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우선 ‘도대체 몇 살인데 직장인 콘셉트를’이란 의문이 들었다. 당연히 착각이었다. 2006년 영화 ‘괴물’ 속 이미지가 아직도 너무 강했나 보다. 아역배우 출신의 숙명이라면 숙명이겠지만, 배우 고아성은 올해 29세다. 내년이면 30대에 접어든다. 워낙 동안이라 그랬을 수도 있을 듯싶다. ‘벌써 30대냐’는 질문에 쑥스러운 웃음으로 대신하는 고아성이다. 먼저 한 가지 달라진 점은 분명히 보였다. 워낙 수줍음을 많이 타는 성격 탓에 질문을 해도 제대로 답변을 하기 힘들어 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 때문에 귀를 기울이고 ‘정말’ 잘 들어야 들릴 듯 말 듯 했으니. 이 역시 웃는다. 그랬었단다. 하지만 영화 ‘삼진그룹영어토익반’을 작업하면서 극중 ‘이자영’처럼 꽤 많이 외향적으로 변한 듯했다. 본인도 인정한다. 뭐가 어떻게 자신을 바꿨는진 모를 일이라면서. 흔히 말하는 배역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그런 느낌은 아니다. 며칠이 걸릴지 아니면 몇 달 뒤가 될지 모르지만 다시 예전의 고아성으로 돌아갈 수도 있을 것이란다. 물론 지금의 고아성이 더 편해 보였다. 여유로워 보였다. 그리고 분명히 성숙해 보였다. 29세의 여배우에게 ‘성숙’이란 단어를 쓰기가 무례한 표현일 수도 있지만 분명히 그래 보였다. 고아성은 어쩌면 이제서야 첫 번째 껍질을 깨트리고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배우 고아성.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언론 시사회 이후 쏟아지는 호평은 주연 배우인 고아성을 분명히 들뜨게 했다. 얼굴에 특유의 미소가 가득했다. 당연히 주연 배우로서 지닌 무게감은 작품의 흥행과 결과물의 완성도, 그리고 주변의 평가로 시작된다. 그 시작이 아주 좋다. 연출을 맡은 이종필 감독과는 함께 작업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잘 알고 지냈다. 이번 시나리오를 받으면서 뭔가 조짐이 괜찮았단다. 제목도 아주 마음에 들었고.
“제목이 되게 묘하잖아요(웃음). 감독님과 함께 작업한 적은 없는데 잘 알고 지낸 사이에요.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의외다. 감독님이 이런 영화를 찍으려고 하시는구나’ 싶었죠. 그리고 다 읽고 나자, ‘제목은 페이크였구나(웃음)’란 생각이 딱 들었어요. 처음 시나리오 느낌은 밝고 유쾌했지만 그 뒤에 이면이 있잖아요. 그게 너무 강하게 다가왔어요. ‘이건 내가 꼭 연기로 풀어봐야겠다’는 욕구가 컸죠.”
배우 고아성.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1995년이 배경이다. 지금과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하늘과 땅 차이였던 시절이다. 29세의 고아성이 비록 연기지만 여성으로서 영화에서 겪은 상황은 지금의 2020년이라면 사실 ‘말도 안되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1992년생으로 영화 속 배경 당시에는 겨우 네 살이었다. 주변 어른 들에게 전해 들은 말도 도움이 많이 됐다. 그럼에도 기억에서 울컥 했던 몇 장면은 아직도 생생하다며 웃는다.
“진짜 연기지만 정말 울컥해서 눈물이 나올 뻔한 장면이 있었는데, 김태훈 선배가 저한테 ‘아가씨 담배 한 갑만 사다 줘요’란 대사가 너무 가슴 아팠어요. 저 진짜 태훈 선배님 너무 좋아하는데, 그 순간만큼은 너무 서운해서 하하하. 그 외에도 전부 신기한 것 투성이였죠. 영화 ‘오피스’때 사무실을 경험했지만, 1995년의 회사 사무실은 정말 다르더라고요. 여직원들의 주 업무도 지금 생각하면 참 씁쓸했어요.”
배우 고아성.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속 여직원들의 주된 업무가 쓰레기 치우기, 커피타기, 담배 심부름, 구두 심부름, 서류 정리 등등이다. 같은 여성으로서 그 시대를 살아온 윗세대의 고충이 고스란히 느껴졌다고. 사실 이런 큰 지점은 연기로 커버할 수 있지만 정말 디테일한 부분은 따로 있었다. 영화 속에서 전혀 느끼지 못하고 지나갈 부분을 많은 선배 남자 배우들이 아이디어와 정보 수집을 통해 고아성을 중심으로 한 여성 3인방 주연들에게 전수해 줬다고.
