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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리비아에서 불평등을 묻다)②세계은행의 신자유주의와 코차밤바 물 전쟁
2017-02-24 08:00:00 2017-02-24 08:00:00
사진/뉴스토마토
 
2005년 볼리비아는 남미 정치사에서 새로운 장을 열었다. 스페인계가 아닌 인디오계에서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을 배출했다. 남미에서는 1990년대부터 당시 세계적 조류였던 신자유주의·민영화와는 정반대의 길을 걷는 사회주의 정당들이 집권하게 된다. 브라질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등을 필두로 쿠바혁명을 동경하는 사회주의 정치세력들이 주류로 떠올랐다. 하지만 이들은 남미 원주민계가 아닌 스페인계였다. 그런데 볼리비아에는 사회주의 정당 소속이면서도 인디오계 출신의 정치 지도자가 탄생했다. 에보 모랄레스(Evo Morales) 대통령이 바로 그다.
 
'첫 인디오계 대통령 탄생'이라는 새로운 전환점의 계기를 제공한 사건은 2000년 1월부터 3월까지 두 달간 진행됐던 '코차밤바 물 전쟁'이었다. 코차밤바(Cochabamba)는 볼리비아 제3의 도시로, 수도 라 파즈(La Paz)의 남동쪽에 위치하며, 차로는 6시간 넘게 걸린다. 당시 볼리비아 정부는 1980년대 세계적 추세였던 민영화의 바람을 타고 자국의 물 산업을 다국적기업이 주도하는 컨소시엄에 넘겼다. 그런데 이 컨소시엄이 물의 공급가격을 단기간에 급격히 올렸고, 이에 반발한 코차밤바 시민들은 시민단체를 결성해 조직적으로 저항했다. 정부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했지만, 시민과 계엄군의 충돌로 부상자가 속출했고 사상자까지 발생했다. 정부가 민영화 계획을 포기할 때까지 시민들은 물과 식량이 절대 부족한 생활을 견뎌내며 정치적으로 단련되기 시작했고, 시민들 내부에서 연대의식도 강화됐다.
 
2000년 1월 코차밤바 시민들은 살인적인 수도 요금 인상에 반대하며 대규모 저항운동을 벌이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코차밤바 물 전쟁'은 그해 3월까지 두달 동안 전개됐다. 당시 코차밤바 중앙광장을 출발해서 도시를 순회하고 있는 시민행진의 모습. 사진/임채원 선임연구원
 
이렇게 시작된 두 달간의 물 전쟁은 코차밤바가 볼리비아 정치의 중심에 설 수 있는 여러 성과들을 남겼다. 우선 물 전쟁을 주도한 오스카 올리비아(Oscar Olivera)는 남미에서 반세계화 운동의 중심적 인물로 부상했다. 물 전쟁에서 처음으로 시민단체를 이끌었던 오마르 페르난데스(Omar Fernandez)는 상원의원이 되었고, 볼리비아 정치의 중심에 서게 된다. 무엇보다 당시 코차밤바 주 차파레(Chapare) 지역을 대표하는 하원의원 에보 모랄레스는 물 전쟁을 거치면서 정치적 자산을 축적해 나가더니, 급기야 2005년에는 남미 최초의 인디오계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아울러 이 사건은 1980년대 이후 세계적으로 유행한 민영화와 다국적기업 중심의 세계화 정책에 정면 도전한 일로 일약 명성을 얻게 됐다. 우리나라에서는 2008년 미국산 쇠고기 광우병 파동으로 촉발된 촛불집회 등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따른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알리는 단골 메뉴로 언급되기도 했다. 다국적기업이 국가를 국제재판의 소송 당사자로 직접 불러낼 수 있다는 독소조항의 대표적인 예시로도 인용됐다.
 
