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주년] '의식주' 70년 역사…먹고 자고 입는 것도 변했다
'몸뻬→미니스커트, 보리밥→라면, 판자집→아파트…'산전수전' 한국인의 삶
입력 : 2015-08-12 19:43:14 수정 : 2015-08-12 19:43:14
'빛을 되찾는다'라는 의미의 광복 후 70년의 시간 동안 한국사회와 한국인의 삶은 경제 성장과 고도산업화, 민주화, 세계화 등을 거치면서 끊임없는 변화를 겪었다. 흐른 시간만큼 의식주의 모습도 빠르게 바뀌었다.
 
서구 영향으로 한복은 양복으로 교체·정착됐고, 신분에 따른 의복의 외형적인 차이점도 사라졌다. 일본식 간편 바지인 '몸뻬'를 입고 광복을 맞이하던 여성의 옷차림은 한여름 배꼽티와 핫팬츠로 거리를 점령했고, '패션 부재시대'에서 '패션 혁명시대'를 살고 있다.
 
허기진 배를 움켜잡으며 보리밥과 옥수수 등으로 근근이 끼니를 때우던 식생활도 급변했다. 6·25 이후에는 지역간·사회계층간의 극심한 이동으로 지방 고유의 전통음식이 사라지는 결과를 가져왔고, 인공조미료의 보급은 국민들의 입맛을 획일화시켰다. 산업화 이후에는 생활의 합리화로 인스턴트 식품시대와 식품 공장화시대를 불러왔다.
 
주거생활 역시 70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있다. '판자집'으로 대변되던 해방과 전쟁 이후 한국사회는 정치·사회적 불안정으로 극심한 주택난을 겪었고, 토지개발이 본격화되면서 현재의 주거형태로 정착한 아파트 시대가 열렸다.
 
◇세월따라 유행따라…패션부재에서 혁명시대로
 
해방이 되던 1945년 무렵은 패션부재 시대였다. 암울하고 빈곤한 일제시대에 여성들은 대부분 일하기 편한 몸뻬나 한복을 입었다. 헐벗고 굶주린 시절, 옷은 사치에 불과했다.
 
1950년대에는 구제품과 영화배우 오드리 햅번 스타일이 주류를 이뤘다. '유행'이라는 것이 만들어진 시기였다. 6·25 전쟁 중에도 미군 모직담요를 물들여 코트를 만들어 입었고, 남학생들은 군복에 검정물을 들여 입었다. 전쟁이 끝난 후 서울 명동에는 양장점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고, 명동은 곧 '유행 1번지'로 떠올랐다.
 
1960년대에는 국제복장학원, 오리엔탈 등 양재학원이 생기며 디자이너들이 본격적으로 양성됐다. 특히 1967년 가수 윤복희씨가 입었던 초미니 스커트는 패션 역사에 대이변을 불러왔다. 미니스커트에 대한 찬반론이 일었고 무릎 위 15cm 이상이면 풍속위반이라며 경찰이 자를 들고 다니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1970년대에는 기성복 메이커가 자리를 잡으면서 디자이너, 하이패션이란 용어도 일반인들에게 알려졌다. 디자이너만이 아니라 유행을 소화해낸 일반 국민들의 패션 감각과 수준이 놀랍도록 발전한 시기다.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여성의 사회진출이 늘고 레저 등 취미생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패션 역시 루스룩이나 레이어드룩 등 보다 편안하고 실용성을 추구하는 쪽으로 변화했다.
 
1990년대와 2000년대에는 자연과 환경에 관심이 패션에 반영되기 시작했으며, 그때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복고 패션도 유행하기 시작했다.
 
◇꽁당보리밥에서 라면으로…양보다 질 추구 '웰빙'
 
70년의 역사는 식생활에서도 엿볼 수 있다. 50년 넘게 허기진 국민들의 배를 채워주던 라면은 이제 없어서는 안 될 국민야식이 될 정도로 먹을거리 역시 급변의 시대를 걸어왔다.
 
해방 직후 한국사회는 보리밥과 짠지로 대표될 만큼 주린 배를 채우기에 급급했던 시절이었다. 이후 전쟁을 거치고 1960년대 초까지 미국의 밀·옥수수 등 식량 원조는 식생활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1960년대 초까지 극심했던 식량난은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66)이 성공적으로 수행되면서 어느 정도 해소됐다. 그러나 흉작으로 쌀 부족 현상이 계속되자 당시 '혼분식 장려정책'이라는 것이 등장했다. 모든 음식점에서는 보리쌀 등 잡곡이나 분식류를 25% 이상 혼합해 팔아야 했고, 학생들은 점심시간마다 도시락에 잡곡이 '제대로' 섞여 있는지 검사받아야 했다.
 
