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임유진 기자] 미국이 '중국으로 한국 기업이 반도체 대체 물량을 수출하지 말아 달라'고 한국에 요청했다는 외신 보도가 나오면서 국내 반도체 업계가 뒤숭숭합니다. 반도체 업계는 미국의 이런 무리한 요구에도 눈치를 보느라 전전긍긍 속앓이를 하고 있는데요.
중국은 우리의 최대 수출 상대국인데다 14억에 달하는 인구 규모를 감안하면 결코 놓칠 수 없는 시장입니다. 또 마이크론이 중국 시장에서 철수하고 그 부족분을 우리 기업이 메울 수 없게 된다면, 마이크론 제재에 따른 반사이익도 못 누릴 처지에 놓이게 된 겁니다. 우리 정부가 국내 기업들의 우산의 돼줘야 하지만 현실은 난망한 상황입니다. 미국의 대중 반도체 규제와 중국의 마이크론 안보 심사 보복조치, 미국의 판매 제한 맞대응까지 미·중 갈등의 한복판에 우리 반도체가 진퇴양난에 빠진 셈입니다.
조바이든 미국 대통령.(사진=연합뉴스)
미국 "반도체 부족 메우지 말라"...중국과 관계 삐거덕에 반사이익도 못 누릴 판
25일 업계에 따르면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23일(현지시각) 미국이 윤석열 대통령의 방미를 앞두고 '중국이 미국 마이크론의 반도체 판매를 금지해 반도체가 부족해질 경우 한국 반도체 기업이 그 부족분을 채우는 일이 없게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보도했습니다. 현재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미국의 마이크론, 세 회사가 과점 체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앞서 미국은 지난해 12월 중국 반도체 기업 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YMTC)를 블랙리스트에 올려 중국의 첨단 3D낸드플래시 제조 역량을 제재한 바 있습니다. 이에 중국은 보복 조치로 마이크론이 중국에 판매하는 반도체 칩들이 국가 안보를 침해하는지 여부를 조사 중인데요.
미·중 갈등 고조 상황을 감안하면, 중국 내 마이크론의 판매금지 조처가 내려질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입니다. 이에 따라 중국이 마이크론의 판매를 금지하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중국에 반도체 판매를 확대하지 못하도록 해달라고 미국 정부가 요청했다는 게 요지입니다.
결국 미국의 이 같은 요청은 삼성전자와 하이닉스가 마이크론의 빈자리를 채우지 않도록 해 중국의 물품 대체 시도를 무력화하겠다는 겁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마이크론 대신 반도체를 공급할 경우, 중국이 자국 산업이 받을 피해에 대한 부담 없이 제재를 내릴 것이란 판단을 한 것이지요. 미·중 간 경제 갈등에서 미국 편에 서 달라는 건데요. 글로벌 경기 위축으로 지난해 10월부터 시작된 수출 감소세로 무역적자가 쌓이는 가운데, 우리 기업으로선 주요 교역국인 중국과의 갈등의 골이 깊어질 위기에 처하게 됐습니다.
마이크론 반도체.(사진=연합뉴스)
중국 "미국 명령 따르면 한국기업 타격"…업계 "반시장적 요구"
중국은 거세게 반발했는데요. 마오닝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24일 정례 브리핑에서 미국을 향해 "전형적인 과학기술 괴롭힘 행태"라며 "결연한 반대"를 표명했습니다. 마오닝 대변인은 "미국이 자국의 패권과 사익을 수호하기 위해 디커플링(decoupling·탈동조화)을 강요하고 대중 견제에 협력하도록 동맹국을 협박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다"고 항의했습니다.
관영매체 글로벌타임스도 25일 "윤석열 대통령이 반도체 분야의 중국 봉쇄 전략에 협조하라는 미국의 더 큰 압박에 직면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또 전문가를 인용해 "윤 대통령이 국익을 우선시하는 지도자라면 한국 기업들의 중국 내 사업을 제약하라는 미국의 명령에 따르지 않을 것"이라며 "미국의 대중국 반도체 디커플링에 동참할 경우 한국 반도체 대기업들은 엄청난 손실을 떠안게 될 것"이라고 보도했습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미국 정부 요청에 대해 들은 바 없다고 말을 아꼈습니다. 다만 익명을 요구한 업계 관계자는 "보도 내용이 사실이라면 미국이 대중 견제를 위해 다른 나라의 엄연한 기업 활동을 제한하는 반시장적 요구를 한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 관계자는 "안보 동맹인 미국과 주요 교역국인 중국 사이에서 양자택일 강요받게 됐다"면서 "그렇지 않아도 반도체법·인플레감축법(IRA) 등으로 한국 기업에 불리한 조항들이 줄줄이 생겨나고 있단 점이 우려스럽다"고 언급했습니다.
다른 관계자 역시 "미국과의 동맹 관계를 유지하는 일은 바람직하지만, 정부가 미측의 무리한 요구에는 거절 의사를 분명히 하거나 자국산업 보호를 위한 구체적인 조치 등 외교력을 발휘해야 하는데 현재 수준은 미흡하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중국이 여전히 우리 최대 수출국임을 감안하면 미·중 갈등에 휘말릴 경우 손실이 막대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임유진 기자 limyang83@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의중 금융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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