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나볏기자] 한국 연극계의 거목인 극작가 겸 연출가 오태석(사진·75)에게 올해는 무척 뜻 깊은 해다. 우리 소리, 우리 몸짓을 탐구하며 한국연극의 언어 확장에 기여해온 극단 목화를 창단한 지 30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오태석 연출가가 이끄는 극단 목화의 성취 중 단연 첫 손에 꼽을 만한 것은 '전통의 현대적 수용'이다. 작품마다 한국 전통이라 불릴 만한 요소를 담고 있으나 희한하게도 지루하거나 고리타분하지 않다. 긴장과 이완을 순식간에 오가는 특유의 연출기법은 처음에는 당혹감을, 뒤이어 해방감을 자아낸다.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그 영향력은 연극계 바깥까지 뻗어 있다. 박영규, 손병호, 장영남, 임원희, 유해진, 성지루, 박희순, 정은표, 황정민, 김수로 등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연기파 배우들이 바로 극단 목화 출신들이다. 극장 안에서 땀 범벅이 된 채 맨발로 뛰는 배우들의 모습은 비단 극단 목화의 상징에 그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연기력의 근원으로 자리매김했다.
오태석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예술가이지만 올해는 특별히 극단 목화의 주요 작품을 상연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자전거>를 시작으로 <템페스트>, <백마강 달밤에>까지 상반기 중 무대에 올렸고, 올 가을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참가작인 <심청이는 왜 두번 인당수에 몸을 던졌는가>로 또 한 번 관객 만날 채비를 하고 있다.
추석 직전 대학로의 한 서점에서 오태석 연출가를 만나 창작의 비밀을 살짝 엿봤다. 연륜이나 명성에 걸맞지 않게 수더분하다는 세간의 평은 과연 틀리지 않았다. "만나주셔서 감사하다"는 말로 시작된 이날 인터뷰를 통해 '겸손한 괴짜 연출가'의 진면목을 잠시나마 엿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허구의 힘'에 대해 확신하는 거장 예술가의 기운이 반가웠다. 아프리카 언어 모사, 불경 외기를 거쳐 전통 춤사위까지 풍성한 볼거리가 곁들여져 마치 연극 한 편을 보는 것 같았던 인터뷰를 여기 글로 옮긴다.
(사진=김나볏 기자)
-올해는 극단 목화가 창단된 지 30주년 되는 해다. 소회가 어떠신지 궁금하다.
▲동인제 극단이란 것은 결국 허구의 시간을 많이 갖는다는 걸 의미한다. 실제 생활에서는 자기가 자꾸 분산되어 버리지 않나. 음, 연출가 그로토프스키 같은 경우에는 가능한 한 아파트든 창고든 공간 한 층을 아예 빌려버린다. 극장에서 할 공연을 마무리 지을 때까지 그 속에 있다가 거기서 만든 것 그대로를 극장에서 보여준다. 현실과 되도록 접촉을 안 하게 하는 거다.
극단 목화 같은 경우 오전에는 자기 집 심부름 좀 해줄 시간 갖도록 하고... 점심 시간 이후부터 지하철 운행 끝날 때까지는 거의 시간을 같이 보낸다. 그렇기 때문에 연극하는 사람들한테 미안하게 생각하는 점이 다른 작품 구경을 못한다는 거다. 그런 식의 시간을 거의 30년동안 보냈다. 식구보다 더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는 건데... 25~40명 정도 단원은 항시 채워져 있었다. 그런 덕분에 우리 말에 천착할 수 있었다. 우리의 볼 거리는 어떻게 만들어질 때 관객과 가장 빠르게, 또 편하게 소통할 수 있는지 그런 것들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는데 그것이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30년 동안 이제 겨우 그런 것들 할 수 있게 됐다. 동행할 수 있었던 것, 그것이 아주 고맙다.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니까.
-매일을 같이 한다고 보면 되나? 공연이 없을 때도?
