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현의 바위그림)마지막 탐색, 또 만나자 오네가!
(백야의 땅, 박성현의 바위그림 시간여행-⑦)
2024-01-08 06:00:00 2024-01-11 14:06:22
북극 아래에 위치한 페노스칸디아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핀란드, 러시아의 콜라반도와 카렐리아 지역을 가리킵니다. 세계 곳곳에서 선사 인류의 바위그림이 발견된 것처럼, 이곳에도 수천 년 전 신석기인들이 남긴 바위그림이 있습니다. 그들은 물가의 돌에 무엇을, 왜, 새겼을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 질문을 품은 채 떠난 여정, 러시아 카렐리야의 오네가호수와 비그강, 콜라반도의 카노제로호수에 새겨진 바위그림과 노르웨이 알타 암각화를 향해 가는 시간여행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비 오는 날의 조바심
 
아직 찾아가야 할 암각화 지점이 여럿 남았는데 계속 비가 주룩주룩 내리니 애가 탔다. 주요 지점들을 둘러보긴 했지만, 한번 오기도 힘든 먼 곳인 데다 접근성이 좋은 편도 아니어서 이번에 가능한 한 많은 바위그림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그 많은 곳을 다 방문하기도 어렵고 전문가의 안내 없이 암각화를 찾아내기는 더욱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보존 상태가 어떨는지도 의문이다. 우리 국보인 반구대 암각화와 세계 곳곳의 암각화 상황이 그렇듯이, 바위그림을 훼손으로부터 지켜내고 잘 보존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다. 
 
지의류로 뒤덮힌 코치콥나볼록반도의 바위와 암각화를 찾으러 가는 안톤 선장 가족.사진=박성현
 
나는 안톤 선장에게 커다란 고니 그림으로 유명한 코치콥나볼록반도와 그 밖의 다른 섬들에 배로 데려가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새로 도착하는 손님들을 데려오기 위해 혹은 식료품을 구입하기 위해 배로 카르셰보 마을을 오가야 해서 늘 바빴고, 나는 그가 시간이 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오전에 마을에 갔던 그가 돌아왔기에 붙들고 또 사정했다. “저는 코치콥나볼록에 가야 해요. 암각화를 더 봐야 하니 다른 섬에도 가야 하고요.” 코치콥나볼록에서 가까운 샬스키 마을이면 배를 가진 주민들이 많으니 여기저기 문의해 볼 수 있었겠지만, 이곳은 마을에서 떨어진 안톤 선장의 야영장이라 그의 배로 가지 않으면 달리 방도가 없다. 물론 배를 타는 비용과 투어비는 별도로 지불한다. “비 때문에 안 돼요.” 그에게 시간이 나니 이번엔 비가 문제다. 오락가락하는 비가 그칠 때마다, 안톤 선장이 눈에 띌 때마다, 그를 붙들고 늘어졌다. “비가 그쳤어요!” 그러면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온다. 벌써 오후 5시가 넘었으니 오늘도 공쳤구나, 실망에 잠겨 포기하려는데 안톤 선장이 드디어 출발하겠다한다! 그의 아내 마리아와 딸 아미나도 처음 가보는 곳이라 함께 따라나섰다. 나쁜 날씨 속에 운항을 부탁해 미안했는데, 대신 이 기회에 그들이 가족나들이를 하게 된 셈이라 미안한 마음이 조금 상쇄됐다.
 
암각화를 찾으러 가는 안톤 선장과 딸 아미나. 코치콥나볼록반도. 사진=박성현
 
출발할 땐 날이 잠시 갰지만 귀가할 때까지 내내 비가 흩뿌리다 멈추다를 반복했다. 비바람에 호수 물결이 출렁이고 어두운 하늘 탓에 시야가 선명하지 않다. 풍랑이 이는 바다에서처럼 조심해야 해서 안톤 선장이 수시로 보트 천장에 나 있는 창을 열고 머리를 내밀어 관찰한다. 날이 맑으면 캠프에서 30분 정도 걸린다는데 그보다 조금 더 걸려 도착했다. 오네가호수 암각화 단지의 최북단인 코치콥나볼록반도는 호수로 흘러들어가는 보들라강의 어귀에 위치해 있다. 반대편 강둑에는 샬스키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에 머물면서 마을 주민의 배를 타고 이곳의 바위그림과 더 멀리 떨어진 곳의 암각화 지점들을 둘러볼 수도 있다.
 
