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나볏기자] 만남과 헤어짐의 공간인 터미널에서 아홉 개의 시선이 펼쳐진다. 연극 <터미널>은 창작집단 독에 속한 젊은 작가들의 다양한 단막극을 옴니버스 식으로 구성한 작품이다. 무엇보다도 이전 작품들보다 완성도가 높아졌다는 점이 반갑다. 재기발랄한 극작과 깔끔한 연출이 어우러지며 공동창작의 묘미를 잘 살려냈다.
창작집단 독은 박춘근, 고재귀, 조정일, 김현우, 김태형, 유희경, 천정완, 조인숙, 임상미 등 한국예술종합학교 출신의 젊은 작가 9인으로 구성된 집단이다. 현재 희곡작가, 동화작가, 출판편집자, 소설가, 시인, 광고 카피라이터 등 다양한 형태로 활동하고 있지만 이들을 묶는 공통화두는 언제나 연극, 그 중에서도 극작이다.
이번에 선보이는 연극 <터미널>은 창작집단 독과 연극 <목란언니>의 전인철 연출가, 극단 맨씨어터 배우 등이 참여해 공동창작연극으로 완성됐다. ‘터미널’이라는 공간을 공통분모로 삼아 9인 9색의 세계를 펼친다. 특히 작가들이 하나의 키워드 아래 창작을 한다는 점이 돋보인다. 보기 드물게 단편 연극을 대거 묶어 선보인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10~20분 사이 단편의 모음을 통해 이들이 공통적으로 무대 위에 담아낸 것은 우리와 우리 사회의 이야기다. 24일 시사회에서 공개된 작품은 9편 중 6편이었다. 김현우 작가의 <러브러브트레인>, 고재귀 작가의 <터미널>, 박춘근 작가의 <은하철도999>, 조인숙 작가의 <소녀가 잃어버린 것>, 천정완 작가의 <소>, 유희경 작가의 <전하지 못한 인사> 등이 차례로 무대에 올랐다.
이번 작품은 서울 동빙고동 프로젝트박스 시야의 기획 프로그램으로 ‘시야 플레이’라는 타이틀을 달았다. 프로젝트박스 시야는 60석 규모의 소극장이지만 지원을 아끼지 않은 덕분에 무대의 질은 높다.
무대 전면에는 커다란 프레임을 설치되어 있고, 그 안은 박스 형태의 공간으로 꾸며진다. 박스 공간은 다시 무대 앞쪽과 계단으로 연결된다. 덕분에 공연을 보는 관객은 마치 터미널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박스 공간 안 스크린과 단순한 조명변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극작가의 말에 주의 깊게 귀 기울이게 한다. 무대에 배치된 두 개의 벤치는 각 작품의 필요에 따라 활용된다.
1인극 <러브러브트레인>은 KTX의 새로운 상품인 ‘러브러브트레인’의 정식 개통을 앞두고 시승 이벤트를 연다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홍보맨은 1등칸, 2등칸, 3등칸의 내부시설 간 명백한 차등을 유머러스하게 소개한다. 배우를 통해 작가의 낙관적인 시선과 감각적인 묘사가 이어지다 이윽고 ‘여러분 벗으세요, 벗어나십시오.’라는 메시지로 수렴된다.
이번 프로젝트와 같은 이름을 단 작품 <터미널>은 단편소설 같은 느낌을 자아내는 작품이다. 작품은 시골에 사는 남자와 베트남 결혼 알선업체 직원, 베트남 여자가 서울역에서 만나는 모습을 그린다. 처음의 화기애애하던 이들의 모습은 돈 거래가 진행되면서 차차 변질되는데 이 과정에서 각 인물에 대한 작가의 세밀한 내면심리 묘사가 돋보인다. 덕분에 자칫 뻔할 수 있는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극은 아이러니함을 지니며 마무리된다.
<은하철도999>의 경우 메텔과 철이의 등장으로 그야말로 포복절도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서울역에서 은하철도999를 기다린다는 재미있는 발상으로 시작된 이 작품에서는 지구를 떠나려고 해도 떠날 수 없는 메텔과 철이의 모습을 도시의 하류인생에 빗대며 상징적인 메시지를 남긴다. 시시각각으로 변주되는 은하철도999 주제가가 작품을 더욱 선명하게 한다.
<소녀가 잃어버린 것>은 지난 8월 <당신이 잃어버린 것>이라는 제목의 독회로 창작집단 독을 통해 이미 한 차례 선보였던 작품이다. 기억을 잃었다가 되찾은 한 친구와 20년 만에 해후한다는 내용은 동일하나 이번에는 서른 세 살 여고동창생들을 기차역으로 불러 모았다. 다소 설명적인 부분이 많아 아쉽긴 하지만, 잃어버린 20대와 20대에 잃어버린 것을 되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는 작품이다.
<소>는 ‘한 사람의 일생에 할 수 있는 노동에는 정해진 양이 있는데, 인간은 그 정해진 양을 넘기면 소가 된다’는 이야기를 우화적으로 그렸다. 극중에서는 점차 소가 되어가는 가족 구성원, 그리고 그 구성원을 거래의 대상으로 삼는 다른 가족의 모습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특히 소의 울음소리와 몸짓을 연기하는 배우들의 열연이 돋보인다.
<전하지 못한 인사>는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두 남녀 친구의 모습을 경쾌하게 그린다.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이지만 젊은 남녀 간 투닥거리며 주고 받는 대사가 극에 활기를 더한다. 재치 있는 대화와 연기는 시선을 끌지만 인물이 갑자기 속내를 꺼내놓으면서 감상적으로 급변하는 지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 밖에 세 편이 더해져 총 창작극 9편으로 구성된 창작집단 독의 <터미널>은 오는 25일부터 내달 10일까지 프로젝트박스 시야에서 공연된다. 극에서 표현한 다양한 인간군상들, 배우들의 교차 출연을 통한 연기변신, 그리고 독특한 작가 집단의 현재와 미래를 가늠해 보는 재미가 있다. 주최 프로젝트박스 시야, 제작 프로젝트박스 시야, 맨씨어터, 작 창작집단 독, 연출 전인철, 출연진 이명행, 김주완, 우현주, 서정연, 이창훈, 이은, 황은후, 유동훈 등(문의 744-4331).
(사진제공=프로젝트박스 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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