▲매일을 같이 있었다. 공연을 연습해야 하니까. 올해 우리가 공식적으로 하는 게 6작품인데 여기에 또 뉴욕에 가서 한 작품 더 공연할 계획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겠나(웃음). 동인제이기 때문에 가능한거다. 그냥 도장 찍고 계약하고 나서 연습하러 와라, 이래 가지고는 시간이 안된다.
-언젠가 인터뷰에서 '국내의 유일한 동인제일 거다'라고 하신 말씀이 이제 이해가 간다.
▲동인제라는 건 허구 속에 얼마나 오랫동안 머물고 있느냐, 그렇게 되도록 조건을 만드느냐가 중요하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감옥소를 만드는 거다(웃음). 뜻 맞는 몇 사람이 모여서 때때로 공연을 하는 게 동인제라는 식은 동인이란 개념을 넓게 잡은 것이고.
-올해 목화 창단 30주년을 기념하며 <자전거>, <템페스트>, <백마강 달밤에>에 이은 4번째 작품으로 <심청이는 왜 인당수에 몸을 두번 던졌는가>가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무대에 오른다. 작품들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 부탁드린다.
▲올해의 경우에는 그동안 축적된 작품을 몇 개 한다. 첫번째 작품이 <자전거>였다. 6.25 사변 이후 우리나라가 유일하게 분단된 국가로 남아 있지 않나. 1950년대의 풍경은 어땠는지, 분단의 시발점은 어땠는지, 그걸 더듬어 보는 게 <자전거>라는 작품이다. 그 다음에 올린 게 <템페스트>다. 일단 올해가 셰익스피어 탄생 450주년이라 다들 셰익스피어 작품 하니까 하는 것도 있지만 11월에 뉴욕 라마마 극장에서 열리는 ‘템페스트 페스티벌’에 참가하는데 그것도 준비할 겸 해서 무대에 올렸다. 그리고 신라와 백제 간 1400년에 걸친 미움, 오해, 갈등을 푸는 내용을 그린 작품 <백마강 달밤에>도 공연했다. 1400년이나 걸친 역사 속에서도 그런 용서가 벌어지는데 왜 지금은 서로 죽일 놈이 돼 있는지, 우리는 역사에서 뭘 읽어낼 수 있는지 그걸 생각해보고자 했다.
그리고 이제 곧 <심청이는 왜 두번 인당수에 빠졌는가>를 한다. 이 작품은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해에 썼던 거다. 장벽이 무너질 때 아마 나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우리도 길어야 5~10년이면 휴전선이 없어지겠지'하고 생각했었다. 심청이라는 게 결국 뱃사람들이 파도를 잠재우기 위해 바친 인제수(人祭需)다. 집필 당시에 '우리도 지금 시점에서 어떤 제물이 있으면 풍랑을 잠재우고 DMZ도 없어지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고서 한 세대가 지나갔는데 이번 공연을 통해 그 때 사회상하고 지금하고 무엇이 달라졌는가, 더 좋아졌는가, 더 나빠졌는가를 보려 한다. 지금 금방 일어난 일인지, 아니면 한 세대 전에 일어난 일인 것인지 구분이 되나 보려고. 현대를 진단하고자 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심청이는 왜 두번 인당수에 빠졌는가>에 대해 더 여쭙겠다. 이번에 대본이 좀 바뀌었던데?
▲일단은 89년 집필하던 당시에는 그 2년 전쯤 충청도에 큰 홍수가 나서 가축이나 집을 휩쓸어 가는 사건이 있었다. 지금 다시 올리는 시점에서 비슷한 사건으로 어떤 게 있었나 보니 재작년에 구제역 때문에 가축들 파묻었었더라. 그래서 주인공 정세명이 소를 파묻고 상경을 했다는 컨셉트로 바꿨다. 그때만 해도 정세명이란 친구가 많이 다쳤으되 그래도 뭔가 농고 다닐 때 소를 키우던 마음이 흔적처럼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제 남아 있지 않다(웃음). 이제 남아 있다는 게 우스울 것 같다. 오히려 우리 사회가 저자를 왜 저렇게 만들었을까, 왜 저렇게 괴물처럼 되도록 만들었을까, 그렇게 가면 재미있지 않을까 싶다.
