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침몰하는 사회를 향해 던지는 묵직한 질문
2014-12-01 09:27:49 2014-12-01 09:28:00
[뉴스토마토 김나볏기자] 연극 <사회의 기둥들>
 
연극이란 예술은 속도가 느립니다. 제작과정도 그렇고, 유통과정도 그렇습니다. 사회의 부정부패에 가속도가 붙을 때 연극 하는 사람들의 고민이 깊어지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사회적 발언을 한다고는 하지만 때 늦은 반응일 경우가 많으니 과연 연극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자괴감이 들게 되는 것이죠. 최근 들어 부쩍 ‘연극이 도대체 무슨 소용 있을까’ 하는 회의와 고민에 빠진 연극인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LG아트센터에서 공연 중인 연극 <사회의 기둥들>은 이처럼 예술 혹은 연극의 힘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작품입니다. 작품을 쓴 작가는 <인형의 집>으로 유명한 입센인데요. 사실주의 연극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 작가가 137년 전에 쓴 희곡이 이토록 동시대에 유효한 답을 품고 있을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습니다. <사회의 기둥들>이 국내에서 공연되는 건 이번이 처음인데요. 공연을 위해 김미혜 한양대 교수가 번역과 드라마터지를 맡았고, 김광보 연출가가 작품을 무대로 옮겼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사회의 기둥들
 
이 작품의 중심 인물은 노르웨이 해안가 소도시의 영주이자 선박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베르니크입니다. 베르니크는 높은 도덕성으로 시민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사회의 기둥’과도 같은 존재지요. 그러나 알고 보면 겉과 속이 다른 인물입니다. 도시를 개발해 개인적으로 큰 이익을 남기려 하고 있거든요. 그러던 어느 날 베르니크의 과거 실수에 대한 누명을 쓰고 떠났던 처남 요한과 옛 연인이었던 로나가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베르니크는 자신의 추악한 비밀이 밝혀져 명예가 실추될 위기에 처하자 요한을 떠나 보낼 생각으로 무리하게 배를 출항시키려 합니다.
 
극장에 들어서면 먼저 베르니크의 집이 눈에 띄는데요. 극 초반, 이 집은 막으로 가려져 있어 극히 일부만 노출됩니다. 직육면체의 하얀 집, 완전무결해 보이는 집이지만 실상 많은 부분이 감춰져 있는 건데요. 그 까닭에 관객은 아름다운 이 집에 뭔가 중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음을 쉽게 눈치 챌 수 있습니다.
 
(사진제공=LG아트센터)
 
도입부 직후에는 가려진 막이 치워지고 집은 시원하게 공개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려져 있을 때보다 오히려 더 답답한 느낌이 듭니다.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가면이라도 쓴 듯 위선적인 모습으로 일관하기 때문이죠. 베르니크의 어린 아들인 올라프를 제외하고 이 집에 드나드는 사람들에게는 하나 같이 교양미가 넘쳐 흐르는데요. 남자들은 지역사회를 위해 일하고, 여자들은 범죄자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하며 착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적어도 겉보기에는 그렇습니다.
 
다시 무대를 볼까요. 공연에서 무대는 때때로 많은 상징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무대 뒷면 전체에는 커다란 창문과 문이 달려 있는데 이로 인해 집 전체는 마치 커다란 온실 같은 인상을 줍니다. 베르니크를 비롯해 이 마을 사람들은 겉으로는 변화무쌍한 외부세계를 경멸하는 듯한 태도를 보입니다. 하지만 커튼 뒤에 숨어 빼꼼히 밖을 바라보는 모습에서 외부세계에 대한 경멸과 동경이라는, 이들의 이중적 감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특히 이 지역사회의 지도자 베르니크의 경우 겉으로는 외부세계를 경멸해 마지 않지만 외부의 고급 정보를 독점해 자기 잇속을 챙기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침몰하는 사회에 질문을 던지다
 
이 극은 총 4막으로 구성됩니다. 각 막이 지나갈 때마다 이 집은 점차 기울어져 갑니다. 모두들 사회의 기둥이라 자처하며 살지만 실상은 사회의 썩은 기둥들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말이지요. 사회 지도층의 거짓과 위선이 밝혀짐에 따라 점차 기울어져 가는 집은 침몰하는 가정, 사회, 국가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합니다.
 
연극 <사회의 기둥들>은 입센이라는 대작가의 힘을 빌어 예술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에 관한 오늘날의 고민에 모종의 답을 안깁니다. 특히 이 극의 통시성이 놀라운데요. 제작진은 원작에서 조금도 각색을 거치지 않고 이 작품을 올렸습니다. 사회구조와 인간본성의 핵심을 제대로 짚어낸 덕분에 연극은 이처럼 시간과 공간을 막론하고 시대를 비추는 거울로서의 역할을 능히 감당해냅니다. 또 김광보 연출가의 꼼꼼하면서도 깔끔한 해석이 더해지면서 이 극의 메시지는 보다 선명하게 전달됩니다.
 
(사진제공=LG아트센터)
 
그간 사실주의극의 범람으로 인해 국내 연극계 일각에서는 사실주의극을 극복해야 할 대상처럼 여기기도 했었는데요. 이 극은 19세기, 감상주의와 상업주의에 대한 반격으로부터 출발한 사실주의극의 본래 정신, 본래 힘을 다시금 떠올리게 합니다. 아울러 그동안의 많은 사실주의극이 형식적인 부분만 답습하고 내용적으로는 사실주의의 핵심 정신을 담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공격 받았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일견 드네요.
 
또 사실주의적 성향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연극을 만들어온 김광보 연출가가 사실주의극을 제대로 만들어냈다는 점이 아이러니하게 다가옵니다. 연극을 ‘사회와 엄연히 구별되는 세계’로 보는 이 연출가는 정의와 진리를 추구하다 과시욕과 탐욕에 휩싸이는 과정, 잘못을 감추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사회지도층의 모습을 그리면서도 끝내 유머를 잃지 않습니다. 또한 이익을 위해 무리하게 배를 띄우는 선박회사 사장의 모습이 단번에 4.16 참사를 연상시킴에도 불구하고 이 극을 바라보는 관객은 끝까지 객관적 시선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연극이 우리 사회와는 다른 결말을 향해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사실주의극이지만 현실과는 사뭇 다른 연극, 그래서 아프게 다가오는 연극 <사회의 기둥들>은 극장을 떠나는 관객에게 쉬이 잊지 못할 묵직한 질문과 여운을 남깁니다.
 
-공연명: <사회의 기둥들>
-시간: 11월19~30일
-장소: LG아트센터
-원작: 헨릭 입센
-연출: 김광보
-번역.드라마터지: 김미혜
-윤색: 고연옥
-출연: 박지일, 정재은, 정수영,이석준, 우현주, 김주완,이승주, 손진환, 유성주, 채윤서, 유연수, 한동규,구혜령, 서정연, 백지원
-무대: 박동우
-조명: 김창기
-의상: 김지연
-음악: 황강록
-안무: 금배섭
-분장: 백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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