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이제는 ‘위안부’라는 표현을 재고할 때다
이종철 연세철학연구소 선임연구원(철학박사)
2016-01-17 11:12:34 2016-01-17 11:38:26
잘 알려져 있듯 ‘위안부’는 제국주의 시대 침략 전쟁에서 식민지 출신의 어린 여성들이 강제 동원되어 일본 군인들의 성적 노리개가 된 사건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므로 ‘위안부’를 어떤 형태로 은폐하려 할지라도 숨길 수 없는 진실은 국가와 군에 의한 조직적이고 강제적으로 이루어진 반인륜적 성폭력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위안부’라는 표현이 과거에 있었던 이 같은 진실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일본의 극우주의자들은 자발적으로 봉사한 매춘부였다고 하고, ‘제국의 위안부’의 저자는 국가의 조직적 폭력이라는 본질을 은폐하고 있다. 나는 이를 막기 위해서라도 과감히 ‘위안부’라는 말을 버릴 것을 제안한다. 이미 미국의 대통령 후보인 힐러리는 그것을 분명하게 '성노예'(sexual slave)라 규정한 바 있고, 외국의 언론에서도 많이 사용되고 있다.
 
어떤 개념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현실에 대한 이해와 규정이 달라질 수 있다. 여전히 일본과 예민한 쟁점이 되고 있는 ‘독도’와 ‘동해’ 대한 호칭을 생각해보라. 만일 우리가 ‘독도’나 ‘동해’를 ‘다케시마’나 ‘일본해’로 적고 ‘우리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얼마나 우스운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위안부’라는 말을 별 생각 없이 사용하는 우리가 딱 그런 모습이다. ‘성노예’라는 말은 이런 현실을 좀 더 구체적으로 폭로하기 때문에 불편하게 생각하는 시선들이 없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면하기에 불편한 곳 속에 진실이 담겨 있다는 프로이트의 말처럼, 이제라도 양국의 젊은 세대들이나 국제사회에 진실을 남기기 위해 '성노예'라는 말을 사용하도록 하자. 좀 더 나아가 ‘일본군 성노예’(Japnese's military sexual slaves)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도 좋은 방안이지 않겠는가? 모호하고 몰역사적인 ‘위안부’라는 표현과 달리 일본군 성노예’라는 표현에는 가해의 주체와 피해의 주체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comfort woman으로 표기할 때와 Japnese's military sexual slave로 표기할 때 국제사회의 인식은 크게 달라질 것이다.
 
이렇게 표현을 바꾸자는 데는 보다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 12·28 한일 합의 이후 한국 사회 내부에서 이 문제가 진영 간의 갈등으로 비화되고 있다. 좋든 싫든 공은 이제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 정부와 한국 사회 내부로 넘어 오고 있다. 한국정부는 갈수록 이 문제를 거추장스럽고 불편해 할 것이다. 엄마 부대나 어버이 부대 같은 보수단체들은 노골적으로 할머니들이 양보를 해야 한다고 하면서 아픈 상처에 소금을 뿌리고 있다. 그들은 소녀상을 철거하려고 하면서 과거를 덮어버리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이처럼 반인륜적인 성노예 문제는 폭력의 본질을 분명히 하고 피해자가 납득할 수 있는 가해자의 진실된 사과와 배상이 이루어지 지지 않는 한 결코 해결될 수 없다. 독일이 과거의 유대인 학살에 대해 끊임없이 참회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해보라. 12·28 합의 같은 어설픈 미봉책은 국민의 반발만 사고 국론을 분열시킬 뿐이며, 한국과 일본의 미래 지향적인 관계를 위해서도 방해가 될 뿐이다. 이제 우리 모두 과거의 불행한 진실을 대면하려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나 국내의 언론들이 늦었지만 ‘성노예’ 혹은 ‘일본군 성노예'라는 표현을 일상화해서 역사의 교훈으로 삼을 것을 제안한다. 
 
이종철 철학박사/연세철학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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