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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기획2050)⑨포용국가 비전과 글로벌 트렌드 2050
가장 절실한 것은 일자리 위기에 대한 '회복탄력성' 키우기
역량 증진을 위한 방법론은 사회투자정책과 사람중심 경제
2018-11-26 07:00:00 2018-11-26 07:00:00
한국의 진보와 보수 중 2050년까지 국가를 운영할 능력이 있는 쪽은 어디일까. 30년 이후 국가비전으로 보면 진보 쪽 손을 들어 줄 수밖에 없다. 진보에서는 1960년대 이후 처음으로 제대로 된 자생적 국가론이 만들어지고 있다. '포용국가론'이다. 1997년 국민의 정부 이후 진보진영에서는 학계와 정치계 등을 중심으로 발전국가에 대한 대안 모색이 꾸준히 진행됐다. 1999년부터 제기된 '생산적 복지'는 기초생활보장제도를 도입하게 했다. 참여정부에서는 앤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에 나온 '사회투자국가론'을 한국에 적용하려고 했다. 당시만 해도 한국의 진보는 자체 이론보다는 서구의 진보 담론을 한국 상황에 맞춰보려는 시도를 해왔다. 따라잡기(Catch-up)였다. 그런 시도와 한계, 시행착오를 겪으며 한국의 진보는 비로소 스스로의 힘으로 포용국가라는 비전을 만들어 내고 있다.
 
한국형 자생적 국가론 '포용국가'…발전국가론 대안

반면 보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남긴 경제발전의 강한 기억 탓에 변화의 능력을 잃고 새 정치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정치는 이해관계보다 시대를 이끌 생각의 힘에 승패가 좌우된다. 이미 1930년대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세상은 경제학자와 정치사상가의 아이디어가 지배한다"며 시대를 꿰뚫는 통찰을 보여줬다. 그는 "경제학자와 정치사상가들의 아이디어는 옳고 그름을 떠나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것보다 더 강력하다. 사실 세상은 그 밖에 다른 어떤 것에 의해 지배되고 있지 않다. 어떤 지적인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있다고 믿는 실무가들조차도 이미 고인이 된 어떤 경제학자의 노예"라고 말했다. 케인스는 한 발 더 나아가 "빠르든 늦든, 선에 대해서든 악에 대해서든, 위험한 것은 사상이지 기득권익이 아니다"고 일갈했다. 한국의 보수가 가진 정책과 아이디어는 1960년부터 김영삼 정부까지 이어진 발전국가론이다. 그 시초는 1960년대 이한빈 교수가 제시한 '발전적 시관론(時觀論)'이지만, 실제는 전후 일본 경제발전의 사령탑인 경제산업성(당시 통상산업성)을 연구한 찰머스 존슨에서 시작됐다. 앨버트 허쉬만의 불균등 성장론과 수출산업 육성, 발전관료제 등을 정책패키지로 하는 발전국가론은 1970년대를 거쳐 한국 보수의 국가 모델로 정착했다. 하지만 산이 높으면 그늘도 짙어지는 법. 보수는 그 옛날 산업화의 성공신화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과감한 자기 변화에 실패했다. 진보의 포용국가론에 맞설 보수만의 국가론을 만들지 못한다면, 케인스의 말처럼 기득권익이 아니라 정책과 아이디어에서 패한다면, 한국 보수는 새로운 희망의 근거가 될 수 없다.
 
로벌 산업구조 변화의 대안으로 국내에서는 포용국가론이 대두된다. 포용국가의 핵심은 개인과 기업, 공동체, 국가의 역량을 증진하는 데 있다. 역량 증진을 위한 방법론은 사회투자정책과 사람중심 경제다. 사진/언스플래시

한 사회에서 자생력을 갖는 국가론, 현실 속에서 작동하는 국가론이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어느 학자의 책상에서 후딱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하나의 담론이 주류로 자리 잡기까지 통상 3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한국의 발전국가론조차도 1960년대 이후 서서히 진화해 1980년대에 와서야 하나의 국가론으로 정형화됐다. 진보가 포용국가론을 현실정치에서 작동 가능한 국가론으로 만들고 제대로 모양을 갖추어 가는 데도 30여년의 세월이 걸릴 것이다. 그 30년 이후가 바로 2050년이다. 지금 진보는 포용국가 아젠다를 2018년 가을부터 본격화하고 있는데, 문재인정부를 거치면서 자리를 잡아 갈 것이다. 그리고 포용국가론은 또 하나의 생명체처럼 자체 진화를 할 것이다.

