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박승원기자] 기술 경쟁력은 있으나 자금과 경영능력이 부족한 설립초기의 기업에 투자해 위험을 함께 부담하는 '벤처캐피탈'은 지난 1986년 창업지원법, 신기술금융지원법이 제정되면서 벤처기업들의 동반자 역할을 담당해왔다.
특히, 장기간 높은 사업 위험으로 인해 은행 등 일반 금융기관들이 벤처기업에 대한 지원을 기피하는 상황에서 벤처캐피탈은 벤처기업들의 자금줄 역할을 톡톡히 해내며 기업의 성장은 물론 해당 기업의 고용창출을 견인하는 등 국가경제 발전에 일조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들어 글로벌 경기침체 등 대외악재에 고질적인 업계의 관행과 정부의 규제 등으로 '벤처기업 지원'이라는 본래의 취지가 희석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벤처캐피탈의 순기능을 저하시키는 원인을 파헤치고, 이를 해소하기 위한 방안을 알아본다. [편집자주]
"이익이든, 손실이든 투자자가 책임을 진다는 것은 투자의 기본이다. 개인도 주식시장에서 돈 잃었다고 항의를 안 하는데 공공기관이 투자할 때 관행이라고 이런 일을 해도 되냐"
우선손실충당제에 대한 벤처캐피탈업계 관계자의 말이다. '우선손실충당제'는 투자기관(연기금, 공제조합 등)들로부터 자금을 유치해 벤처펀드를 만들 때 '손실의 대부분을 벤처캐피털이 책임을 지겠다'는 규정을 계약서에 명시하는 것을 말한다.
법이나 시행령이 아닌 일종의 업계 관행인 우선손실충당제는 벤처캐피탈업계가 개선돼야 할 규제나 관행 중 가장 시급하다고 손 꼽는 것 중 하나다.
이러한 관행은 벤처캐피탈이 손실 위험을 이유로 신설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를 기피하게 만든다. 더불어 벤처캐피탈의 투자 실패시 경영권 부실로 이어져 벤처 생태계의 위축을 야기할 수도 있다.
◇정책금융공사 등 일부 LP, GP 모집공고에 우선손실충당제 명시
우선손실충당제는 지난 1986년 5월 창업지원법 제정 당시 벤처투자시장의 실패를 보완하고, 민간 출자를 유도하기 위해 도입됐다.
당시엔 출자자(정부/기금·연금/공제회·벤처캐피탈 등)가 펀드인 조합을 결성해 운영하면서 손실이 발생하면 정부출자금, GP(무한책임투자자 : 벤처캐피탈), 기타 출자자 순으로 손실에 대한 충당금을 내게 했다.
하지만, 2000년 1월 창업법이 개정되면서 조합의 성과 및 손실을 조합원간 균등하게 분배한다는 취지로 정부 및 GP의 우선손실충당제 조항이 삭제됐다.
그럼에도 GP에 대한 우선손실충당 요구가 관행화됨에 따라 2009년 10월에는 모태펀드 기준규약을 개정해 모태펀드 출자분에 한해 우선손실충당금을 요구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정책금융공사, 국민연금, 사학연금과 같은 LP(유한책임투자자 : 연기금 등)들은 여전히 우선손실충당금을 요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로 정책금융공사는 올해 6월 일자리창출 효과가 큰 연구개발특구 소재 중소기업과 기술사업화 중소기업에 대해 투자하는 투자펀드의 위탁운용사 선정 공고문에 '약정총액의 5% 이상을 운용사(GP)가 우선손실을 충당한다'는 출자조건을 내걸었다.
한 벤처캐피탈업계 관계자는 "현재 모태펀드에서는 GP들에게 손실에 대한 충당금을 요구하지 않는다"며 "하지만, 벤처펀드가 리스크가 크다는 이유로 정책금융공사 등 일부 LP들은 GP 모집에 우선손실충당제를 요구하는 공고를 내고 있다"고 밝혔다.
◇신생 기업 투자비중 감소..업력 긴 기업에 투자 몰려
문제는 우선손실충당제가 벤처캐피탈 본래의 취지를 희석시키는 데 있다.
우선손실충당제에 따른 투자손실 부담으로 벤처캐피탈이 신설 벤처기업이 아닌 코스닥 상장을 앞둔 안정된 벤처기업에 투자를 늘리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0월 벤처캐피탈협회가 발표한 '벤처캐피탈 최근동향 및 활성화 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벤처기업의 업력별 신규투자(금액기준) 비중에서 업력 3년 이하의 초기 벤처기업의 비중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업력 3년 이하의 벤처기업에 대한 벤처캐피탈의 투자비중은 지난 2006년 30.3%에서 ▲2007년 36.8% ▲2008년 40.1%로 증가하다 ▲2009년 28.6% ▲2010년 29.3% ▲2011년 29.6% ▲2012년 28.3%(8월 현재)로 줄었다.
반면, 업력 7년을 초과하는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비중은 2006년 18.9%에서 2007년 25.1%로 증가하다 2008년 24.7%로 감소했다. 하지만, 2009년에 41.4% 급증한 뒤, ▲2010년 44.1% ▲2011년 44.3% ▲2012년 46.9%(8월 현재) 등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한 벤처캐피탈업계 관계자는 "관행적인 우선손실충당제가 벤처캐피탈의 기존 취지를 무색하게 한다"며 "이것으로 인해 벤처캐피탈이 어느 정도 성장한 벤처기업에만 투자하고, 투자손실 위험이 있는 초기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를 기피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벤처캐피탈의 투자를 받는 벤처기업들 역시 우선손실충당제의 폐해를 지적한다.
한 벤처기업협회 관계자는 "대형 연기금이 LP로 참여한 조합의 경우 벤처캐피탈이 우선손실을 직간접적으로 강요당하는 입장"이라며 "우선손실충당제가 먼저 해소돼야 벤처캐피탈들이 리스크 없이 초기 벤처기업에 투자를 많이 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벤처 생태계 위축 우려
더 심각한 점은 우선손실충당제가 벤처 생태계를 위축시킬 수 있다는 데 있다.
위탁운용사인 벤처캐피탈이 펀드의 자금을 운용하다 손실이 나면 충당금을 내야하고, 이는 곧 벤처캐피탈의 경영 부실을 야기한다. 나아가 벤처기업에 대한 벤처캐피탈의 투자를 위축시켜 국내 벤처기업 성장을 더디게 만드는 악영향을 불러오게 된다.
결국, 벤처 생태계를 위축시킬 수 있는 우선손실충당제를 폐지하고, 성과에 따라 GP를 차등 대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한 벤처캐피탈업계 관계자는 "전체적인 기금을 운용하는 LP들이 투자 손실을 GP에 부담지우는 것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면서도 "전체 벤처업계 발전을 위해서는 우선손실충당제 대신 성과가 좋은 GP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고, 성과가 부진한 GP를 차별대우를 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제언했다.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