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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게이션)‘콜’, 역설에 역설이 만든 가장 완벽한 ‘패러독스’
밀도 높은 압축 설계 ‘타임슬립’, 강력한 서사+배우+연출
현실감 높은 ‘타임슬립’…선택과 대가의 문제 그리고 ‘희망’
2020-11-25 00:00:01 2020-11-25 00:00:01
[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시간과 공간이 상대적임을 밝히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이해하지 않아도 영화 은 충분히 즐길 수 있다. 무엇보다 타임슬립이란 고루한 소재를 끌어왔음에도 충분히란 적정선과 즐길 수 있다란 필요조건을 모두 만족시킨다. 하지만 이 영화가 가진 진짜 힘은 사실 다른 지점이다. 2016년 단편 몸 값한 편으로 국내 영화제를 발칵 뒤집어 놓은 이충현 감독의 혀를 내두르는 설계가 압권이다. 그리고 이 압권을 넘어선 배우 전종서의 광기가 스크린을 뒤집어 놓는다. 배우 박신혜의 진폭을 가늠키 어려운 연기가 관객의 혼을 휘어 잡는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 압권의 압권의 압권을 넘어선 압도적인 압권은 영화 마지막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말이다. 이 영화는 이충현 감독이 고밀도로 압축 설계한 가장 완벽한 타임 패러독스를 증명한다. 마지막 결말이 그 방점을 찍는다. 그 이전 처음부터 결말 직전까지 모든 단위로 그 방점을 설명한다. 쉽게 볼 수 있지만, 결코 쉽게 넘어갈 수 없는 가장 완벽한 설계로 구축된 이다.
 
 
 
우선 은 서사가 강력한 스토리 영화. 하지만 이건 영화를 본 입장에선 결코 맞는 표현이 아니다에 힘을 줄 수 밖에 없다. 강력한 스토리가 앞세워져 있지만 그걸 힘으로 찍어 누르고 짓밟는 캐릭터 힘이 더 도드라진다. 그럼에도 캐릭터가 서사를 집어 삼키는 오류가 발생하진 않는다. 그건 오롯이 설계가 완벽한 구조 속에 딱 들어 맞는 재료(배우)의 배합 비율(연기) 때문일 것이다. 그 중심이 영화의 투톱 박신혜전종서.
 
은 두 명의 여성이 시간을 도구로 격렬하게 부딪치는 전쟁이다. ‘타임슬립이라고 부르지만 시간을 매개체로 한 전쟁이다.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를 지나 미래로 흘러간다. ‘에서도 명제는 확실하다. 과거 오영숙(전종서)만이 현재이자 미래의 서연(박신혜)에게 전화를 걸 수 있다. 뒤바뀐 과거를 통해 현재이자 미래가 바뀐다. 주도권은 당연히 영숙이 쥐고 있다. 하지만 서연도 무기는 있다. 과거의 영숙 시점에선 지금의 서연은 미래다. 미래는 과거를 알고 있다. 두 사람의 치밀한 두뇌 전쟁은 그래서 세밀하고 치밀하다.
 
영화 '콜' 스틸. 사진/넷플릭스
 
시작은 한 통의 전화다. 서연은 죽음을 앞둔 엄마(김성령)를 만나러 시골집으로 온다. 그 집에서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이상한 전화다. 알 수 없는 외침이 들려온다. 장난 전화일 거다. 하지만 반복된다. 이제 서연은 묘한 경험을 한다. 그리고 알게 된다. 현재의 서연과 전화기 너머 영숙은 같은 공간에 있단 사실을. , 두 사람 사이 존재하는 것은 20년이란 시간의 벽’. 두 사람은 그 벽을 사이에 두고 묘한 우정을 쌓는다. 하지만 우정은 곧 집착이 된다. 영숙은 서연의 현재를 바꿔준다. 서연의 현재는 뒤바뀌고, 그는 어둡고 침울한 현실에서 벗어나 밝고 행복한 또 다른 현실을 맞는다. 영숙을 통해 현실의 돌파구를 찾던 서연 입장에서 영숙은 이제 충분조건일 뿐이다. 꼭 필요한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영숙은 그런 서연의 변화를 곱지 않게 느낀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난 줬다. 그런데 받는 게 없다. 집착이 등장한다. 하지만 집착이 아니다. 영숙은 태생적으로 비뚤어진 존재다. 그의 엄마(이엘)도 사실 그걸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영숙은 이내 폭주한다. 그는 서연의 현재이자 자신의 미래를 마음대로 조종한다. 현실은 순식간에 뒤바뀐다. 이제 현실에 존재하는 서연에게 현실은 현실이 아니다. 현실은 곧 영숙이다. 두 사람은 20년 시간을 사이에 두고 절대 만날 수 없는 존재다. 하지만 영숙과 서연에게 시간의 벽은 이제 의미가 없다. 두 사람은 그 벽을 두고 서로를 막아서기 위한 잔인한 전쟁을 펼친다.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기기묘묘한 상황은 걷잡을 수 없다.
 
