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우리 공동체의 고유 사상이랄 수 있는 풍류도를 이어온 것으로 보이는 남북국시기 신라의 최치원과 김가기와 김운경 세 사상가 가운데 최치원 선생에 대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은 당나라에 유학을 해서 당나라에서 한림학사까지 지낸 글로벌(global) 인재입니다. 그는 초등학교 5학년 정도밖에 안 되는 나이인 11살 때 당나라로 가는 화물선에 타고 당나라로 잠입해 들어가서 당나라에서 6년 만에 과거에 급제했습니다. 11살 때 가서 17살에 과거에 급제했습니다. 그러니까 대단히 뛰어났죠. 가서 중국어도 새로 배워야 됐을 테고 중국어도 배워서 당나라의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한 것입니다. 당나라에서 처음에는 지방관을 지냈습니다. 지방관을 지내서 근무성적이 좋아서 황제로부터 칭찬까지 받았습니다. 덕분에 희종 황제로부터 자금어대(紫金魚袋)도 하사받았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도통(都統) 고변(高騈)의 종사순관(從事巡官)이 되어서 그 유명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 “황소를 성토하노라”라는 격문을 써서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비유천하지인계사현육(非唯天下之人皆思顯戮), 억역지중지귀이의음주(抑亦地中之鬼已議陰誅)” 이 뜻은 무엇이냐면 “천하 사람들이 모두 너를 대놓고 주륙할 것을 생각할 뿐만이 아니라, 땅속에 있는 귀신들까지도 암암리에 너를 주살하려고 의논을 마쳤다.“ 이렇게 쓴 겁니다. 이 대목을 읽다가 황소가 자기도 모르게 침상에서 쿵 떨어졌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이 문장은 중국사람들도 다 압니다. 제가 중국에서 7년 살았는데요. 중국에서 7년 살 때 보니까 중국 사람들도 최치원이 이런 문장을 썼다는 것을 다 압니다. 저보고 묻더라고요. “황소가 부지불식(不知不識) 간에 이 구절을 읽다가 (침상에서) 쿵 떨어졌다는 얘기가 어디서 나오냐?” 중국 문헌에는 안 나오거든요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옵니다. 《삼국사기》의 <최치원 열전>에 나옵니다. 조선시대 박세채(朴世采)라는 유학자가 쓴 글에도 나옵니다.
중국에서는 도교의 문창제군 숭배 신앙이 민간에 깊게 침투해 있기 때문에 중국 전역에 문창제군을 숭배하는 궁전인 문창궁(文昌宮)이 베이징과 타이뻬이를 비롯해 각지에 세워져 있습니다. 중국 저장성 입팔도(?八都)진에 세워진 화려한 문창궁(文昌宮) 내의 문창전(文昌殿). 사진=필자 제공
최치원은 당나라 사신이 되어서 당나라 황제의 조서를 가지고 신라에 귀국을 합니다. 귀국을 하는데, 풍랑을 만나서 바로 신라로 들어가지 못하고 해변에서 겨울을 보낸 다음에 국내로 돌아갑니다. 참 기구하지요. 귀국길이 멀고도 험합니다. 그래서 귀국했는데, 17년 만의 귀국입니다. 11살 때 초등학교 5학년 나이에 조국을 떠나서 17년이 지나서, 당나라 과거에도 급제하고 당나라에서 벼슬도 하다가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도 쓰고 17년 만에 28살의 청년이 되어서 신라로 귀국합니다. 신라로 귀국한 뒤 주변 사람들로부터 질투와 모함의 대상이 됩니다. 당나라에서 과거에 급제하고 당나라에서 황제로부터 칭찬도 받고 <토황소격문>이라는 명문장을 남긴 사람이니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샘나고 질투의 대상이 되겠습니까?
최치원은 신라 (사회)의 좁은 아량에 대해서 아주 깊게 실망을 합니다. 최치원은 처음에는 벼슬을 하다가 나중에는 지방관으로 가겠다고 자청을 합니다. 전북 정읍, 경넘 함양, 충남 서산 등 지방을 돌면서 지방관을 지내다가 그것도 마땅하지 않아서 진성여왕 8년에 <시무십조(時務十條)>라는 상소문을 올립니다. <시무십조>는 내용은 전해지지 않지만, 유학에 바탕한 정치를 제대로 해야 된다는 내용으로 되어있을 것이라고 추측이 됩니다.