-현재 버전 대본에서 얼핏 '안산봉'이란 단어가 보이길래 '세월호 사건을 상징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 이것 외에도 우리 사회의 사건, 사고들과 관계된 단어들이 여러 개 단발마처럼 스쳐지나가는 것 같던데.
▲관객이 보면서 여러가지 연상을 할 거다. 그러나 세월호를 빌려서는 안되지. 단, 아까도 말했지만 <심청이는 왜 두번 인당수에 몸을 던졌을까>에 현대를 진단하는 의미는 있다. 이렇게 얘기하면 이상하지만... 200명 넘는 친구들이 물 속에 갇혀 있지 않았나. 그런데 원래 이 작품 자체가 또 불행한 여자들을 물 속에 집어넣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래서 내가 주최 측에 재미가 없다고 그러기도 했다. 현실과 너무 닮아서.
사실 원래 작품을 썼을 때는 70년대 유신 때인데 군정이 계속되고, 심지어는 계엄령을 내렸는데 소급 계엄령을 내리던 시기였다. 지금 이 시간에 계엄령이 내려졌는데 그걸 오늘 새벽까지 소급적용하는 거다. 명동성당에서 유신철폐 데모한 장준하, 백기완을 사형시키기 위해 그런 수를 쓴 거였다. 그때 '이 나라가 어떻게 되려고 하나' 싶었다. 장준하, 백기완 같은 사람 한두 명 죽어서는 누구 하나 눈 하나 깜짝 안하는 세상이었다. 그때 친구들끼리 '우리나라를 이끌고 간다고 하는 소위 지도층 20여 명 정도를 광화문에서 드르륵 하고 갈겨버려야 정신을 좀 차리지 않을까' 하는 농담 아닌 농담을 하곤 했었다. '웬만한 일이 아니고 아주 큰 일이 벌어져야만 이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지' 싶었던 거다.
예를 들면 아까 말한 인제수 같은 것 말이다. 심청이가 아버지 눈 뜨기 위해서 물 속에 들어가듯이 아주 충격적인 일이 벌어져야 사람들이 뭐라도 느끼지 않을까 싶더라. 그래서 그런 일을 <심청이는 왜 두번 인당수에 몸을 던졌나>에서 벌어지게 한 것인데.. 근데 그게 이제 현실이 되어버렸다. 16살, 17살, 춘향이, 심청이 같은 애들이 전부 물 속으로 들어간 것이지 않나. 실제로. 그런 일이 눈 앞에서 벌어졌고 아직도 그 사건 때문에 이 나라가 꼼짝도 못하고 있는데... 근데 거기서 또 이런 쇼를 한다는 게, 참 재미가 없다. 사실.
(아차 싶다는 듯) 그게 제일 중요한 건데. 그 작품은 그냥 그 해로 끝났어야 하는 거다. 이런 작품이 되풀이되어 공연될 수 있다는 거, 공연횟수도 늘이려고들 하던데.. 그것 자체가 참 슬픈 거다. 아까 말씀 드린대로 그 주인공 친구를 통해 25년 전 작품 속에서는 어떤 긍정적인 흔적을 남기려고 애를 썼는데, 지금은 그런 게 다 증발된 상태로 그려진다. 아마도 이 작품은 그냥 악질만 남아 있는 그런 데서 끝나지 않을까.
이 친구의 좋지 않은 박테리아랄까(웃음), 그게 몸 안에서 확 번져나가는 모습을 이번 작품에서 좀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볼 때에야 비로소 지금 이 시대와 작품의 눈높이와 맞춰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지금은 긍정의 흔적이 남아 있으면 안 될 것 같다. 그런 사람들이 별로 없으니까. 보편적으로 박테리아가 우글거리는 모습들이거든, 다. 우리 몸 안에 좋은 박테리아, 나쁜 박테리아가 거의 같은 수준으로 있다는데 살아 있는 동안에는 좋은 쪽이 승한다고 그러더라. 그런데 우리가 죽자마자 이 나쁜 쪽이 확 번져 나가는 거라고. 우리 사회의 경우 그 나쁜 박테리아가 굉장히 팽창해 있다고 할까. 뭐… 에효. 젊은 사람들의 모습에서 요만큼의 긍정적인 모습도 못 보겠다.