그런데 물 전쟁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배후에는 당시 볼리비아 경제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세계은행(World Bank)이 있었다. 세계은행은 볼리비아가 사회간접자본(SOC)을 확충하려면 자본이 필요하고, 외국계 자본을 도입하기 위해서는 각종 민영화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2000년을 기준으로 세계은행은 볼리비아 정부에 2500만달러의 대출을 제공하고 있었는데, 볼리비아가 물 산업을 민영화하지 않으면 대출을 연장할 수 없다고까지 선언했다. 세계은행은 물 산업이 공공영역에 남아있는 한 부패가 만연하고 수도 공급가격 인상과 함께 식수가 제때 공급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실 세계은행이 물 산업의 민영화를 압박하기는 했지만, 볼리비아 자체도 만성적인 물 부족에 시달리던 나라였다. 이 나라의 물 부족 문제는 그 역사적 기원도 깊은데, 라 파즈와 코차밤바 등 대도시들까지 수자원 부족에 시달릴 정도였다. 그런데 자원의 부족은 필연적으로 자원의 불균등한 배분을 낳게 된다. 여러 종류의 불평등이 있겠지만, 물과 공기 등 기본적인 자연환경에서도 빈부 격차와 사회적 차별이 존재할 수 있다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코차밤바의 '물 불평등'이다.
 
코차밤바에서 부유한 백인들은 주로 북촌(Norte)에 모여 산다. 이곳에서만 온종일 물을 공급받을 수 있어서다. 아름다운 투나리(Tunari) 산기슭의 북촌에 있는 집들은 거의 대부분 주택 지하에 물탱크를 갖고 있다. 이 도시는 물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매일 2시간 정도 제한급수를 실시하는데, 북쪽 지역의 주택들은 투나리 산기슭의 상수원에서 가까워 수돗물을 2시간 동안 담아둘 수 있었다. 그렇게 지하 물탱크에 저장한 물로 하루 종일 식수와 생활용수를 사용했다. 반면 상수원에서 멀리 떨어진 나머지 지역은 제한급수를 겪고 2시간 동안 수도꼭지에서 찔끔찔끔 흘러나오는 물을 받아 식수 정도로만 사용한다. 북촌을 제외한 대부분의 다른 주민들은 물탱크를 설치할 만큼의 경제적 여유도 없었다.
 
코차밤바는 상쾌한 공기와 아름다운 경관으로 유명하다. 해발 2600m 고도에 우리나라의 대구와 같은 분지 구조인 코차밤바는 라틴 아메리카에서도 가장 살기 좋은 상춘기후 지역이다. 오죽하면 국제기구나 가톨릭 선교단체가 라틴 아메리카로 인력을 파견할 때도 이곳의 어학연수원에서 교육할 정도다. 그만큼 이곳의 기후는 사람 살기에 최적의 조건이다. 단 하나의 치명적인 결함, 만성적인 물 부족만 제외하면 파라다이스다.
 
쾌적한 공기를 자랑하는 아름다운 투나리산의 모습. 볼리비아는 만성적인 수자원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투나리산에 터널을 만들어 산 뒤에 흐르는 미시쿠니 강물을 코차밤바로 끌어오는 사업을 1930년대부터 계획했다. 사진/임채원 선임연구원
 
코차밤바는 물 부족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1930년대 대담한 기획을 하게 된다. 북한의 부전강댐, 허전강댐처럼 도시 북쪽 투나리산을 뚫고, 반대편에서 흐르는 미시쿠니 강물은 댐으로 막아 코차밤바 쪽으로 물을 끌어오는 것이었다. 미시쿠니댐 건설 사업인데, 이 사업은 지난 100년 동안 코차밤바 사람들의 숙원이었음에도 추진이 지지부진했다. 경제성이 낮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볼리비아에 지속적으로 물 민영화를 재촉하던 세계은행도 수자원 확보를 위한 대책으로 미시쿠니댐 건설을 검토했지만, 경제성이 없다고 결론짓고 건설을 포기했다.
 