<시무십조>를 올렸을 때 조정의 반응에 대해서는 기록이 엇갈립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국왕이 내용을 보고 흡족해서 최치원을 높게 칭찬하면서 6두품인 최치원이 가장 높이 올라갈 수 있는 관직인 ‘아찬(阿飡)’이라는 벼슬을 내렸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반면에, 박지원의 기록에 따르면, <시무십조>가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최치원이 실망을 하고 염증을 느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더라도 최치원은 <시무십조>를 올린 뒤에, 가야산이라는 첩첩산중에 ‘독서당(讀書堂)’이라는 집을 짓고 은거를 하다가 삶을 마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가야산의 독서당에 은거하면서, 남긴 시가 남아 있습니다. <제가야산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이라는 시인데요. “광분첩석후중만(狂奔?石吼重巒) /, 인어난분지척간(人語難分咫尺間) / 상공시비성도이(常恐是非聲到耳) /, 고교류수진농산(故敎流水盡籠山)“ 이라는 시입니다. “크게 울리는 물소리가 돌에 부딪혀서 첩첩산중에 크게 울리고,/ 사람 목소리를 지척 간에도 구분하기가 힘들구나./ 항상 시비(是非) 소리가 귀에 닿을 것을 두려워하여서,/ 물소리로 산을 삥 두르도록 만들어 두었다네.“
이런 시입니다. 이 시의 내용 중에서 “시비소리가 귀에 닿을 것을 두려워하여”라는 구절을 보면 최치원이 얼마나 평소에 조정에서의 모함과 질투에 시달렸는지 그가 느낀 염증이 시에 묻어나옵니다.
이 시 이외에도 최치원은 가야산에 숨어 들어가면서 <입산시(入山詩)>라는 시를 또 한 편 남겼습니다. 이 시에서 최치원은, “스님이시여, 청산이 좋다고 말하지 마소[僧乎莫道靑山好,] / 청산이 좋다면 왜 도로 산을 나오시오?[山好何事更出山?] / 나중에 내 종적을 한번 보시오[試看他日吾?迹] / 한번 청산에 들어가면 절대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니[一入靑山更不還]。”
최치원이 얼마나 세상에 염증을 느껴서 은둔했는지를 잘 읽을 수 있습니다. 최치원은 가야산 독서당에서 홀로 독서를 하다가 수명을 마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도가의 은자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최치원과 관련된 설화들을 보면은, 도교적인 설화가 너무 많습니다. 탄생 설화와 그가 죽은 뒤에 문창성(文昌星)이 되었다는 설화, 두 가지가 대표적인 설화인데요,
첫째 설화는 탄생 설화인데요, 탄생 설화는 그가 금저굴(金猪屈)에서 살고 있던 금빛 나는 돼지머리를 한 괴수와 그의 어머니가 교접을 해서 낳은 자식이 최치원이다, 라는 설화가 오늘날까지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옥구군 앞바다 섬에는 ‘금저굴(金猪屈)’이라는 동굴이 남아 있고 그 앞바다 이름이 ‘금저양(金猪洋)’입니다. ‘금저굴(金猪屈)’이라는 얘기는 “금빛 돼지가 사는 굴”이라는 뜻이고, ‘금저양(金猪洋)’이라는 지명은 “금빛 돼지가 사는 앞바다“라는 뜻입니다.
그가 죽은 뒤에 ‘문창성(文昌星)’이 되었다는 설화는 문창성(文昌星)은 유교에서는 전혀 인정하지 않는 도교적인 설화입니다. 문창성은 문인들을 지켜주는 별이름이 문창성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말씀드렸지만, 북두칠성에서, 국자 부분이 처음 시작하는 별 이것이 문창성입니다. 문창성이 여러분들의 글짓기 능력을 좌우한다. 라는 설화가 도교에 나옵니다. 그래서 도교를 경멸하는 유생(儒生)들도 과거 시험 보러 갈 때는 문창성에다가 기도를 합니다. 문창성이 문인들을 지켜주는 별이기 때문입니다. 문창성에 사는 도인(道人)을 도교에서는 ‘문창제군(文昌帝君)’이라고 했는데, 최치원은 죽어서 문창제군이 되었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도교의 문창제군 숭배 신앙이 민간에 깊게 침투해 있기 때문에 중국 전역에 문창제군을 숭배하는 궁전인 문창궁(文昌宮)이 대륙 베이징과 대만 타이뻬이를 비롯해 각지에 세워져 있습니다.
