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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러시아 재발견 12화)기차 안 풍경, 지속과 변화
2019-12-09 08:00:00 2020-10-12 15:59:16
어느 크리스마스 날 저녁, 낫과 망치와 별이 그려진 소련의 국기가 내려가고 러시아의 삼색 국기가 올라갔다. 지난 세기 인류는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을 경험했지만 그 세기가 저물 무렵 이 첫 실험의 실패도 목격해야 했다.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USSR)이 사라지고 새로운 러시아가 역사에 등장했을 때, 타국의 사람들은 충격과 호기심으로 이 세계사적 사건을 지켜보았고 러시아인들은 혼돈과 기대, 희망과 절망의 시간 속에 던져져 있었다. 강산이 두세 번 바뀔 동안 커다란 변화를 겪어온 러시아인들, 그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기차 속 동행
 
횡단열차 안의 기본 풍경은 잠, 식사, 대화의 3대 필수 요소에, 독서, 글자 맞추기 퍼즐, 카드 게임 등이 플러스알파로 등장한다. 지하철 안 풍경이 신문이나 책을 읽던 모습에서 스마트폰 보기로 바뀐 것처럼, 2019년의 기차 안도 독서보다는 스마트폰이다. 젊은 세대라면 특히, 전자 기기에 미리 저장해 온 영화를 보거나 전화기로 게임을 하는 모습도 눈에 띈다. 여러 날을 ‘기차’라는 제한된 좁은 공간에서 지내다 보니 시간이 갈수록 잠자는 시간이 늘어난다. 몸을 펼 수 없는 3등칸(플라츠카르트)의 2층 침대 자리는 더욱 그렇다. 계속 누워 있어야 하니 낮에도 자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
 
기차 안에서 '나르듸'(주사위 놀이) 보드 게임을 하는 사람들. 사진/필자 제공
 
나는 바이칼 호수 서남단에 있는 슬류쟌카(슬류댠카)까지 가는 길이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처음 탔던 20대 때나 50대가 된 지금이나 나는 2층 자리를 택한다. 낮 시간대 1층 자리는 식사도 해야 하고 함께 앉아 가야 하니 관례적으로 ‘공용석’이 되는데, 쉬고 싶을 때 아무 때나 누우려면 2층이 제격이다. 2층 승객은 아래로 내려와 앉았다가 1층 자리의 주인이 쉬게끔 눈치껏 위층으로 올라간다. 내 맞은편 2층에는 만 16세의 여고생 또마가 있고 바로 밑 1층에는 류드밀라(류다) 씨, 그녀의 맞은편 1층 좌석에는 발렌티나(발랴) 씨가 어린 손자와 함께 앉아 있다. 
 
1992년에서 1993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처음에 탔던 횡단열차의 4인실(쿠페)에는 할아버지와 손주가 있었다. 나는 손주인 맞은편 2층의 어린 소년에게서 ‘바보’라는 카드놀이를 배우고 나의 러시아어 발음을 교정했다. 이번에는 또마로부터 26년 간 잊었던 카드놀이 ‘바보’를 다시 배우고 그녀의 입시 준비 얘기를 듣는다. 둘 다 교사 출신이자 연금수령자인 발랴, 류다 씨는 은퇴 후 ‘아이 돌보기’로 생활비를 보충한다는 공통점이 있는데다가, 류다가 계속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해 조곤조곤 대화가 끊이지 않는다.
 
기차 안 카드 놀이는 예나 지금이나 보편적이다. 함께 ‘바보’ 게임을 하는 중인 또마(왼쪽), 류다(가운데), 필자. 사진/필자 제공
 
기억과 일상 속의 역사적 시간
 
류다와 발랴 씨는 연해주와 아무르 지역에 대한 얘기부터 가족과 아이 돌보는 일, 교육 환경, 심지어 물고기에 이르기까지 대화의 주제가 종횡무진 다양하다. 류다가 교사 시절 학교에서 실시하던 테러 행위 대비 훈련에 얽힌 경험담을 풀자, 고등학생인 또마도 그와 관련된 어렸을 때의 기억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학교에서 테러 대비 훈련을 실시한 게 언제부터인가요?” 내가 끼어들었다. “체첸전쟁 때부터지요.” 류다 씨의 답변이다. “아이들은 분명히 알고 있어요. 경보음이 울리면 즉시 일어나서 교사 뒤를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가지요. 그리고 곧장 운동장으로 가는 거예요.” 
 
제1차 체첸전쟁(1994~1996) 후 1999년에 재개된 제2차 전쟁의 대규모 전투들은 2000년 4월 말을 기점으로 일단락되었지만, 체첸 무장 세력의 게릴라전과 테러 행위, 러시아군의 반격과 보복은 2009년까지 지속되었다. 2002년 10월 23일~26일 체첸 반군이 모스크바의 두브로브까 극장센터에서 인질극을 벌여 많은 사망자를 낳았는데, 정부의 공식 발표로는 130명, 사회단체 ‘노르드-오스트’(당시 극장에서 공연 중이던 뮤지컬 제목)의 조사에 의하면 174명으로 알려져 있다. 
 
2004년 북오세티아 공화국의 베슬란 1번 학교 체육관에서 살해된 인질 희생자들의 사진. 사진/위키미디어 커먼스
 
세계를 더욱 경악에 빠뜨린 인질 사건은 2004년 9월 1일~3일 러시아 연방 북오세티아 공화국 베슬란 시의 1번 공립학교 개학식 현장에서 일어났다. 학생, 학부모, 교사 등 1100명 이상이 체첸의 이슬람 과격파에 의해 인질로 잡힌 사건이다. 의문의 폭발사고와 화재, 총격전으로 총 334명이 사망했는데(후에 사망한 부상자 포함), 그 중 1세~17세 사이의 어린이/청소년이 186명이나 된다. 또한 783명 이상의 부상자를 낳아 많은 이들이 여전히 고통 받고 있다. 이 참사로 인해 체첸 반군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고 러시아 진압부대의 과잉진압과 미숙한 대처도 비판받았다. 
 