영국의 보수와 진보가 보여준 국가 모델 논쟁 과정은 한국 정치에도 통찰을 제시한다. 1800년대 자유주의자들인 휘그당은 토지에 기반한 귀족 대신 향신(鄕紳)과 상공업자 중심의 새 국가론을 모색했다. 그들은 천년 공화정 '베네치아 모델'에서 영국의 미래를 발견, '국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자유주의자들은 휘그당과 거기에서 이어진 자유당까지 오면서 1830년대부터 1870년대까지 집권했다. 벤저민 디즈레일리로 대표되는 보수당도 간헐적으로는 집권했으나 사실상 19세기 중반은 자유당의 시대였다. 하지만 1870년대 이후 유럽이 제국주의의 길로 접어들자 영국 정치도 변화를 맞았다. 디즈레일리의 '수정궁 선언' 이후 진보적 보수주의(Progressive Conservatism)가 대두됐다. 보수당은 보수 귀족의 이해관계를 넘어 경제여건이 열악한 최하층민에도 관심을 쏟았고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두 번의 세계대전을 거치는 동안 영국은 보수주의의 시대였다. 영국의 보수와 진보가 각자의 담론을 갖고 30여년을 주기로 번갈아 집권한 데서 확인되듯 한 국가의 정치 담론은 30년의 진화 과정을 거친다.

노르딕 복지국가와 결이 다른 한국의 포용국가론

보다 전형적 사례는 스웨덴 등 노르딕 복지국가다. 1920년대는 세계적으로 수정자본주의가 새 담론으로 정착한 시대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뉴딜정책이 자유방임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유명하지만, 스웨덴 등에서는 그보다 앞서 사회민주적 복지국가가 나타났다. 당시 스웨덴은 앙숙이었던 노동자와 농민이 공동 정권을 구성해 복지국가의 길로 들어섰다. 교육과 보육, 보건 등 사회서비스로 새 일자리들을 만들었는데, 특히 여성 일자리가 많이 생겼다. 이는 중산층을 만드는 기반이 됐고 이런 토양 위에서 노동자와 중산층이 연대해 1970년대까지 복지국가의 황금기를 열었다. 지금도 노르딕 복지국가들은 1인당 국민소득과 교육 수준, 삶의 질 등의 지표가 세계에서 가장 좋다. 눈여겨볼 것은 1920년대에 설계한 복지국가 모델이 진화 과정을 거치면서 50년간 한 국가를 안정적으로 이끌었다는 점이다. 스웨덴 복지국가의 아버지인 에른스트 비그포르스는 사회민주적 복지국가란 어느 한 이론가의 학설로 고정된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나의 가설로써 현실에서 실험되고 민심에 따라 끊임없이 수정, 중도주의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스웨덴 등 노르딕 복지국가에서는 1920년대부터 사회주의적 복지국가를 구현, 건강한 중산층을 육성하며 1970년대까지 복지국가의 황금기를 열었다. 사진/뉴시스
 
한국의 포용국가는 노르딕 복지국가와는 결이 다소 다르다. 우선 사회경제적 조건이 판이하다. 스웨덴 등은 국민총생산(GDP)의 30%를 석유와 산림 등 자연자원에서 얻는다. 반면 한국은 인적자원 외에는 국부의 기반이 없다. 석유 등 에너지는 물론 식량도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대외의존도가 세계 최고 수준이다. 또 한국은 1960년대부터 저임금을 토대로 한 노동집약적 수출산업을 육성하며 경쟁력을 확보했으나 1990년대 이후 중국이 한국보다 더 낮은 임금정책을 고수하자 경쟁력을 잃고 있다. 특히 노동집약적 산업구조가 낳은 양면성은 한국인의 삶에 대해 본질적 물음을 던진다. 산업화를 거치며 한국은 한강의 기적을 이뤘으나 삶의 질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6개 국가 중 한국은 삶의 질 순위가 29위다. 특히 공동체 분야 지수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불명예 1위 국가다. 자살률과 노인빈곤율 등 다른 지표도 1위다.

이런 맥락에서 포용국가의 비전은 '사람'에 대한 성찰로부터 출발한다. 한강의 기적이라는 성공신화에서 사람이라는 존재는 그 자체로 가치보다 노동력의 수치로만 환산됐다. 개인의 고유한 가치와 역량은 생산물을 위한 투입요소로 간주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포용국가는 무엇보다 사람에 주목한다. 개인의 역량을 높이는 데서 국가비전을 찾고 있다.
 
