전 문제에 대한 대중적 감시와 정부의 규제가 꼽힌다. 1984년 인도 보팔사건(미국 유니온카바이드 소유 살충제 공장의 독가스 누출로 2800명이 사망한 사건)을 비롯해 노후한 화학공장의 환경안전 사고가 화학산업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악화시켰다는 것.
지구 오존층 파괴 물질로 지목된 CFCs(염화불소탄소)의 단계별 사용금지, 플라스틱의 환경호르몬 이슈, 발포폴리스티렌(EPS) 포장재에 의한 백색오염 문제 등 화학제품 관련 다양한 환경안전 이슈도 주목을 받았다. 물질문명의 성장기반으로 인식되던 화학산업이 인류의 보건안전과 건강에 위협이 되는 사업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또 1980년대 이후 화학기술은 혁신물질(Molecular) 개발이 감소하면서 차별화되는 기술 기반이 약화됐지만, 바이오 기술에서는 바이오의약품, 유전자변형종자 등 본격적인 혁신이 시작됐다. 실제로 상품화가 시작된 유전자변형종자는 1999년 미국 옥수수 종자의 33%, 목화종자의 55%, 아르헨티나 대두 종자이 99%를 점유했다. 제약과 농화학 사업을 병행하던 종합화학기업들이 생명과학사업의 육성을 전격적으로 결정하게 하는 압력으로 작용했다는 평가다.
생명과학사업의 상당 부분이 화학사업과 기술 및 사업적 시너지가 있다는 점도 화학기업 참여에 중요한 원인이 됐다. 합성의약, 작물보호제, 뉴트리션·식품첨가물 사업은 화학사업으로도 분류될 수 있는 공통 영역의 사업이다. 새로운 구조 화합물을 개발하고 합성, 분리, 정제, 배합 등 과정으로 제품을 생산하는 정밀화학과 유사한 기술기반이기 때문이다. 합성의약과 바이오의약, 작물보호제와 종자, 합성소재와 바이오소재 등 각각의 사업은 최종 고객이나유통채널 등이 비슷해 시장에서 상호 보완 또는 대체 관계로 대부분 기업들이 두 개의 사업을 함께 수행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분석이다.
성장성 저하와 차별화 영역의 축소는 많은 화학기업들의 오래된 고민이었다. 바이오기술의 혁신과 식량부족, 고령화 등 인류 공통의 문제가 심화할 것이라는 전망으로 생명과학사업이 주목을 받는 현상은 지속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조승희 기자 beyond@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