-사회가 발전하지 않고, 자꾸 후퇴하는 느낌이 들고, 사회적인 분위기가 뒤숭숭할 때 젊은 연극인들이 위축되는 것 같다. '도대체 뭘 해야 하지, 연극이 무슨 힘이 있지, 이런 것보다 거리에서 시민으로서 뭔가 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도 하는 것 같고. 오랜 세월동안 연극계에 계시고, 또 인생에서 여러가지 일들 겪으신 입장에서 어떤 조언을 해주실 수 있을지 궁금하다.
▲조언보다도.. 그러니까 이게 종잡을 수 없이 흘러가는 시기인데.. 예를 들어보겠다. 크리스마스 군도에 원자탄 실험을 했을때 그 큰 바다거북이들이 상실한 게 바로 방향감각이었다. 바다로 가야하는 것들이 사막 내륙으로 와서 뒤집어져서 하얗게 뼈다귀만 남았었다. 지금 시대가 그런 모습이다. 도무지 방향 감각이 없다.
어떤 말을 했을 때 많은 사람이 경청할만한 뭔가를 갖춘 어른도 없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와서 뭐라고 말했을 때 사실은 그런 말은 누구든지 할 수 있었는데.. 식자들도 그런 양식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식자들이 다 할 수 있는 말을 그 사람이 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것이 대단한 말처럼 크게 들려왔다. 이건 거꾸로 얘기하면 그 이전에 우리 어른들이 없었다는 얘기다. 로마에 살고 있고, 고향은 아르헨티나인 그런 양반이 한국을 알면 뭘 알겠나. 와서 원칙적인 이야기 몇가지 했는데 그 말이 금과옥조처럼 들렸다 이거다. 그만큼 우리가 헤매고 허둥거리고 있는 거다.
그럴 때일수록 결국..(말을 고른다) 현실로는 현실을 어떻게 교직할 수가 없다. 물에 물타는 거지, 뭐. A라는 쪽에서 말하는 것과, A'라는 쪽에서 말하는 것은 알고 보면 똑같다. 서로는 반대라고 생각하지만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똑같은 얘길 하는 거다. 이 사람은 귀에 걸은 거고, 저 사람은 코에 걸은 것에 불과하다. 어린 친구들이 보면 이건 맞고 저건 틀린 것 같이 보일 수 있는데 어른이 보기에는 서로 다 똑같이 자기 말이 옳다고 얘기하는 것처럼 들린다. 시사, 정치 라디오쇼, 모두 다 그 말이 그 말이다. 말의 일부만 약간 바뀌는 것뿐이고.
이럴 때일수록.. 허구라는 게 뭐냐. 다른 시간, 다른 장소를 갖는 것 아닌가. 그 얘기는 즉, 현실을 더 압축시킬 수 있고. 조그마한 것을 더 확대할 수도 있고, 큰 것을 더 좁혀서 볼 수도 있고.. 그런 게 허구라는 거 아니냐. 맘대로 볼 수 있다는 거다. 재단할 수 있다는 거고. 더 드러나게 하기도 하고, 묻어버릴 수도 있는 뭐 그런 것들. 가령..나는 언젠가 한번 서울을 따뜻한 풍경으로 그려보고 싶다. 서로들 인사하고 걱정하는 그런 모습을 그리고 '이게 서울이다' 라고 얘기하는 거다. <2020년 서울>, 이런 식으로 이름 붙여서. '이랬으면 좋겠다'는 걸 '저거 거짓말이야' 라고 할 정도로 보여주고 싶다(웃음).