댐 건설이 수십년째 미뤄진 다른 이유는 볼리비아처럼 저개발국에서는 대규모 공사를 착수할 자금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볼리비아는 국제 원조에 의존하거나 다국적기업의 자본을 끌어들여야 했다. 지난 2008년 이명박 정부가 볼리비아와 리튬광산 공동개발을 추진할 때도 모랄레스 대통령이 가장 관심을 보인 경제협력 사업이 바로 미시쿠니댐의 수력발전 사업이었다. 하지만 당시 자원개발에 한창 열을 올리던 한국수자원공사마저도 댐 건설의 사업성이 없다며 참여를 거절했다.
 
세계은행에서 물 민영화 권고를 받던 볼리비아 정부는 영국과 이탈리아, 미국, 스페인, 그리고 볼리비아의 2개 회사가 참여하는 형태의 컨소시엄 '아구아스델투나리(Aguas del Tunari)'에 물 산업을 민영화하기로 결정한다. 코차밤바는 아구아스델투나리에 수돗물 공급의 독점적 지위를 부여하는 대신 미시쿠니댐 건설을 요구했다. 그리고 컨소시엄은 수도 공급계약 조건으로 연간 최소 15%의 이익률을 보장받게 됐다. 세계은행은 이 다목적댐이 경제성이 없다고 결론 내렸지만 공급업자와 결탁한 코차밤바 주지사가 당시 대통령이었던 우고 반셀(Hugo Banzer)의 지원을 업고 무리하게 댐 건설을 추진했다.
 
앞서 설명했듯 저개발국이 사회간접자본을 건설할 때 다국적기업이나 국제 컨소시엄에 의존하는 것은 전형적인 사례지만, 다국적기업은 사회간접자본 건설에 투자한 자본금을 회수하기 위해 현지 여건을 고려하지 않고 무리하게 상품 가격을 인상하고, 그에 따라 현지 주민들과 마찰을 빚는 근원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코차밤바에서도 마찬가지였고, 이는 곧 대규모 저항으로 이어졌다.
 
2000년 1월 댐 건설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 국제 컨소시엄은 수익보장과 댐 건설을 위한 자금확보를 명분으로 수도 공급가격을 35%나 인상했다. 수도 수용가구들은 평균 월 20달러의 수도 사용료를 부담해야 됐다. 당시 주민들은 월 평균 수입이 100달러에 불과했기 때문에 수도 사용료 20달러는 식료품 사용액보다 큰 돈이었다. 코차밤바 주민들은 수도 가격 인상에 폭발했다. 주민들은 아구아스델투나리가 국제 컨소시엄이지만 미국기업 벡텔(Bechtel)이 실질적으로 컨소시엄을 주도하고 있다고 봤고, 벡텔에 강한 반감을 갖게 되면서 살인적인 수도 사용료 인상에 저항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두 달 동안 진행된 물 전쟁은 볼리비아 정치의 축소판이었다. 가장 먼저 페르난데스가 이끄는 시민단체가 교수, 엔지니어, 환경학자들을 중심으로 상수도 공급체계와 요금인상의 부당성을 제기했다. 올리베라가 주도한 노동조합과 농민단체도 전쟁에 참여했다. 2000여명 규모로 시작한 시위대는 시민들의 공감을 얻으면서 급속히 규모를 늘렸고 저항운동을 전파했다. 대학생들이 참여했고, 인근 농촌에서도 농민들이 합류했다.
 
정부는 강경 대응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시민들을 진압하기 시작했다. 충돌이 격화되자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포토시(Potoci)와 라파즈에서 진압군까지 파견했다. 그러나 시민들의 지지와 공감을 얻고 있는 시위대는 쉽게 타협하지 않았다. 정부군과 시위대는 도시가 봉쇄된 상태에서 두 달이나 대치했다. 가톨릭 교회가 중재에 나서기도 하고 시위 지도부가 한때 정부군에게 체포되는 등의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정부군이 시민들의 지지를 얻고 있는 시위대를 일방적으로 강경 진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볼리비아 정부는 2000년 3월 물 산업 민영화를 철회하면서 물 전쟁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2000년 발생한 볼리비아의 '코차밤바 물 전쟁'에서 당시 대통령이엇던 우고 반셀은 게엄령을 선포하고 인근 도시인 포토시 등에서 진압군을 파견했다. 하지만 코차밤바 시민들은 저항을 계속하며 두달 넘게 계엄군과 대치했다. 계엄군이 운집한 시민들에게 무차별적인 최루탄을 쏘면서 시민들을 해산시키고 있다. 사진/임채원 선임연구원
 