최치원의 고향은 논산 옆의 옥구인데요. 거기에 ‘문창서원(文昌書院)’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문창서원은 최치원의 위패를 모신 서원입니다. 이 서원의 이름이 ‘문창서원’이 된 것은 최치원이 죽어서 문창제군이 되었다는 설화를 반영한 것입니다.
최치원이 지방관(태수)으로 부임한 바 있는 경남 함양시에는 ‘고운 최치원 역사 공원’이 조성돼 있고, 그곳에는 최치원을 “공부의 신”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사진=필자 제공
문창서원의 편액은, 군사독재자 박정희가 1971년에 썼다는 편액(사진)이 아직도 붙어 있습니다. 제가 작년에 답사를 가봤는데, 그때도 붙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문화재 훼손이자, 권력남용의 증거입니다. 정치 권력자라고 해도 문화재에다가, 제 글씨를 함부로 써서 붙이면 안 되는 겁니다. 뭔 자격으로, 박정희라는 사람은 총칼로 권력을 잡은 군사독재자인데, 그 사람이 최치원 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이 양반이 왜 1971년에 최치원의 위패를 모신 문창서원에다가 자기 글씨를 써붙일라고 생각했는지는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이 편액이 지금까지 붙어있다는 얘기는, 우리나라의 문화재 관리 담당국이 직무유기를 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빨리 이 편액을 떼어내고, 문인의 글씨로 편액을 갈아치워야 마땅합니다. 이것은 최치원이 ‘문창(文昌)’이라고 불리는 이유에 대한 능멸이자 모욕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최치원의 고향인 옥구에 남아있는 최치원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문창서원과 최치원이 노닐었던 자천대(문창서원 바로 옆으로 옮겨왔다. 사진=필자 제공
박정희는 군홧발로, 총칼로 권력을 잡아서 문인들을 군홧발로 짓밟은 사람입니다. ‘문창(文昌)’이라는 ‘시호(諡號, 죽은 뒤에 내리는 호칭)’가 내려진{최치원의 시호가 ‘문창후(文昌侯)’입니다.} 위패가 모겨져 있는 서원에 문인들을 군홧발로 짓밟은 사람이 쓴 편액이 붙어있다는 것은 이 나라의 역사에 대한 능멸이자, 문화재의 훼손입니다. ‘문창’이라는 말은 도교(道敎)에서 나온 말인데요. 문인들을 보살피는 별이 ‘문창성(文昌星)’입니다. 문창성이라는 별은 북두칠성에서 국자가 시작되는 첫째별의 이름입니다. 그래서 최치원을 모신 서원의 이름이 ‘문창서원’이 된 것입니다. 문창서원에 문인들을 군홧발로 짓밟은 사람이 쓴 편액이 붙어있다는 것은 이 나라의 역사에 대한 능멸이자, 문화재의 훼손입니다. 이것은 하루 빨리 뜯어고쳐야 됩니다. 제가 좀 몸이 불편하게 망정이지 몸이 안 불편했더라면 밤에 가서 그거 떼어냈을지도 모릅니다. 그 정도로 화가 났습니다. 저 말고도 최치원의 행적을 찾아보고 싶어서, 옥구의 문창서원을 찾은 사람들이 불쾌감을 느끼지 않도록 문화재 당국은 빨리 문창서원에 박정희의 졸필을 떼어내고, 편액을 갈아야 된다고 저는 주장합니다. 최치원 선생에 대해서는 다음 편 글에서 한 번 더 논하겠습니다.
최치원의 문창서원에서 아직까지 붙어있는 박정희 글씨 편액. 편액 오른쪽에 “대통령 박정희가 신묘년(서기 1971년) 직접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진=필자 제공
■필자 소개 / 이상수 / 철학자·자유기고가
2003년 연세대학교 철학 박사(중국철학 전공), 1990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 2003~2006년 베이징 주재 중국특파원 역임, 2014~2018년 서울시교육청 대변인 역임, 2018~2019년에는 식품의약품안전처 대변인 역임. 지금은 중국과 한국 고전을 강독하고 강의하고 이 내용들을 글로 옮겨쓰는 일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