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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만인보로 보는 일상사-9화)철새가 전한 소식
“그 휴전선 가시철망 6백리”
2018-06-18 08:00:00 2018-06-18 08:00:00
한반도의 삶은 역동적이라 항상 뭔가 큰일이 일어나는 것에 국민들이 익숙한 편이지만, 2016년 말 ‘촛불정국’의 놀라운 감동 이후 그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지는 또 다른 놀라운 결과들이 2018년 상반기를 강타하고 있다. 역사적인 4·27 남북정상회담과 6·12 북미정상회담을 지켜본 우리 국민들은 한반도의 평화와 정의로운 사회 구현을 향한 열망을 6·13 지방선거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냈다. 지난 6월 14일에 열린 남북장성급군사회담에서 비무장지대(DMZ)에 묻혀 있는 한국전쟁 전사자들의 공동 유해발굴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의 비무장화 문제를 논의했다는 소식은 고무적이다.
 
김도균 남쪽 수석대표와 안익산 북쪽 수석대표가 지난 14일 오후 경기도 파주시 판문점 북쪽 통일각에서 남북 장성급회담을 마친 뒤 공동보도문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분단’의 정치적 효용가치
한국전쟁은 1948년 남북의 단독정부 수립으로 확정된 분단을 고착시켰다. 1953년 휴전협정 이래, ‘분단체제’와 ‘분단이데올로기’는 반세기 이상 수구·기득권세력의 이익을 위해 이용되어왔다. 이승만·박정희 독재정권과 그들의 계보를 잇는 정권들에게는 한반도의 분단 현실이 그들의 모든 약점을 가리고 국민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버리는 매우 유용한 도구였다. 분단 상황으로 인한 안보의 위협은 권력의 모든 비민주적 통치방식을 정당화하는 구실이기도 했다. 그렇게 분단이데올로기, 반공이데올로기는 수구적 지배이데올로기가 되어갔다.
 
1970년대 들어 냉전의 동서진영을 이끌던 미국과 소련 간의 긴장이 완화되고(‘데탕트’) 미국과 중국의 관계도 우호적이 되어가자, 국제관계의 변화에 맞추어 남북한도 관계개선을 모색해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게 된다.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주적·평화적인 방법으로 조국통일을 실현해야 하며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해야 한다는 ‘조국통일의 원칙들’에 합의했던 이 성명은 그러나, 그 역사적 의의에도 불구하고, 남북한 양 정권의 권력기반 강화에 이용되는 결과를 낳았다. “1972년 여름 7·4남북공동성명의 잔치가 / 그해 10월 17일 비상계엄령으로 끝장나버려 / 여전히 분단뿐 / 분단의 강화뿐 / 그것이 10월유신 / 박정희 총통제가 시작되었다”(‘은명기’, 14권).
 
1972년 5월 31일 박성철 북측 대표가 박정희 대통령을 예방하는 모습. 사진/뉴시스
 
냉전 시대의 고루한 유산
해방 이후 출현한 유행어들의 사회적·정서적 함의를 분석한 한 연구에 따르면, 해방 직후 ‘빨갱이’라는 낱말은 극우파가 극좌파를 지칭하는 용어였으나 1946년 신탁통치 찬반파동을 겪으면서 다른 어휘들과 재접합되어 좌익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바뀌었고, 1948년 4·3항쟁 이후에는 좌익을 넘어서 일반적인 용어로 이승만 독재정권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로 확대되었다고 한다. 이승만과 우익세력은 반공주의에 기초해 다른 이념 집단을 반민족, 민족반역자로 몰아간 반면, 실제로 민족반역자였던 친일파는 신탁통치 파동과 미군정을 겪으면서 ‘민족반역자’로부터 벗어난 것이다(주창윤, ‘해방 공간, 유행어로 표출된 정서의 담론’, <한국언론학보> 제53권 5호, 2009.10, 372~374쪽).
 
해방공간에서 ‘빨갱이’와 대립해 좌익이 우익을 호명했던 ‘반동분자’라는 말은 우리 언어의 사용에서 오래 전에 사라진 반면, 1991년 소련의 붕괴와 함께 냉전이 종식된 지가 한참이고 21세기에 들어선 지도 한참인데 대한민국의 수구세력은 여전히 자신의 이해관계에 맞지 않고 생각이 다르면 ‘빨갱이’라는 시대착오적인 딱지를 붙이고 ‘색깔론’이라는 구태의연한 태도를 반복해 왔으니, 그들의 의식 수준은 다음 시에 나타난 수십 년 전 저 유신시대와 별 다를 바 없어 보인다.
 
1975년 무렵은
남한이나
북한이 비슷비슷하게 살아갔다
그뒤로는 내내 뒤처진 남한한테
북한은 뒤처졌다
 
그 무렵 서울 용산구 원효로
여기저기
뒷골목 대폿집
 
소주 서너 병에
불쑥
입 놀린 막일꾼 차도칠이
 
북한도 지옥은 아니라던데……
 
이 말 한마디에
간첩신고로
반공법 위반 징역 1년 먹어
2심에서 8개월
 
8개월 살고 나와
바야흐로 세상은 찬란했다
< … >
박정희 파쇼는 더 크고
박정희의 키는 더 작아졌다
(‘막걸리반공법’, 10권)
 
그러나, 청산되지 못한 친일·독재의 계보를 잇는 수구세력이 자신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변화해 가는 현재에 제동을 걸고 아무리 동굴 속 과거에 잠겨 ‘아 옛날이여’를 회상한다고 해도 역사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는 일이다. 한반도의 국민이라면, 미사일 엔진 실험장 폐쇄 의사를 밝힌 북한과 한미연합훈련 중단을 추진하는 미국이 상호 신뢰를 계속 유지하기를 바랄 것이며, 하루라도 빨리 남북의 이산가족들이(고령의 어르신들을 생각해서라도!) 만나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할 것이다.
 