그러니까 예술은 허구고, 그렇게 허구의 방식으로 현실을 구제할 수도 있지 않냐 싶은 거다. 허구를 통해 우리는 얼마나 난처한 지경에 있느냐를 보게 되기도 하고. '그림 허구', '음악 허구'도 다 있긴 한데 '연극 허구'만은 살아 있는 인간이 반드시 그대로 나와야 한다. 생체가 나와서 내가 지금 쓰고 있는 말을 쓰고, 옷도 비슷한 거 입고 나와서 연기하고 하지 않나. 그러니까 관객이 소화하기가 좋다. 무대를 보면 사람들은 그냥 '내 거'라고 생각한다. 그게 연극의 힘이다. 관객과 물건이 서로 같은 시간에 극장이라는 조건 속에 조응을 하는 것이다. 그냥 막 직접 호환한다. 2014년 9월은 9월인데 다른 시간, 다른 장소를 만들어서 얼마든지 놀 수 있다. 연극하는 사람들이 가장 훌륭한 무기를 가지고 있는 거다, 사실. 그걸 충분히 활용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 말, 우리 몸짓, 우리 손짓이라는 화두를 오랫동안 품고 살아오셨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우리 것’이 무엇일지 궁금하다. 우리 것에 대한 정의?
▲그 얘기는.. 이렇게 시작해보자. 쇼트트랙 계주하는 우리 '낭자들'을 보면 나는 늘 감탄한다. 5번이나 금메달을 땄다. 한번은 중국애가 반칙을 해서 취소가 되긴 했지만, 어쨌든. 쇼트트랙은 인간이 기구로 움직이는 스포츠 중 가장 빠른 경기라고 하더라. (일어나서 시범 보이기 시작) 엉덩이를 밀어서 힘을 실어주고, 스케이트 날을 이렇게 내밀어서 들어가고. 슬기롭고, 재치 있고. 대담하고, 또 신체 건강한 낭자들이다. 한국의 여인들, 어머니와 할머니들이 그렇게 우수한 분들이기 때문에 이 낭자들이 나왔다고 나는 생각한다. 딸이 됐든 아들이 됐든 제일 우수한 애들이 나오는 게 당연하다(웃음).
그리고 우리에게는 말의 훌륭함이 있다. 쌍모음과 쌍자음까지 다 하면 42개인데 이것들이 조직하는 말들이 엄청나다. 예전에 일본에서 연출했을 때 그쪽 애들은 '배우들이 불어를 하느냐'고 묻기도 하더라. 왜냐면 모음이 많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또 유네스코에서 아프리카 같은 문자 없는 민족의 언어를 문해 인류유산이니까 보존해놓으려고 했는데, 그때 택한 기록언어가 한글이다. 어느 의성어든지 채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종대왕께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그 외에 유구한 역사가 있다. 삼국유사 같은 거 보면 기가 막히게 재미 있는 에피소드들이 많다. 그리고 조선조만 해도 효와 충, 이 두가지 관념만 가지고도 500년 넘게 국가가 유지되지 않았나. 물론 권력을 분산시키지 않으려고 하다보니까 나중에 지진아들이 나오긴 하지만(웃음). 어쨌거나 효와 충, 이 한자 두개만 가지고 가는 지혜로움이 있다. 지난 100년 일본한테 당하고 한 건 대원군하고 민비하고 싸우느라고 50년을 허비해 쇠약해졌다고 치고.. 어쨌든 분단된 이후에도 뭔가 하고 있는 걸 보면 신통한 면이 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론 왜 이렇게 바보들처럼 그러고 있는 지 모르겠다(웃음).
그래서 나는..'네가 쓰고 있는 언어는 글자 없는 사람들의 표준글자다, 너 자신이 굉장히 소중하다, 너 위에 위에 할머니들의 산고 뒤에 너는 태어났으니 너는 예수님 못지 않은 위상이다, 그러니까 너 자신을 존경해라', 뭐 이런 얘기를 하고 싶은 거다. 물론 그만치는 못하지만(웃음). 그래서 우리말, 삼국유사 이런거 들춰보고 그러는 거다.
-작품에 생명에 대한 이야기가 참 많이 등장하기도 한다. 지금 말씀하신 것과 연장선에 있다고 봐도 되나?