코치콥나볼록반도의 4미터 고니는 어디에?
 
코치콥나볼록반도의 암각화는 남동쪽 곶과 북서쪽 곶으로 나뉘는데, 북서쪽 곶은 고니 그림이 많아 레베지니노스(고니곶/백조곶)라 불린다. 남동쪽 곶의 주요 암각화는 1983년 카렐리야 고고학자 사바테예프가 이끈 탐사단에 의해 발견됐지만, 코치콥나볼록반도의 암각화 대부분은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전반 사이에 에스토니아 선사미술협회의 연구자 및 애호가들에 의해 발견됐다. 이들은 연구 성과를 1998년 책으로 출판했고 2019년에는 베소프노스에 관한 연구서도 발간했다. 오네가호수와 지리적으로 가깝고 구소련의 일부이긴 했지만 에스토니아 연구자들의 기여는 인상적이다. 이후, 역시 카렐리야 고고학자인 로바노바가 이끄는 조사단은 에스토니아 선사미술협회가 발견한 형상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사실은 암각화가 아니라 암석 표면의 자연적 손상임을 밝혀냈다. 2015년에 출판된 로바노바의 책에는 코치콥나볼록 암각화의 표현물이 총 219개로 기록돼 있다.
 
코치콥나볼록반도에서 고니를 찾아 보여주는 안톤 선장. 사진=박성현
 
그러나 안톤 선장이 겨우 찾아 보여준 것은 큰 고니 한 마리와 알아보기 힘들게 희미한 고니, 엘크 등 몇몇 이미지에 불과했다. 찾아낸 고니가 큰 편이긴 하지만 내가 보고 싶었던 가장 큰 고니, 즉 꼬리에서 머리까지 4.12m인 그 고니는 아니다. 자료상으로는 이곳에 주로 고니 중심의 물새가 많고 그 밖에도 엘크와 많은 의인화 인물들, 곰과 뱀, 노 젓는 사람들이 탄 배가 있어야 하는데 다들 어디 갔을까? 단지 궂은 날씨 탓만이 아니라 나중에 알고 보니 이곳의 암각화는 보존 상태가 상당히 나쁜 수준이라 한다. 물과 얼음, 풍화 작용으로 암석이 침식되고 지의류가 바위를 뒤덮어 많은 이미지가 부분적으로 파괴되고 알아보기 힘든 상태가 됐다. 
 
지의류에 덮인 코치콥나볼록반도의 바위. 고고학자들이 암각화 사본 작업을 한 곳은 색이 밝아 암각화를 찾을 때 팁으로 활용할 수 있다. 사진=박성현
 
코치콥나볼록반도의 남동쪽 곶에서도 신석기인들의 정착지가 발견되었는데 우스티-보들라 III이라 불린다. 이 정착지는 오랜 기간에 걸쳐 여러 번 사람이 거주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코치콥나볼록의 암각화가 현재의 물가보다 약 1-2m 높은 곳에 위치한 바위에 새겨져 있는데, 이 암각화의 높이가 정착지의 고도와 일치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코치콥나볼록의 암각화 근처에서도 부싯돌 도구와 구멍·빗살무늬토기 조각 등 유물이 발견돼 이 주거지를 거쳐 간 사람들이 바위그림의 주체였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 4m 고니를 비롯해 그림들을 더 찾아보고 싶었지만 빗방울이 거세지기 전에 안톤 선장이 길을 서둘렀다. 이번엔 나도 준비가 부족했다. 다음에 올 기회가 있다면 자료책의 모든 지도를 수십 장 다 가져와 찾아봐야겠다 싶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게 하나 있다. 상대적으로 나중에 새겨진 것으로 여겨지는 이곳의 고니 그림은 단순한 스타일로 윤곽선만 표현된 게 많아서 예술성은 좀 떨어지는 편이라, 그림을 못 본 것이 아주 조금쯤 덜 아쉽다는 점이다.
 