9월6일 청와대에서 문재인 대통령 주재로 '포용국가 전략회의'가 열렸다. 이날 문 대통령은 "국민은 누구나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고 공존해야 한다"고 말했다.사진/뉴시스

포용국가와 사람경제…'사회투자형 복지국가' 주목

세계는 산업구조 측면에서 거대한 패러다임 전환을 맞고 있다. 한국도 산업사회에서 데이터경제로 급속히 이동 중이다. 제4차 산업혁명에 따라 기존의 일자리들이 기계로 대체되자 심각한 고용 위기도 나타나고 있다. 때문에 지금 한국사회에서 가장 절실한 것은 일자리 위기에 대한 '회복탄력성'을 키우는 것이다. 개인은 물론 기업과 공동체, 지역사회, 국가 모두가 위기를 견딜 근력과 역량을 키워서 어려움을 이겨내는 힘을 키워야 한다. 포용국가론에서도 개인의 회복탄력성을 키우고 역량을 증진하는 것은 중요한 과제다. 개인이 현재의 일자리 위기들을 견디며 100세까지 긴 생애를 관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국가의 책임으로 돼 가고 있다. 그래서 다시 주목받고 있는 게 '사회투자형 복지국가(Social Investment Welfare State)'다. 보육은 물론 고등교육과 평생교육, 육아와 육아휴직을 뒷받침하는 여성정책, 적극적 노동시장정책, 100세 사회에 대비하는 노인정책 등이 개인의 생애주기에 맞춰 적절히 제공되는 국가야말로 진정한 포용국가다.

그러나 사회투자형 정책들은 노동시장의 공급측면에 해당한다. 포용국가에서는 노동시장의 수요를 만드는 일도 중요하다. 이 일은 사람중심 기업에서도 가능하다. 최근 경영학의 연구 결과들에 따르면, 이윤중심 기업보다 사람중심 기업의 지속가능성이 더 높다. 지금까지 한국의 산업사회와 기업들이 노동자를 단순히 생산요소로만 여겼다면, 이제는 개인의 창의성을 생산성의 원천으로 대접해야 한다. 그래야 기업에도 미래가 있다.

2050년에는 사람중심 기업이 경제와 사회를 주도하겠지만, 2018년 현재는 이것이 한국 현실에 맞지 않는 이상주의라는 비판이 가능하다. 발전국가론과 산업화 시대의 기업에만 익숙해서다. 하지만 기업에 관한 글로벌 트렌드들은 사람중심 기업이 미래형 모델임을 보여준다. 홀 푸드 마켓(Whole Foods Market)의 공동 창업자로 <깨어있는 자본주의>를 쓴 존 맥키는 경험적 연구를 통해 "기업은 반사회적인 조직이 아니라 착한 기업에 도전할수록 신뢰의 대상이 된다"고 말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국가는 물론 기업에도 성찰의 계기가 됐다. 이윤이나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게 아니라 사회적 신뢰를 쌓는 기업이 오래가고 시민으로부터 사랑받는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독일 기업들은 사람에 투자하고 사회적 신뢰를 쌓는 데서 경쟁력을 찾는다. 사람중심 기업에서는 노동자들이 적극적 활력과 창의성을 발휘함으로써 더 나은 생산성을 만들고 있다.
 
‘홀 푸드 마켓’의 공동 창업자로 <깨어있는 자본주의>를 쓴 존 맥키는 “기업은 반사회적 조직이 아니라 착 한 기업에 도전할수록 신뢰의 대상이 된다”고 말했다. 사진/뉴시스
 
포용국가의 핵심은 개인과 기업, 공동체, 지역 그리고 국가의 역량을 증진하는 데 있다. 역량 증진을 위한 방법론은 사회투자정책과 사람중심 경제다. OECD 꼴찌 수준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것도 개인과 공동체의 역량을 증진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는 게 포용국가론이다. 이러한 얼개와 우선순위 속에서 포용국가의 비전들이 구체화될 것이다.  
 
임채원 경희대학교 미래문명원 교수
 
 
* 필자 소개 : 필자는 경희대학교 미래문명원 교수다. 서울대 종교학과 졸업 후 동대학원 행정학 석·박사를 수료하고 동대학 한국행정연구소와 국가리더십센터에서 연구원으로 재직했다. 경희대에서는 세계화와 사회정책 등 글로벌 어젠다와 동아시아문명의 국정운영을 연구 중이다. 또 문재인정부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 위원, 국무총리실 산하 경제인문사회연구회 공공정책분과 위원장으로 국가 미래전략 연구에 참여하고 있다. 30년 후의 국가비전을 모색하는 이번 기획은 격주로 총 15회로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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