“김원해 선배님이 정말 많은 아이디어를 주셨어요. 실제로 선배님 지인 분 중에 딱 그 당시에 대기업에 근무하셨던 여성분이 있으셔서 많은 부분을 도움 받았어요. 당시 고졸 말단 여직원은 전화기를 받을 때 무조건 왼손으로 받아야 한다는 점도 있었죠. 왜 그런지 아세요?(웃음) 오른 손으론 받아 적어야 하니까 그랬었대요. 그리고 지금은 사이드미러라고 하지만 그땐 무조건 백미러라고 불렀단 점도 흥미로운 디테일이고. 하하하. 또 실제로 아침마다 체조도 했대요. 정말 신기하죠.”
배우 고아성.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그렇게 신기하고 생소한 공간에서 혼자 있었다면 아마 견디기 힘들었을지 모른다며 웃는다. 영화 속 3인방 이자영(고아성)과 함께 유나를 연기한 이솜 그리고 보람을 연기한 박혜수가 있었기에 든든한 버팀목이 됐단다. 세 사람은 극중에서 유쾌한 에너지를 뿜어내면서도 각자의 확실한 역할을 통해 사건을 해결하고 위험에 대처한다. 누구 하나 빠짐이 없이 완벽한 합을 이룬다.
“말씀하신 대로 저를 포함해 세 명의 합이 정말 중요했어요. 사건의 핵심은 제가 연기한 ‘자영’을 통해 시작하지만 과정부터 결과까지의 끌고 가는 동력은 유나와 보람이 있었기에 가능했죠. 처음 두 분과 만났을 때 정말 30분 정도 지나자 우리 모두가 ‘이게 되겠다’ 싶었어요. 저희 모두 스타일이나 연기 성격 모두 다른데, 이 영화를 바라보는 관점이 같았어요. 이건 여성 영화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얘기를 담은 영화라고 생각했어요.”
배우 고아성.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개연성이란 기준을 따지고 든다면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일부 관객들이 흡집을 잡을 순간도 등장은 한다. 자영이 목격한 ‘불의’, 그리고 자영이 왜 그토록 그 순간에 집착하는지에 대한 감정이다. 분명히 잘못된 일이다. 하지만 영화에서도 등장한다. 그냥 모른 척 하고 지나가면 될 일이다. 그럼에도 영화에선 그 사건을 향해 말단 여사원 3인방은 거침없이 직진을 택한다.
“배우 고아성인 저도 그렇고, 제가 연기한 이자영으로서도 그렇고, 또 영화를 보시는 관객 분들도 같은 마음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자영이 겪는 고민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고민이 아닐까 싶어요. 불의를 봤으면 당연히 고민을 하겠죠. 그 고민에서 한 발짝을 더 나아가느냐 마느냐의 문제잖아요. 그 고민의 순간에 누군가와 교감을 나누면 그 고민은 반이 되잖아요. 유나와 보람의 역할. 그래서 이 영화는 여성 영화라고 부르기 보단 힘 없는 약자들의 얘기라고 생각해요.”
힘 없는 약자들의 얘기. 그 지점은 처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촬영 전 이종필 감독이 고아성에게 직접 자필로 쓴 편지에도 담겨 있었단다. 그 안에서 고아성은 생각지도 못한 긍정적인 에너지를 받았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영화 속 통쾌한 한 방, 그리고 톡 쏘고 시원한 사이다 한 방으로 등장한다. 요즘 같은 괴롭고 어려운 시기에 이런 영화 한 편이라면 모두에게 괜찮은 위로가 되지 않을까 싶단다.
배우 고아성.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감독님이 촬영 전 주신 편지에 써 있던 문구가 너무 마음에 들어요. 이 영화는 ‘꼴찌들에게 보내는 갈채’라고. 또 ‘눈에 띄지 않던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통쾌한 승리를 담은 얘기’라고. 감독님이 주신 편지를 읽고 나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는 것 같았어요. 제가 제일 먼저 캐스팅 되고 이후 시나리오가 몇 번 고쳐지면서 감독님과 나눈 많은 얘기들. 그 순간들이 지금도 아득하게 느껴져요. 정말 많은 감정인데, 한 가지만은 아주 확실해요. 보시고 나시면 너무도 시원하실 거에요. 그건 장담해요.”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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