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미나리’가 드디어 제대로 사고를 칠 준비를 완벽하게 끝마쳤다. 순 제작비 200만 달러(한화 약 22억)로 제작된 ‘미나리’는 국내 제작 규모로만 따져도 저예산 영화에 불과하다. 할리우드 제작 규모에선 초 저예산 수준이다. 마블 영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출연료로만 5000만 달러(한화 약 536억)를 받았다고 하니 ‘미나리’ 제작비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하지만 돈의 규모가 완성도와 공감 감동의 비례를 이끌어 내진 않다는 걸 ‘미나리’가 증명하고 있다. 15일 발표된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 최종 후보 발표에서 작품상과 감독상 남우주연상과 여우조연상 각본상 음악상 등 총 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됐다. 이 가운데 남우주연상(스티븐 연)은 아카데미 역사상 최초의 아시아계 배우 후보 선정, 여우조연상(윤여정)은 한국 여배우 최초이자 아시아 여배우로선 두 번째다.
미국을 ‘홀릭’시키고 한국을 들썩이게 만들었으며, 아카데미를 점령할 ‘미나리’ 속 숨은 뒷얘기를 전한다.
영화 '미나리' 속 윤여정. 사진/판씨네마(주)
입으로 ‘밤’ 먹이는 장면…미국 ‘경악’
국내에선 가을이면 어디에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밤. 하지만 미국에선 쉽게 구할 수도 없고 낯선 음식이기도 하다. 특히 이 밤을 먹는 장면에선 서양과 동양의 문화 차이를 느끼게 하는 모습이 ‘미나리’에서 등장한다.
‘미나리’에서 모니카(한예리)와 제이콥(스티븐 연)이 일을 위해 두 아이들을 돌볼 시간이 더 부족해졌다. 결국 두 사람은 한국에 사는 모니카의 친정 엄마 ‘순자’(윤여정)를 초청한다. 순자는 미국에서 딸과 사위 그리고 손자 손녀와 함께 살게 됐다. 하지만 그 다음에 이어진 장면에선 미국 관객들을 경악케 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반면 국내 관객들은 미소를 머금게 하는 장면이다. 바로 순자가 한국에서 갖고 온 찐 밤을 입으로 잘라 씹어 손자 데이빗에게 건낸다. 극중 데이빗은 이 모습에 기겁을 하고 도망친다. 이 장면은 시나리오에 나온 것이 아닌 실제 윤여정이 결혼 후 미국에서 생활할 당시 직접 본 경험을 떠올려 가져다 쓴 것이다.
윤여정은 지난 달 국내에서 열린 화상 기자간담회에서 이 장면에 얽힌 뒷얘기를 공개했다. 윤여정은 “미국 생활 당시 친구 어머니가 한국에서 와서 손자한테 그렇게 밤을 주는 모습을 봤다”면서 “아일랜드 출신이던 친구 남편이 너무 놀라면서 ‘너희 나라는 그래서 간염이 많다. 너무 더럽다’고 얘기를 한 것이 기억이 났다”고 웃었다. 당시 기억은 현장에서 정이삭 감독과 얘기를 나누면서 영화에 직접 적용됐다.
영화 ‘미나리’의 시그니처 대사이자 주제를 명확하게 담아낸 “미나리는 원더풀이란다”란 극중 ‘순자’의 대사도 사실상 윤여정이 정이삭 감독에게 제안한 대사다. 극중 70대 할머니이지만 ‘원더풀’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순자’ 캐릭터를 해석한 윤여정이 즉석에서 정 감독에게 제안해 만들어 진 ‘미나리’의 명대사 명장면이다.
영화 '미나리' 출연 배우들과 정이삭 감독. 사진/판씨네마(주)
정이삭 감독 “마음대로 하세요”
‘미나리’로 미국 내에서만 무려 32개 연기상을 이미 거머쥔 윤여정이다. 사실 ‘미나리’ 시나리오에는 영화 속 ‘순자’의 모습과는 조금 다른 설정이 담겨 있었단다. 하지만 이 틀을 깨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미나리’ 시나리오를 쓴 정이삭 감독이다.
‘미나리’의 순자는 정이삭 감독의 외할머니가 롤모델이다. 그의 외할머니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남편을 잃었다. 윤여정은 촬영 전 정 감독에게 그의 외할머니에 대한 얘기를 전해 듣고 ‘흉내를 내야 할까’란 의견을 전했다고.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단다. 정 감독은 “(절대 그럴 필요 없다) 선생님 마음대로 하시라”라고 했다고. 참고로 정 감독은 유타대학교 송도 캠퍼스에서 영화를 가르치던 2018년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해 윤여정을 만나 캐스팅을 제안했다.
틀을 깬 정 감독의 한 마디에 윤여정은 자신이 생각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오롯이 ‘순자’에게 투영시켰다. 윤여정이 만들어 낸 ‘순자’는 그렇게 땅에 발을 딛고 선 인물이 돼 버렸다. ‘미나리’의 ‘순자’를 연기한 윤여정을 향해 ‘한국의 메릴 스트립’이란 찬사까지 쏟아내게 만든 미국 언론의 평가. 아이러니하게도 ‘미나리’의 시나리오를 쓴 정이삭 감독 단 한 마디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그 한마디를 제대로 소화해낸 데뷔 55년 차 윤여정의 내공이 더해졌다.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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