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게 크게 작게 작게
페이스북 트윗터
(이상수의 한국철학사 28화)주희의 주자학과 조선 성리학의 성립
오늘날도 주희의 관점 답습…정약용 작업 넘어서야
입력 : 2023-10-16 오전 6:00:00
조선조의 한국철학사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주자학(朱子學)이라는 송나라의 주희(朱熹)가 만든 성리학에 대한 약간의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본격적으로 조선 성리학으로 넘어가기 앞서, 주자학에 대해서 간단하게 말씀드리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조선이 받아들인 유학은 공자 시대에 만들어진 원시 유학이 아니라, 공자로부터 1500년 쯤 뒤에 등장한 송나라 때 주희(朱熹, 1130~1200)가 재해석한 이른바 ‘신유학’인 ‘주자학’입니다. 주희가 집대성했기 때문에 ‘주자학’이라고도 불리는 이 학문은, 우주와 인간의 본성[性]과 이치[理]를 다루었기 때문에 ‘성리학(性理學)’이라고도 불립니다. 좀 더 거시적인 시간대에서는 송나라와 명나라 때의 학자들이 ‘이치[理]’에 대해 다룬 학문이라는 뜻에서 ‘송명리학(宋明理學)’이라고도 불립니다. 이 글에서는 주희가 집대성한 신유학은 ‘주자학’, 유학을 시대적으로 나누어 검토할 필요가 있을 때는 ‘송명리학’, 조선에 들어와 조선의 선비들이 탐구한 내용은 ‘조선 성리학’ 혹은 ‘주희 성리학’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공자의 유학과 주희 성리학은 같은 물건이 아니고 전혀 다른 물건입니다. 《논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공자의 태도는 고대에 만들어진 예법 질서를 통해 모든 신분의 사람들이 신분질서를 자기 내면의 규범으로 받아들여 스스로 최선을 다하는 사회를 꿈꾸는, 배움과 닦음과 실천을 중시하는 소박하고 신중한 인간적 고전주의자의 모습입니다. 
 
주자학의 창시자인 북송의 주희. 사진=필자 제공
 
그러나 주희가 해석한 공자는 그런 소박한 현자가 아니라, 본성[性]과 이치[理]에 목숨을 바치라고 강요하는 고지식하고 비타협적이며 폐쇄적이고 완고한 정통주의자로 그려집니다. 원시 유학은 부작용이나 해독이 심각하지 않은 비교적 개방적인 사유이지만, 주희가 완성한 송명리학(宋明理學), 이른바 ‘주자학(朱子學)’은 일방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매우 위험한 사유 형태입니다. 주희는 결코 좋은 고전 해석자가 아닙니다. 3000여 종에 이른다는 《논어》에 대한 역대 주석서 가운데 중국과 한국 등 동아시아에서 압도적으로 가장 많이 읽힌 주석서는 주희의 《논어집주(論語集註)》입니다. 주자학이 원(元)나라 이후 중국과 조선에서 과거시험 문제로 출제되는 ‘관학(官學)’이 된 덕분입니다. 조선에서 과거 시험 공부하는 서생 가운데 주희의 《논어집주》를 읽지 않은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논어》를 읽으면서 공자의 본디 모습을 읽어내는 데 가장 심각한 걸림돌이 되는 저서는 바로 이 주희의 《논어집주》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주희는 뛰어난 학자임에 틀림없고, ‘사서집주(四書集註)’는 그의 평생 최고의 역작으로 꼽히지만, 그는 공자(孔子)라는 인물의 맨얼굴과 만나기 위한 문헌으로서 《논어》를 다룬 게 아니라, 《논어》를 자신이 집대성한 성리학(性理學)의 경전으로 만들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주석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주석’ 작업이라기보다, 제가 보기에는 ‘왜곡’ 혹은 ‘개작’이었지만. 주희의 풀이는 잘 가다듬어져서 간결미가 있고 문장도 깔끔하고 논리 정연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논어》와 공자에 대한 진실한 정보만을 담고 있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그는 위대한 사상가였던 만큼 자기 사상을 공자와 《논어》에 투영하여 덧씌움으로써 자신의 위대한 만큼 공자와 《논어》를 왜곡했습니다. 
 
