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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렛츠GoGo)너무 늦게야 찾아간 백제의 왕도
입력 : 2015-07-16 오전 6:00:00
천오백 년쯤이 지났을 거라 했던가. 치욕의 역사를 오랫동안 기억하는 것은 백마강뿐이었다. 바람 한 자락이 실어 나른 소문은 그랬다. 백제 여인 삼천이 그 강에 몸을 날렸고, 꽃잎처럼 떨어졌는데 서러운 눈물만 자꾸만 흘렀다. 서해 군산의 옛 진포를 거침없이 올라온 당나라 소정방은 뿌연 해무와 진흙탕을 거침없이 헤쳐 부소산 자락을 올라 왕의 목을 베었다. 나라가 망했다는 풍문이 돌았다. 살아있는 자의 입에서 나온 소문은 사실이었는지 거짓이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것이었지만, 바람이 실어 나른 패망의 역사는 산하를 떠돌아 천 년의 시간을 넘어서 사실처럼 각인되었다. 허무의 땅, 백제에는 파편처럼 흩어진 풍문과 패자의 역사만이 기록되어 있었다.
 
지난 7월 4일 백제역사문화유적이 유네스코로부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비로소 풍문 속에 잊혀졌던 백제의 역사가 제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그동안 백제는 광막한 들판을 마주하고 있는, 상상의 땅이었다. 특히 패망의 역사적 현장인 사비(부여)과 공주에는 남아있는 유적이 많지 않았다. 나당 연합군의 말발굽에 모든 것은 약탈되고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남은 것이라곤 무심한 주춧돌과 기와, 때려부술 수 없었던 자연경관뿐이었다. 678년 동안 빛깔 고운 문화를 품어왔던 백제 왕국은 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완전히 잊혀진 공백으로만 남아있었다.
 
먼저 백제 사비성이 자리했던 부여로의 걸을 참이다. 백제 마지막 왕도였던 사비시대부터 거슬러 올라가며 잊혀진 왕국 백제를 마주할 것이다. 부소산성에 올라 찬란한 백제문명을 꽃 피웠던 백마강을 바라보고, 홀로 백제의 하늘을 받치고 천년을 버티어선 정림사지 5층석탑과 백제 무왕이 배를 띄웠다는 궁남지와 사비성을 온전히 복원해 놓은 백제문화제 단지도 돌아보는 여정이다.
 
백제왕국, 그 허무의 땅에 대한 기록
 
크고 높은 산성은 왕궁의 어드메 자리하였던가. 사비시대 왕궁의 배후 산성이었던 부소산성을 오른다. 사비(부여)는 백제가 한양에서 웅진(공주)을 123년간 수도 역할을 한 왕도였다. 부소산성은 부여의 진산인 부소산의 남쪽 기슭에 위치한 산성이자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수도를 방어한 곳이다. 부소산성은 평시에는 왕궁의 후원 역할을 하다가 위급할 때에는 왕궁의 방어시설로 이용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산성길을 따라 오르면 백화정과 영일루가 나타난다. 백제가 나당연합군의 침공으로 함락되자 궁녀 삼천이 백마강 바위 위에서 몸을 던졌다.
 
낙화암(사진=이강)
 
그 모양새가 꽃잎이 떨어지는 듯했다하여 낙화암이라고 불렀고, 1929년 궁녀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백화정(百花亭)을 지었다. 먼저 백화정에 올라 내려다본다. 백마강의 물빛이 금빛으로 물결친다. 삼천 송이의 꽃으로 떨어진 백제 여인들의 눈물이 흐르는 백마강에 황포돛배가 다시 흐르기 시작한 지는 얼마되지 않았다. 이윽고 낙화암에 올라 내려 본 백마강. 물빛은 가슴이 시리울 정도로 짙푸르다. 꽃잎이 떨어진다. 천 길 만 길의 나락. 백제의 삼천 여인은 옷깃을 날개처럼 펴고 꽃잎처럼 떨어졌다. 산책로를 따라 삼충사, 낙화암, 백화정, 영일루, 궁녀사, 고란사·고란약수터 등을 돌아보고 고란사 약수에서 목을 축인 후 백마강으로 흐르는 유람선에 몸을 싣는다.
 
광막한 빈터를 지켜온 백제 정림사지 5층석탑
 
구드래 나루터로 내려서 백제 유적지 가운데 유일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정림사지 5층석탑(국보 제9호)을 찾아간다. 정림사지는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시기(538-660)의 중심 사찰이 있던 자리이다. 발굴조사 때 나온 기와조각 중 '태평 8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太平八年 戊辰 定林寺 大藏唐草)'라는 글이 발견되어, 고려 현종 19년(1028) 당시 정림사로 불렸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한다. 절이 있던 터에는 석탑과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허허로이 남아 있다. 정림사지 5층석탑은 신라와 연합해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이라는 뜻의 글귀를 이 탑에 남겨놓아, 한때는 '평제탑'이라고 잘못 불리어지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목조건물의 형식이 특이하고 세련돼 창의적인 조형미를 보여주며, 전체의 형태가 장중하고 아름답다. 익산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2기만 남아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라는 점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는 작품이다. 절 앞의 네모난 연못의 운치 또한 남다르다. 연못 부근에는 백제와 고려시대의 장식기와를 비롯하여 백제 벼루, 토기와 흙으로 빚은 불상들이 놓여있다.
 
정림사지와 5층석탑(사진=이강)
 
정림사 터에서 5분 거리에 궁남지(宮南池)가 자리하고 있다. 백제 무왕이 노닐었다는 부여 동남리에 위치한 궁남지는 여름의 부여에서 가장 이름을 날리는 곳이다. 초록의 물결 위에 무리를 지어 피는 연꽃들이 부여의 한을 달래고 있다. 삼국사기 속 '궁궐의 남쪽에 연못을 팠다'는 기록을 근거로 궁남지라 불린다. 신선의 정원이라 불릴 만큼 아름다운 왕의 연못인데, 마래못, 마래방죽이라는 이름도 있다. 주춧돌과 기와조각 등과 함께 건물의 터가 발견되기도 해 본래 그 크기가 더 방대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궁남지는 현재 알려진 우리나라 최고의 궁원지(宮苑池)로 백제의 조경기술과 도교문화의 수준을 엿볼 수 있는 유적이기도 하다. 그 조경기술은 일본 원지 조경의 원류가 되었다고도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20여 리나 되는 긴 수로를 통해 물을 끌어들였고,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었으며 연못 가운데에 섬을 만들었다고 한다. 연못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당시에 뱃놀이를 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크기를 짐작할 뿐이다.
 
궁남지(사진=이강)
  
둑길을 걷노라면 크고 작은 연못에 나눠 심겨진 쉰 가지 넘는 연꽃이 반긴다. 못 안으로도 두렁길을 내 코 앞에서 꽃을 감상하고 찍을 수 있다. 여름이면 연꽃들이 낮에는 몸을 숨겼다가 밤에만 피어나는데, 백련이 곧은 선비라면 홍련은 화사한 백제미인이다. 진분홍 홍련이 있는가 하면 새빨간 진홍련도 있다. 자줏빛과 황금빛의 연꽃도 종종 눈에 띈다. 쉴 곳도 세심하게 만들어져 있어 천만 송이 연밭을 다 돌아도 지루하지 않다.
 
이강 뉴스토마토 여행문화전문위원 ghang@hanmail.net
 
김나볏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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