▲그렇다. 인간과 인간에 대한 사랑만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우리 할머니들은 까치밥을 남겨뒀었다. 감자, 고구마 캘 때도 다 캐지 않았다. 두더지 잡수라고 남겨뒀다. 그럼 이 두더지들이 손자 며느리 다 불러서 밭을 다 뒤진다. 그 큰 밭이 다 뒤집어진다. 이렇게 해서 흙이 산소하고 만나게 됐고.. 서로 상생한 거다. 방안에도 병풍에 십장생 그려놓고 자연과 함께 한 거다. 담을 높이 세우는 것도 없었다. 기껏해야 탱자나무 심어서 그 사이로 대화하고 했지..
그래서 <DMZ 내사랑> 같은 작품을 쓴 거다. DMZ라는 게 6.25전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만들어진 벨트 아닌가. 거기에는 자생한 것들만 남아 있다. 나는 그런 것들이 남아 있길 바라는 거다. 인간이 얼마나 해충인지, 참견하지 않으니까 저렇게 아름답게 피어난다. 그런 게 본보기가 되기도 한다.
예전에 70년대인가 80년대인가 신문을 보는데 우리나라 산하에 여우가 다 없어졌다는 거다. 그 때 굉장히 나는 충격을 받았다. 우리 할머니들이 옛날 이야기 해줄 때 가장 무시무시하고 재밌는 주인공이 여우 아닌가. 칼 슥슥 갈고, 발라 먹고(웃음). 그 여우가 없어졌다고 하니까.. 큰 이야기가 나 모르는 새에 사라진 거다. 허구가. 그 아름답던 허구의 세계가.
감을 다 따지 않고, 감자를 다 캐지 않는 마음이 있었다. 네발짐승, 날짐승과 같이 그것들을 염려하면서 살아가는 그 넉넉함, 빡빡하지 않은 틈새, 문풍지 같은 것, 이런 지혜들이 있었다는 얘기를 하고 싶다. 지금은 그렇지 않으니까 어린 친구들에게 있었더라는 얘기라도 해드려야 하지 않을까. 그런 조바심을 가지고 있다.
-우리 말, 몸짓을 연구하신다고만 생각했는데 그 이전에 '어떤 마음이 있었다, 태도가 있었다'에 더 방점이 찍혀 있는 듯하다.
▲그걸 담기 위해서는 몸짓이 옛스러워야 하고, 우리 춤이나 가사의 힘이 필요하다. 3.4조나 4.4조를 자주 쓰는데 이것들은 현실의 말과 허구의 말을 분별시키는데 가장 좋은 틀이라고 생각한다. 또 침투효과도 좋고. 고려조부터 시작된 3.4조, 4.4조는 판소리를 거쳐, 김소월의 시에 이르기까지 계속 살아 있지 않나. 이게 살아 있다는 건 우리 정서의 흐름을 옮겨주는데 좋은 구조, 장치, 문법이라는 얘기다. 동시에 허구 세계의 말, 현실과 다른 말이기도 하다.
이런 문법장치들은 말을 겹으로 하게끔 한다. 즉, 필요 없는 것을 다 치우고 한단어 한단어에 이야기를 다 담아야 하니 의미를 겹으로 주게 되는 것이다. 가령, 어떤 여자를 사랑한다고 했을 때 우리 어른들은 쳐다보고 외면하면서 ‘썩을 년’ 이런다(웃음). 썩는다는 건 아름다운 것, 사랑한다는 것과 굉장히 다른 거다. 어떤 의미에서는 죽은 거고. 그런데 이 죽음 쪽의 말을 씀으로써 현실의 말보다 더 지극한 사랑의 말을 한다. 이게 겹이다. 직접화법을 쓰지 않고 에둘러서 표현한다고나 할까. 불교에서도 중이 칫솔질하며 아침에 경을 욀 때 상대편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길 바라는 의미의 경을 왼다. 마치 딴소리 하는 것처럼 하는 알아들을 수 없는 경 말이다. 그런 말들을 쓰다보면 자연스레 현실의 말이 아닌 허구의 말이 생겨난다.