코치콥나볼록반도에서 바라본 광경. 사진=박성현
 
오네가와의 작별! 백해의 암각화를 향해 떠나다
 
돌아오는 길에 안톤 선장은 볼쇼이구리섬에 잠시 들렀다. 한 곳이라도 더 보고 싶은 나로서는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결과는 엘크 한 마리와 역시 알아보기 힘든 이미지 두어 개로 그다지 성과가 없었다. 암각화를 거의 찾지 못했지만 빗줄기가 더 굵어질까 봐 몇 분 채 머물지도 못한 채 다시 출발하게 돼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래도 빗속에서 암각화를 찾으려 애써 준 안톤 선장이 고마워서 나는 자청해 그들의 가족사진을 찍어 주었다. 그들로서는 여름철 가장 바쁘게 일하는 시기에 잠시 ‘암각화 찾기’ 가족나들이를 즐길 수 있어 기분전환이 됐을 수도 있겠다. 빗속이긴 했지만 그만큼 또 운치도 있지 않겠는가. 
 
코치콥나볼록반도에서 귀가하는 길에 들른 볼쇼이구리섬의 모습. 사진=박성현
 
오네가호수를 떠나기 전날, 역시 비가 내리는 중이었지만 나는 스스로 갈 수 있는 한 곳을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캠프에서 호숫가를 따라 약 20분가량 걸어가면 또 다른 곶인 가지노스가 나온다. 가지노스 암각화 지점은 바위들이 워낙 미끄러워 비가 올 땐 절대 가지 말아야 한다고 들었기 때문에 번번이 포기했는데, 다음날이면 떠나야 하니 한번 시도는 해야겠다 싶었다. “정말 조심해야 돼요! 발이 미끄러져 물에 한번 빠지면 큰일 나요!” 가이드 게르만도, 알바생 마샤도, 모두들 강하게 경고해 나는 정말 조심조심했다. 그런데도 몇 번을 미끄러지면서 간담이 서늘해졌다. 결국 카메라용 휴대폰의 삼각대를 포기하고 기다시피 이동하면서 암각화를 찾아보았다. 물가 쪽 바위를 살펴봐야 하는데 너무 미끄러워 위쪽의 바위들만 둘러보니 그림이 영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위쪽에서 미끄러졌기에 망정이지, 물가에서 미끄러지면 그대로 물속으로 직행이라 험한 물살에 휩쓸려갔을 것이다. 만용을 부리다 사고를 당하면 안 되니 나는 엉금엉금 기어 더 나가는 것을 중단하고 캠프로 돌아왔다.
 
가지노스곶 바위와 오네가호수. 바위가 매우 미끄럽다. 사진=박성현
 
오자마자 궁금해 게르만을 찾았다. 긴가민가하면서 찍은 사진들을 그에게 보여 주니 주의 깊게 보다가 아닌 것 같다고 고개를 젓는다. 역시 실패다. 그림 자체가 몇 개 없는 지점이라 별 기대는 안했지만, 배 없이 스스로 찾아갈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니 가본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해 질 무렵 베소프노스를 다시 방문해 그곳의 그림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돌아오니 마지막 저녁식사로 안톤 선장이 직접 만든 러시아식 팬케이크 블리니가 기다리고 있다. 나는 모두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다음날 아침 일찍 다시 배를 타고 출발했다. 왔던 길을 되돌아나가야 한다, 백해로 가기 위해!
 
가지노스에서 바라본 오네가호수 전경. 사진=박성현
 
박성현 경상국립대 학술연구교수 perceptio@hanmail.net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나볏 테크지식산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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