물 전쟁의 경험은 코차밤바 시민들에게 다른 지역과 차별되는 정치적 경험을 갖게 했다. 정치적 시위를 승리로 이끈 경험은 그들에게 시민의식을 고양하고 공동체의식을 부양시켰다. 지식인단체나 노조, 농민단체 등도 시위에 적극적으로 가담했고, 시민들이 집단적으로 의견을 합의해내고 조직화해서 행동하는 경험을 축적시켰다. 이런 경험은 코차밤바가 볼리비아 정치에서 차별화된 우위를 가질 수 있도록 한 결정적 자산이 됐다.
 
결국 내재된 시민들의 힘은 2005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 지역 출신인 에보 모랄레스의 당선으로까지 이어진다. 당시 모랄레스가 하원의원을 하던 차파레 지역은 융가스와 함께 대표적인 코카 재배지역으로, 그는 이 지역 마약 세력과 연계되어 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물 전쟁이 모든 걸 바꿨다. 다른 물 전쟁의 지도자들이 시민단체에 머물러 있는 동안 모랄레스는 현역 정치인의 이점을 살려 전국적인 정치인으로서 부상하게 된다. 그리고 이때 조직화하고 단련된 정치적 기반을 중심으로, 그는 2005년 대선에서 승리의 깃발을 들게 된다.
 
전체 주민의 90% 이상이 가톨릭 신자인 코차밤바는 20세기에 성모 마리아가 발현한 곳인 키야코요(QuillaCollo)가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매년 8월14일 저녁에 수천명의 인파가 대주교 성당이 있는 중앙광장에서 시 외곽의 키야코요까지 25㎞ 정도를 1박2일로 순례한다. 이탈리아 출신 대주교가 중심이 되어 이날의 도시행진은 장엄한 종교순례를 펼친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9시가 되면 키야코요에서 성스런 예배를 드린다. 이들의 염원은 한결같다. 성모 마리아가 백인이 아닌 인디오 소녀에게 나타났듯이, 인디오에게도 안정적인 물 공급과 자녀들이 건강하고 교육을 제대로 받기를 염원한다.
 
지난 2010년 이 도시의 국립대학인 UMSS(Universidad Mayor de San Simon) 대학교와 한국의 서울대학교가 공공정책의 협력을 위한 대학 간 교류협력을 추진했다. 세계은행의 신자유주의 방식과는 다른 공동의 협력이 가능하리라는 모색을 시작했다. 그리고 코차밤바에 한국 농촌진흥청의 해외협력사무소(KOPIA)를 유치해 농업 협력의 물꼬를 트는 데 힘을 쏟았다. 우리도 이제 이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과 협력을 모색해 봐야 하지 않을까. 한국의 진정한 세계화 전략이 될 수도 있다.
 
2010년 공공부문에서 세계은행의 민영화방식이 아닌 새로운 형태의 국제협력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볼리비아의 UMSS 대학이 한국의 서울대학교가 국제학술 교류를 추진했다. 사진/임채원 선임연구원
 
임채원 서울대 국가리더십센터 선임연구원
 

* 편집자 주: 필자 임채원은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행정학 석·박사를 수료했다. 현재는 동대학 국가리더십센터 선임연구원 재직하며 세계화와 사회정책 등 글로벌 어젠다와 동아시아 국정운영을 연구하고 있다 '볼리비아에서 불평등을 묻다'는 필자가 2년간 볼리비아에서 체류한 경험을 바탕으로 대항해시대 이래 지속된 세계화의 그늘에 관해 <뉴스토마토> 지면에 격주 금요일마다 총 11회로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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