이때 라면의 등장은 국민의 식생활에 충격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우리나라 라면 제품 1호는 1963년 일본에서 기술을 도입해 개발한 '삼양라면'이다. 처음에는 낯선 맛과 이름 때문에 외면당했지만 혼분식 장려정책과 개당 10원이라는 싼값에 힘입어 대중식품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1970년대 들어서는 해외 교류가 활발해지고 국민총생산이 높아지면서 식생활은 점차 서구화되고 풍성해졌다. 1980년대에는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 등 대규모 국제행사를 거치면서 입맛이 급격히 서구화됐다. 이런 영향 속에 외식산업은 가속화됐다. 커피 전문점이나 돈가스 전문점 등 각종 전문 음식점이 속속 간판을 내걸었고, 피자헛·맥도날드·버거킹 등 해외 유명 프랜차이즈 업체가 대거 도입됐다.
 
1990년대에는 동·서양의 재료와 조리법을 섞어 만드는 '퓨전요리'가 유행하기 시작했으며, '푸드 스타일리스트'가 어엿한 직업으로 자리잡게 됐다. '웰빙시대'인 2000년대에는 음식을 통해 건강과 생활의 질을 높이는 것이 최대 관심사가 됐다. 하나를 먹더라도 양보다 질을 추구하는 고품격 음식문화가 형성됐다.
 
◇'판자촌'에서 '아파트 공화국'으로…자고 일어나면 '뚝딱'
 
주거형태도 급변했다. '판자집'으로 대변되던 해방과 전쟁 이후 폐허와 가난이 '최첨단 아파트'가 상징하는 현재의 주거형태로 변모했다.
 
광복 이후 한국사회는 일본식 '다다미' 집이 점점 사라지고 온돌이 복권됐다. 또 집이 없어 1년에 몇 번씩 이사하는 사람이 넘쳐났다. 북에서 월남해오고 만주나 일본에 나갔던 동포들이 귀국하면서 주택 사정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서울 후암동과 이태원 일대에 판자촌과 천막촌이 들어서면서 '해방촌'이 만들어진 것이 이 무렵이다.
 
6·25 전쟁으로 주택난은 더욱 가중됐다. 전쟁 후에는 1956년까지 전국에 걸쳐 재건주택, 복구 주택, 외인 주택이 들어섰으며 1957년 현재의 민영주택이라 불리우는 '국제협동조합연합회(ICA) 주택'이 등장했다. ICA 주택은 산업은행이 국제협동조합연합회의 자금을 융자받아 서울의 부암동이나 화곡동에 지은 소규모 주택을 말한다.
 
이후 아파트 시대가 시작됐다.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첫 아파트는 1958년 종암아파트다. 17평 규모로 152가구였던 아파트 준공식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참석해 전국적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최초의 민간 아파트가 나온 이후 여기저기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대한주택공사가 1962년에 지은 마포아파트(450가구)를 시작으로 대단지 아파트가 늘어났고, 1964년에 지은 마포2차아파트는 계단식 설계로 거실과 베란다를 도입한 최초의 아파트로 알려졌다. 1966년부터 1971년 사이에 지어진 한강맨션아파트는 중산층의 아파트로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1970년대에는 연립주택이 대세였다. 단독주택과 아파트의 장점을 골고루 갖춘 연립주택은 자기 소유의 땅과 정원을 가질 수 있다는 이유로 인기몰이를 했다. 강남 개발도 본격화됐다. 특히 강남 개발은 아파트가 주거 공간이 아닌 투기 수단으로 떠올랐다. 강남 개발 이후 압구정동이나 잠실에는 아파트가 속속 들어섰으며, 대한주택공사나 민간 건설회사가 아파트 단지를 많이 지어 아파트가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1980년대 들어서는 고층 아파트가 유행했다. 특히 1989년 4월부터 분당을 비롯한 5개 신도시에 건설된 아파트 200만 가구는 주택보급률을 86%까지 끌어올리면서 고층 아파트의 시대를 예고했다.
 
1990년대에는 수도권 비대화로 대도시 인구와 기능 분산을 위해 신도시 및 신시가지 개발 사업이 본격화됐고 2000년대에는 공동주택, 아파트의 시대로 자리잡았다. 특히 2002년 10월 완공된 서울시 도곡동의 '타워팰리스'는 아파트의 고층화와 고급화를 상징하며 주상복합아파트의 시대를 열었다.
 
박진아 기자 toyouja@etomato.com
 
광복 이후 의식주 변천사 / 자료 국가기록원 캡쳐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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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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