영화 '콜' 스틸. 사진/넷플릭스
 
타임 패러독스로 정의한 것은 역설과 역설이 쌓이고 쌓이면서 참과 거짓의 균열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과거를 기준으로 지금은 미래가 되고, 지금을 기준으로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에선 과거가 현재의 미래를 조종한다. 현재에서 과거를 움직이기까지 한다. 과거와 현재가 톱니처럼 맞물리고 또 맞물린 톱니가 치고 올라가는 장면의 연속은 시간이란 대전제의 폭을 무한대로 확장하면서 관객들에게 의 세계관을 현실로 인식시킨다.
 
의 세계관이 현실로 인식되는 착각은 의외로 간단하다. 다른 얘기를 그려온 타임슬립장르에서도 등장한 선택의 문제다. 기존 타임슬립에서도 선택은 등장한다. 하지만 에선 선택과 함께 한 가지를 더 추가했다. 대가의 무게가 등장한다. ‘에선 좋은 선택도, 나쁜 선택도 없다. 그저 선택이 등장한다. ‘영숙의 선택이 이라고 규정할 수도 없고, ‘서연의 선택은 이라고도 확신할 수 없는 이유는 대가 때문이다. ‘영숙의 선택으로 인해 뒤 바뀌어진 미래(현재)의 변화, ‘서연의 선택으로 인해 과거가 달라지는 반응은 모두가 감당하기 힘든 대가로 다가온다. 그 대가를 통해 이 말하고 싶은 지점이 바로 희망이다. 과거를 기준으로 미래, 즉 서연의 현실은 영숙에겐 희망이다. 현재를 기준으로 과거, 즉 영숙의 현실도 서연에겐 희망이다. 모두가 지금을 바꿀 수 있는 희망을 향한 몸부림이다. 그 몸부림이 언뜻, 그리고 소리 없이 우리 모두의 희망을 자극한다. 때문에 타임슬립이란 의 허무맹랑함이 기괴할 정도로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이유가 된다.
 
영화 '콜' 스틸. 사진/넷플릭스
 
패러독스를 차지하고서도 주목할 부분은 또 있다. 이 영화의 균형감이다. 영화는 일반적으로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감독의 영화’ ‘배우의 영화그리고 서사의 영화. ‘은 밀리그램의 오차까지 잡아냈을 정도로 이 세 가지의 균형점을 정확하게 잡아냈다. 앞서 언급한 지점이 서사의 영화를 설명하고 있다면 그 다음은 배우의 영화. ‘영숙을 연기한 전종서, 그리고 서연을 연기한 박신혜의 연기다.
 
일반적으로 연기 베테랑조차 작품 속 배역을 소화하는 과정에선 찰나의 틈을 보일 수 밖에 없다. 배우가 배역이 될 수는 있지만, 배우가 그 배역 자체는 아니다. 그 배역과의 거리를 얼마나 좁히는 가의 문제만 남는다. 전종서 박신혜 두 사람에게 그 거리, 즉 간극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에서 두 사람은 시시때때로 일반적은 연기 호흡의 그것을 넘어선 이상한 지점을 선보인다. 이상함은 연기가 아닌 실재. 배우가 쏟아내는 대사가 아닌, ‘영숙서연을 연기하는 전종서와 박신혜가 아닌 오롯이 이란 실재하는 세계 속의 인물로서 서로에게 악다구니를 치고 또 무릎 꿇고 빌고 또 악랄한 웃음을 터트린다. 이건 두 사람이 영화와 현실을 가르는 4의 벽을 허물어 버리는 경험으로 관객들에게 다가올 것이다. 두 사람의 대사와 톤 그리고 호흡의 처리는 분명, 기존 연기 패러다임과는 전혀 다른 그것을 선보인다.
 
영화 '콜' 스틸. 사진/넷플릭스
 
마지막 감독의 영화는 이 모든 것을 하나부터 열까지 진두 지휘한 이충현 감독의 능수능란함이다. 역설과 역설이 더해지면서 참과 거짓의 경계를 허물어 버리고, 두 배우의 인간적 정체성마저 깨트려 버린 감독의 연출은 데뷔작이란 타이틀이 더해지면서 섬뜩함을 넘어 이상할 정도란 단어 외에는 설명이 불가능한 지점을 만들어 버렸다. 그 이상함의 끝판은 영화 마지막 쿠키 영상이 만들어 낸 가장 완벽한 역설의 마침표. ‘끝났다는 심리적 마침표를 감독과 이 영화는 정확하게 타깃으로 삼았다.
 
은 분명히 진부한 타임슬립이다. 하지만 은 진화를 선택했다. 단언컨데, 이 영화의 밀도는 시간의 경계도 무의미하게 만들 정도다. 오는 27일 넷플릭스 공개.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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