남북 고위급회담에서 광복절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적십자회담이 논의된 지난 1일 오후 서울 중구 대한적십자사에서 가족을 찾는 한 실향민이 이산가족 찾기 신청 서류를 작성하며 기억을 더듬고 있다. 사진/뉴시스
 
‘북방쇠찌르레기’가 찾아준 아버지와 아들
 
분단 상황이 일상의 역사가 된 한반도 사람들에게 이산가족의 비애도 일상이 됐다. 이 특이한 일상 속에, 철새가 이어준 이산가족의 기막힌 사연이 있다. 남한의 대표적인 조류학자 원병오(1929~) 박사(당시 경희대 교수)는 철새의 이동경로를 추적하기 위해 1963년 6월1일 북방쇠찌르레기 82마리를 비롯한 철새 3종 99마리를 날려 보낸다. 당시 남한은 인식표를 생산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일본 농림성이 야마나시(山梨) 조류연구소에 제공한 인식표(가락지)를 연구소로부터 협조 받아 새들의 발목에 끼워 보냈다.
 
1965년 여름, 김일성종합대학 생물학부 교수 출신으로 당시 북한 과학원 생물학연구소 소장이던 북한의 원로 조류학자 원홍구(1888~1970) 박사는 평양 만수대 근처 숲에서 북방쇠찌르레기 한 마리를 잡아 관찰하다가 다리에 추적용 알루미늄 가락지(인식표)가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동시 일본을 거치지 않는 철새에게 ‘農林省 JAPAN C7655’라는 인식표가 채워져 있는 것을 이상히 여긴 그는 일본 도쿄의 국제조류보호회의(현 국제조류보호협회) 아시아지역본부에 문의해 일본 측으로부터 그 인식표를 받아간 남한 학자가 원병오 박사이고 그 한자 이름이 자신의 아들임을 확인하게 된다.
 
1945년 여름 이래
한반도를 둘로 갈라놓은 북위 38도선
1950년 여름 이래
다시 한번
한반도를 둘로 갈라놓아
서로 총구멍 맞댄
1953년 이래의 휴전선
 
그 휴전선 가시철망 6백리
북쪽의 아버지
남쪽의 아들이 새의 학자였다
 
남쪽의 아들이 새 발목에
그의 이름을 달아 날려보냈다
몇해 뒤
북쪽의 아버지가
그의 이름을 달아 새를 날려보냈다
 
아무런 사연도 없었다
사연이 있으면
남쪽의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이고
북쪽의 무서운 형법 위반이었다
 
< … >
새를 보내고
새를 돌려보냈다
경희대 교수 원병오가 남쪽의 아들이었다
북쪽의 늙은 조류학자가 아버지였다
 
분단시대 핏줄의 아름다움은
어느덧 아들의 머리가 훌렁 벗어진
슬픔의 대머리이기도 한 것
(‘원병오의 휴전선’, 13권)
 
시에서처럼 아들의 이름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농림성 JAPAN C7655’이라는 인식표의 이름을 발견한 것이었지만, 원홍구 박사는 그 인식표를 보는 순간 무엇인가를 직감했을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산과 들에서 곤충채집을 하고 새를 쫓아다니던 막내아들이, 1947년 김일성종합대학 농학부 축산과에 입학해 이후 단과대학으로 분리된 원산농업대학을 졸업했던 그 아들이, 1950년 한국전쟁 때 월남해 15년간 만나지 못한 채 자신처럼 조류학자가 된 그 아들이 날려 보낸 새라는 것을 알았을 때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리고 일본으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들은 아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당시 이 놀라운 소식은 북한, 소련, 미국, 일본에 보도되었고 남한에도 알려졌지만, 아버지와 아들은 끝내 만날 수 없었다. 다행히 외국 학자들의 도움으로 안부를 주고받았다고 하니 위로가 되었겠지만, 원병오 박사는 1970년 원홍구 박사가 별세한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아버지 묘를 찾을 수 있었다. 2002년 여름, 아들은 드디어 고향인 개성을 방문하고 평양 애국열사능에 안장된 아버지와 소리 없는 상봉을 하게 된다.
 
이산가족 조류학자 부자(父子)를 이어준 여름 철새 북방쇠찌르레기는 한반도를 비롯해 중국 동북 지방, 몽고 북부 지방, 우수리 지방 등지에서 번식하고 일본을 거치지 않은 채 동남아시아로 남하하며 ‘찌륵, 찌르륵’ 운다고 한다(우리말에서 새는 노래하기보다 우는 편이다). 그 울음소리가 강산이 몇 번이나 바뀌어도 만나지 못하는 이산가족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하다.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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