“위대한 인물은 늘 위대한 실수를 저지릅니다”라고 말한 영국 철학자 카를 포퍼(Karl Popper, 1902~1994). 사진=필자 제공
 
오스트리아 태생의 영국 철학자 카를 포퍼(Karl Popper, 1902~1994)의 말처럼, 위대한 인물은 늘 위대한 실수를 저지릅니다. 그는 고증에 대해서는 전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주희는 고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이치를 다루는 것 이외에 고증 또한 한 가지 종류의 공부이지만, 얻는 바는 얼마 되지 않으면서 들어야 하는 공은 적지 않습니다. 이 전에 나 또한 스스로 이를 좋아한 적이 있는데, 이건 하나의 병폐입니다. 그러나 또한 아무 도움도 안 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朱熹, <答孫季和>, 《朱熹集》卷五十四, 成都: 四川敎育出版社, 第5卷, 2690쪽) 이런 발언을 보면 주희는 고증을 ‘병폐’라고까지 생각했고, 사실 확인을 위한 기초 학문으로서의 중요함을 그다지 예민하게 인식하지 못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문헌 고증 방법을 제대로 배우지도 않았기 때문에, 사실 확인(fact check)의 관점에서 볼 때 동의하기 어려운 대목을 곳곳에 수없이 많이 남겼습니다. 그는 또 《논어》의 곳곳을 공자의 본디 생각과는 전혀 무관한 ‘본성[性]’과 ‘이치[理]’에 관한 논의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주희가 《논어》에 나오는 지시 대명사인 ‘이[此]’와 ‘이것[是]’ 등을 일쑤 ‘이치[理]’로 풀이했습니다는 사실은 이미 진천상(陳天祥, 1230~1316) 등 전통시대의 주석가들이 널리 지적한 바 있습니다. 역대 《논어》 주석서들을 집대성한 가장 방대하고 정밀한 《논어》 주석서로 꼽히는 《논어집석(論語集釋)》을 쓴 청말민국초에 활동한 문인 청수더(程樹德, 1877~1944) 선생은 주희의 주석 작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평하고 있습니다. 
 
주희의 성리학 관점에서 《논어》를 주석한 행위를 비판한 민국초의 학자 청수더(程樹德). 사진=필자 제공
 
주자(朱子, 주희)는 사서(四書)에 풀이를 달면서, ‘그것[之]’, ‘이[斯]’, ‘이것[此]’ 등의 글자를 만나면 모두 ‘이치[理]’라는 글자로 그 실질을 채웠습니다. 옛사람들이 말하기를, 《대학(大學)》 원문[경(經)]에 대해 주자가 풀이글[전(傳)]을 보충한 뒤 이미 송나라 유학자들의 책으로 바뀌어서 공씨(孔氏, 공자)의 책이 아니게 되었다고 했으니, 그 말에 진실로 개탄함이 있었습니다.[朱子注四書, 遇有‘之’、‘斯’、‘此’等字皆以‘理’字塡實之。昔人謂《大學》經朱子補傳後, 已爲宋儒之書, 而非孔氏之書, 誠有慨乎其言之也。(程樹德, 《論語集釋》[北京: 中華書局, 1990], 404쪽.)] “송나라 유학자들의 책으로 바뀌어서 공씨(孔氏, 공자)의 책이 아니게 되었다”는 말은, 주희가 원시 유학의 경전을 송명리학의 경전으로 개작했다는 뜻입니다. 또 주지주의적인 주희의 성향은 가령 공자가 수제자인 안회(?回)의 죽음에 직면했을 때, 그가 인간적으로 비통해하는 대목에 대해 “자신의 가르침이 전해지지 않을 것을 슬퍼한 것입니다[悼道無傳]”라고 주석함으로써, 공자가 학문에 어떤 해괴한 강박을 지닌 매우 이상한 사람인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어버렸습니다. 지은이는 주희를 따라 《논어》를 읽어서는, 도무지 공자와 《논어》의 본디 모습을 읽어내기 어렵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지은이는 조선 성리학자들의 가련한 ‘강박’과 주희의 ‘강박’이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한국에서 나온 《논어》 번역서는 대략 500종쯤에 이를 것으로 보이는데, 99.9%의 절대 다수가 주희의 풀이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건 매우 유감스러운 사태입니다. 주희 이전의 고주(古注)로는 하안(何晏), 황간(皇侃), 형병(刑柄)의 주석이 오늘날까지도 전해오는데, 이를 보면 주희의 억지 풀이와는 사뭇 다릅니다. 주희 이전의 고주를 참고해서 《논어》를 옮긴 버전은 저의 스승이신 이강수 교수의 번역본이 유일합니다. 이 교수 이전에는 다산 정약용 선생이 이런 작업을 했습니다. 다산은 유배지 강진에서 50대 중반의 나이에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를 완성했는데, 여기서 ‘금주(今註)’란 주희의 주를 말하며, ‘고주(古註)’란 하안, 황간, 형병 등 주희 이전에 활동했던 한나라, 위진시대 학자들의 주를 말합니다. 다산 또한 주희의 나쁜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주를 참고하여 주희와 다른 시야를 확보하고자 했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주희의 주석만을 되뇌인다면, 이백년 전 정약용 선생의 작업에서 뒤로 물러나는 꼴이 됩니다. 세상에는 좋은 사상이 있고 나쁜 사상이 있습니다. 인문학자는 매일 사상투쟁을 벌이는 사람입니다. 인문학자가 아니더라도, 모든 사람들이 매일 어떤 방식으로든 사상투쟁을 벌입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누구를 찍을 것인가를 두고 벗들과 언쟁을 벌일 때도 결국은 사상투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류는 이 사상투쟁에 의해서 자기중심주의와 패권주의의 해독에서 조금씩 벗어났습니다. 
 