고등학생 또마는 당시 두 살쯤이었을 테니, 몇 년 후 학교에서 테러 대비 교육을 받고 그것을 기억하는 것도 자연스러우리라. 물론 교사로서 훈련을 시키는 입장이었던 류다나 발랴도 마찬가지일 터. 그것은 일상이었고 이제 기억이 되었다. 그리고 그 안에 역사의 시간이 들어 있다. 잠시 후 소련 시절에 대한 기억도 동행자들의 대화 속으로 들어온다. “전에 생생한 역사 얘기를 해 줄 사람들이 있을 땐 그 얘길 안 들었어요. 이제 당시 얘기를 들으려 하니 다들 세상을 떠나고 없네요.” 발랴 씨의 말에 몹시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인 이유는 오래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나서이다. 개인의 일상이 민족의 역사이던 시절,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시절을 겪으신 아버지의 경험담을 20대인 나는 묻지 않았다. 이제 생생한 증언의 산 역사를 듣고 싶으나 아버지는 계시지 아니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건너편 쪽에서 영어로 대화하는 소리가 계속 들려 바라보니 앳돼 보이는 한국인 여학생 두 명과 베트남 여학생 한 명의 얼굴에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우리 나이로 스물두 살 동갑내기인 시현 씨와 하림 씨는 중·고등학교 친구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기 위해 남양주에서 날아왔다. 시현 씨는 외식조리경영 전공으로 대학을 졸업했고 하림 씨는 정치외교학과 3학년이다. 이 여행을 위해 부지런히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이 두 친구가 횡단열차에 끌린 이유는 무엇일까?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을 기록하는 중인 하림 씨(왼쪽)와 시현 씨(오른쪽). 사진/필자 제공
 
“횡단열차가 그 나라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수단이라고 생각했어요. 러시아 현지인들과 함께, 동화되어 생활할 수 있다는 점이 크게 와 닿았고요(시현).” 그런데 덧붙이는 이유가 더 인상적이다. 열차 안이라는 제한된 상황, 행동반경이 넓지 않아 제한되는 조건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그런 생활이 절실했다”는 것이다. 졸업 후 찾아온 ‘여러 가지 잡생각’을 떨치기 위해 횡단열차를 탔던 그녀는 여행에서 얻은 좋은 에너지 덕분인지, 귀국 후 케이터링 회사에 취업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 좋은 에너지에는 시현 씨가 느낀 “무뚝뚝해 보이지만 정이 넘치는 러시아인들”의 마음씀씀이가 담겼을 것이다. “처음엔 정말 무표정으로 웃지도 않는데, 외국 사람들이 허둥지둥하니까 와서 이렇게 저렇게 하는 거다 도와주고 쿨하게 자기 할 거 하는 게 정말 재밌었어요(시현).” 나중에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시현, 하림과 이르쿠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동행한 한 가족이 새벽녘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 지하철역 문이 열릴 때까지 함께 기다리고 심지어 교통카드까지 사 주고 헤어졌다 한다. 1993년 1월 어느 새벽 모스크바에 다시 도착했을 때, 기차 안에서 며칠을 함께 보낸 러시아인 가족이 지하철 표까지 끊어 내 손에 쥐어주고 돌아서던 모습과 얼마나 흡사한가! 2019년 같은 친절을 경험한 이 두 친구는 몰래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고백했다.
 
남은 것, 사라진 것, 바뀐 것
 
기차 안 풍경에서 대화는 여전하지만 예전보다 적어지고 덜 활기 띤 느낌도 있다. 무엇보다도 싸가지고 오는 음식물이 많이 바뀌었다. 지루한 시간을 죽이면서 해바라기 씨를 까먹던 모습이 사라졌고, 빵과 버터에 치즈, 깔바사(소시지 류), 훈제 생선, 오이 절임 같은 것을 푸짐하게 싸와서 나눠 먹던 모습도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대신, 각자 인스턴트 라면에 물을 붓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한번쯤은 열차 안에서 만드는 식사 메뉴 중 소박한 것으로 골라 시키기도 한다. 
 
기차역 철로 옆에는 집에서 만들어 온 빵을 파는 사람들이 가끔 보인다. 사진/필자 제공
 
바뀐 것은 또 있다. 26년 전 기차는 역에 좀 오래 정차할 때마다 열차 안으로 사람들이 올라 타 각종 물건을 팔았다. 거기에는 직접 만든 음식들뿐만 아니라 집에서 쓰는 각종 공구에 별별 잡화가 다 있었고, 심지어 긴 겨울장화도 팔아서 기억에 생생하게 남았다. 이제 그런 정겨운 풍경은 더 이상 볼 수 없다. 기차 안에 들어오지는 못하고 철로 옆에서 직접 만든 빵이나 과일을 파는 이들이 드문드문 보이지만 예전만큼 많지는 않다. 큰 역들에는 프랜차이즈 체인으로 보이는 끼오스크(간이매점)들이 들어서 있다. 열차 안 식사 풍경도, 바깥의 정차역 풍경도, 정과 멋이 줄어들고 있다.
 
예전과 달리, 승객들은 정차하는 기차역의 플랫폼에 설치된 끼오스크(간이매점)에서 물건을 산다. 끼오스크에는 식품 외에도 여러 잡화가 보인다. 사진/필자 제공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percepti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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