또 우리 옛 옷인 두루마기를 보면 꼭 그 안에 자주색 단을 대곤 했다. 그래서 이렇게 보면 까만색인데 햇빛이나 횃불에 보면 그냥 까만색이 아닌, 빨간색이 돋아 굉장히 그윽하고 안정감 있는 색이 된다. 품위 있고 격조 있게 보이는 겹을 준 것이다.
또 양수양족을 동시에 움직이는 것은 사람을 대단히 활기차게 해준다. 서양인들은 이걸 같이 못한다. 그런데 우리는 (직접 춤사위를 시범 보이기 시작) 이렇게 공연하면 다들 놀랜다. 응축된 말로 격조 있게 하다가 갑자기 팔랑거리고 돌아다니고 하니 이게 굉장히 연극적으로 느껴지는 거다.
제일 좋게 들은 말 중 하나가 독일 브레머에서 셰익스피어 페스티벌에 참가했을 때 들은 말이었다. "우리가 <로미오와 줄리엣>을 극장 안으로 가지고 들어오는 바람에 잊어버렸는데 우리는 작품을 산문화시켰다. 그런데 당신들이 이걸 다시 운문으로 가져왔다”고 하더라. 그런데 사실 셰익스피어식 운문으로 한 건 없다. 내가 다 고쳐쓴 건데 그게 3.4조, 4.4조라 그 사람들이 들을 때는 운문처럼 들린 거다(웃음). 운문을 찾아줬다는 평은 에딘버러에도 들었다. 비록 우리 말이지만 셰익스피어를 관객에게 운문으로 들려주고 싶다는 욕심이 있다. 조금만 더 손질을 하면 운문이 아니라 뮤지컬처럼 들리게도 할 수 있는 거다. <템페스트 소리판>, 뭐 이런 거다.
-극작과 연출 모두에서 인정 받고 있다. 본인 스스로는 둘 중 어디에 더 방점을 찍고 있는 지 궁금하다.
▲우리는 시 쓰는 사람이 소설 쓰면 안 되는 것처럼 분야를 나누는데.. 사실 희곡은 글 쓰는 사람들이 맨 나중에 하게 되는 장르다. 희곡은 말을 통해 순간을 포착해내는 장르다. 그 말이 글이랑 다르게 또 겹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연조가 되어야 쓸 수 있고 완성시킬 수 있다. 그런데 말 하는 법을 알려면 그냥 읽으면 안되고 무대에 서서 관객과 직접 부딪혀 봐야 한다. 그렇게 해 봐야 이 말은 관객한테 잘 가는구나 혹은 이 말을 할 때 관객은 멍 하게 있구나 하는 걸 알 수 있다. 그래서 셰익스피어도 몰리에르도 다 배우를 했던 것이다. 연극 현장에서 숨쉬는 것이 중요하다. 또 무대에서는 탁자도 말이 될 수 있고, 번개 치는 것도 말이 될 수 있다. 모든 것이 엄청난 말이 된다는 것을 스스로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극장에 들어가야 한다. 나도 말을 쓰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연출도 하게 되고 그런 거다.
또 하나는 나한테 충분한 시간이 없어서 연출과 극작을 겸하게 된 것도 있다. 극단을 이끌면서 재정적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져서 마치 안식년 갖듯이 한 달 정도는 글만 쓸 수 있다든지 하면 좋은데.. 그런 여유가 있으면 또 모를까, 25~40명의 식구들로 이뤄진 극단을 끌고 가려니까 이 친구들을 이끌고 갈 요인이 있어야겠더라. 그 요인이 곧 작품이고 연습이다. 그래서 계속해야 한다. 뭐, 처음에 시작할 때는 작품의 완성도가 절반도 안된다. 3분의 1 정도 완성된 대본을 가지고 연습을 시작한다. 연습하면서 계속 대본이 붙는 거다. 그러니까, 작품을 만들어가면서 쓰게 된 데는 시간이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는 얘기다. 그래서 작품이 빈곤한 거다(웃음).