주희의 나쁜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주를 참고하여 주희와 다른 시야를 확보하고자 해서 《논어고금주》를 저술한 다산 정약용. 사진=필자 제공
 
단언하건대, 주희 성리학은 좋은 사상이 아닙니다. 공자 시대에만 해도 이른바 ‘이단(異端)’에 대한 배척의 강박이 없었습니다. 《논어》에 ‘이단(異端)’이라는 표현은 한 번 나오는데, 이는 오늘날 말하는 ‘이단’의 뜻이 아니라, ‘두 가지 끄트머리[兩端]’라고 해석하는 게 맞습니다. 초횡(焦?)의 《논어보소(論語補疏)》는 《한시외전(韓詩外傳)》에서 “서로 다른 부류를 나누어 서로 해치지 않도록 하고, 두 가지 실마리의 질서를 잡아 서로 어긋나지 않도록 합니다[別殊類使不相害, 序異端使不相悖。]”는 말을 따와, ‘이단’이란 각각 서로 다른 실마리를 말합니다 라고 보았습니다. 초횡을 따르면 ‘이단’이란 두 가지 실마리, 곧 ‘양단(兩端)’과 같은 뜻이 됩니다. ‘이단’에 대한 배척은 제자백가의 사상투쟁이 가열된 전국시대에 활동한 맹자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봐야 합니다. 맹자는 묵적과 양주의 학설을 배척하고 극렬하게 공격하면서, 이단 배척의 길을 열었습니다. 주자학이 전래된 뒤에는 유학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유학의 자기중심주의적 시야를 넘어서는 보완 개조 작업에 더해서, 주자학이라는 훨씬 더 패권주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중화중심적인 해악이 많은 사유를 극복해야하는 과제가 더해졌습니다. 
 
이황과 이이의 사단칠정 논쟁은 주자학의 정착과 연구의 활성화에는 기여했지만, 주자학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한계를 넘어서서 새로운 시야를 확보하는 데에는 전혀 기여하지 못했습니다. 주자학의 정통주의는 논쟁이 당쟁으로 번지도록 했고, 이론 싸움이 권력투쟁과 연결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조선 중기를 지나면서 관학의 지위를 획득한 주자학의 독선적 시야에 도전하는 선비들도 등장했습니다. 김만중, 윤휴, 박세당 같은 이들이 그들입니다. 당쟁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한 탕평의 논리도 등장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학문 체계와 사회 개혁과 새로운 세계관을 만들어내려는 실학자들이 등장했습니다. 주자학이라는 숨 막힐 정도로 빈틈없이 꽉 짜인 사유가 관학의 지위까지 차지했음에도 이에 도전해 사유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 고투한 우리 선배들 또한 꼬리를 물고 등장했습니다. 이제 그들의 자취를 더듬어 가보기로 하겠습니다. 흔히 고려 말기 성리학은 안향에 의해 수입되어 백이정 — 우탁 — 이제현 — 이색 — 정몽주 — 정도전 — 권근 등의 계보를 이룬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국철학사에는 이 계보에는 들어가지 않지만 성리학 수입 초기에 두 명의 걸출한 기(氣) 철학자가 등장합니다. 이들에 의해서 조선 시기의 한국철학사는 매우 풍요롭게 시작합니다. 이 글에서는 순서대로 이 기철학자 두 명인 매월당 김시습과 화담 서경덕에 대한 이야기로 조선 시기의 한국철학사 이야기를 이어가려고 합니다.
 
■필자 소개 / 이상수 / 철학자·자유기고가
2003년 연세대학교 철학 박사(중국철학 전공), 1990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 2003~2006년 베이징 주재 중국특파원 역임, 2014~2018년 서울시교육청 대변인 역임, 2018~2019년에는 식품의약품안전처 대변인 역임. 지금은 중국과 한국 고전을 강독하고 강의하고 이 내용들을 글로 옮겨쓰는 일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권익도 기자


- 경제전문 멀티미디어 뉴스통신 뉴스토마토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