-선생님 연극에 대해 '논리를 초월한다, 생략과 비약이 많다'는 이야기들을 한다. 그런데 글을 쓰고 연출을 할 때 사실 어느 정도는 논리에 기대어 안전하게 가고 싶다는 마음이 한 켠에 생길 것 같은데. 과감함 혹은 자신감이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하다.
▲음, 비유를 하자면.. '이것이 석탄광이다'라고 하면 곡괭이질을 시작하게 된다. 어제까지는 분명히 석탄이 나왔다. 그런데 갑자기 오늘 노란 게 보이는 거다. '어, 이거 구리 아니야?' 싶으면 또 막 구리를 캔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다. '석탄 캔다고 난리치더니 왜 또 구리야' 라고. 그런데 또 조금 있으면 납이 나오기도 한다(웃음). 이 석탄, 구리, 납을 다시 잘 재분배해서 작품을 만들면 좋은데 너무 좋아서 허겁지겁, 놓치지 않으려고 막 따라 간다. 정리는 뭐, 나중에 관객이 하든지(웃음). 이 순간을 놓치면 이걸, 이 세계관을 옮길 수 없다는 생각이 있다. 결과가 어찌됐든. 그래서 나는 막 따라 간다.
작가들 중에는 두 부류가 있다. 어떤 사람은 '동대문을 가겠다' 하면, 어떻게 해서든지 다 동대문을 가게 만들어 놓는다. 그런데 '동대문 가겠다' 하고 대로로 가다가 '아, 심심해' 라고 하면서 골목길로 가는 사람도 있다. 가다보면 애들이 골목길에서 고무줄을 하고 재미있게 놀고 있는 거다. 그걸 보고 애들 고무줄 끊고 재미있게 놀다보면 동대문은커녕 사방이 깜깜해져 있다. 그러고 나중에 보니까 동대문이 아니라 남산에 가 있는 식이다. 그러고서 작품이 끝난다. 결국 홀려서 남산에 가는 거다.
그때그때 일어나는 일 중 좋아보이는 것을 선택한다. 앞에 세가지 길이 있다면 그 중 좋아보이는 걸 선택한다. 그러고서 또 세가지 길이 나온다고 하면 또 그중 좋아보이는 걸 고른다. 어떤 것을 위해 특정 길을 선택해 가지 않는다. 그러다보니까 지그재그로 가게 되고 나중에 보면 어딘가에 가 있긴 하는 거다. 그렇게 해서 손해보는 경우가 비논리적이라는 평을 듣는 것이다. 하지만 또 생생한 것들은 이런 선택들을 통해 건져지지 않나 싶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미완성인거다. 허구 자체가 미완성인 것 아닌가. 현실을 모사하는 거니까. 현실 자체가 꿈틀거리는데…
그런데 허구에는 한 가지 장점이 있긴 하다. 한 번 잘 정해지면 이 세상이 뒤집어져도 변하지 않는다. 450년전 셰익스피어가 지금도 공연되는 것을 보라. 당대를 위해 어떤 쪽으로 방향을 틀어놓느냐, 무엇에 더 천착하느냐에 따라서 작품이 조금은 흔들리지만.. 그 원점은 그대로 있다.
-올해는 이미 일정이 빽빽하게 잡히신 것 같고..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다. 이미 많은 걸 이루셨지만 말이다.
▲얼마 전에 어떤 어머니가 어린 세 자녀를 버리고 남의 아파트로 간 일이 있었지 않나. 아프리카에서도 그렇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서도 그렇고 전혀 무해한 아이들, 그러니까 이 세상의 때가 묻지 않았고 어떤 죄도 짓지 않은 어린 애들이 너무 많이 죽고 다치고 있다. 그런 걸 보면 어른들이 대단히 큰 것을 상실하고 있는 것 같다. 뭔가를 간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이라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정신이 흐려진거다. 슬픈 이야기이지만 그걸 좀 어떻게라도 얘기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올해 하려고 했는데 시기도 그렇고 내년 초에나 될 것 같다. 아무 힘도 없는 아이들을 무자비하게 다룬다는 게 나는.. 마음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