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먼저 전제를 하고 얘기를 시작해야 한다. 그는 개그우먼이 아니다. ‘우먼’이란 단어가 들어갔으니 일단 그의 성별은 여자다. 그리고 ‘개그우먼’이 아니라고 하면 가수 또는 배우 또는 예능인 방송인 중에 하나일 터. 사실 요즘 연예계에서 경계의 구분을 짓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하지만 이 사람에겐 먼저 구분을 하고 넘어가야 한다. 그에게 유명세를 안겨 준 코미디 예능 프로그램이 그의 정체성까지 한 동안 규정해 버렸다. 사실 굉장히 재능 있는 배우란 걸 연예계 관계자들은 모두가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해당 프로그램 이미지가 너무 강하게 남아 있었다. 한동안 드라마와 영화 등 그의 연기가 선보일 수 있는 작품에서 그를 보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더 ‘절치부심’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의 이런 속내를 이 영화의 감독이 잡아 냈는지도 모를 일이다. 결과적으로 영화 ‘고속도로 가족’에서 상처 입고 그 상처에 세상에 대한 문을 닫은 채 아픔과 비밀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지숙’이란 인물을 그보다 더 잘 표현할 배우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그걸 온전히 증명해 버렸다. 배우 김슬기는 이 작품을 통해 ‘개그우먼’이라 오해 받고, 자신의 직업적 정체성을 의심 받아 온 세상의 시선을 단 한 방에 깨끗하게 날려 버렸다. 가장 놀라운 점은 ‘고속도로 가족’을 보면 김슬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거리의 여인 ‘지숙’만 존재할 뿐이다.
배우 김슬기. 사진=눈컴퍼니
그는 이 작품이 자신에게 온 것에 대해 우선 ‘잘못된 일인 줄 알았다’고 했다. 사실 굳이 뭘 특별하게 고민하고 앞뒤 사정을 파악하지 않아도 김슬기와 묵직한 메시지와 드라마가 담긴 ‘고속도로 가족’은 얼른 매치가 안되는 게 사실이다. 기존의 예능 프로그램 이미지 그리고 다른 작품에서 보여 준 약간은 과장된 듯한 그의 배우로서의 캐릭터 성격을 감안하면 말이다. 김슬기 본인 스스로가 그걸 인정하고 시작하니 더 자세한 설명은 필요 없을 듯했다.
“소속사를 통해 제안이 들어온 시나리오였어요. 전달 받고 읽다가 제가 이해가 안돼서 매니저 분에게 ‘이거 나한테 온 거 맞아? 잘못 온 거 아냐?’라고 확인까지 했었어요. 절 떠올리면 이런 시나리오가 사실 올 수는 없어요. 근데 반대로 너무 하고 싶었고, 너무 마음에 들었어요. 제가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캐릭터였어요. 무엇보다 시나리오에는 지숙의 대사와 비중도 거의 없었어요. 그래서 내가 뭘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 진짜 달라질 여백이 너무 많이 보여서 더 욕심이 났었어요.”
사실 그래서 진짜 궁금했다고 한다. ‘도대체 왜 내게 이런 시나리오를 보내줬는지’ 말이다. 숱하게 많은 작품을 소화하고, 자신의 코미디 이미지를 활용한 캐릭터 소화도 많이 해봤다. 물론 이런 배역, 너무 고맙다. 하지만 왜 자신을 캐스팅하려 했는지 이유라도 알아야 좀 더 잘 집중해서 ‘지숙’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한다. 물론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면서도 또 반대로 예상 밖의 대답이었다고.
배우 김슬기. 사진=눈컴퍼니
“캐스팅 순서가 라미란 선배님이 제일 먼저였고, 그 다음이 일우 오빠였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그 다음이 저였다고. 촬영 전에 저도 진짜 궁금하긴 했었어요. 제가 이렇게 잔잔하고 또 묵직한 느낌을 선보인 적이 거의 없거든요. 그게 참 아쉽고 또 해보고 싶었지만 배우들은 선택을 받아야 하는 입장인데. ‘근데 왜 날?’이란 의문이 너무 강했죠. 감독님께 여쭤보니 예전에 코미디 하는 분들의 다른 묵직한 모습을 보신 적이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절 주목하고 있었는데, 김슬기의 다른 모습을 제일 먼저 끄집어 내는 감독이 되고 싶다고 하셔서 너무 가슴 벅찼죠(웃음)”
가장 궁금한 것은 출연 배우로서 이 영화의 결말에 대한 시각이었다. 스포일러이기에 자세한 언급은 불가능하지만 배우로서 연출을 맡은 감독에게 전달 받은 디렉션이나 그 이면이 있을 듯했다. 참고로 ‘고속도로 가족’의 결말, 즉 엔딩은 배우 정일우의 해석으로는 ‘열린 결말’이란다. 이건 감독이 직접 정일우에게 전달한 해석이라고. 김슬기는 어떤 해석과 시각으로 이 영화의 마지막을 갖고 있을까 궁금했다.
“글쎄요. 굳이 제 생각을 전제로 말씀 드리면. 저 역시도 열린 결말이 아닐까 싶어요. 감독님의 의도가 그러신 것 같아요. 전 특별하게 여쭤 보진 않았어요. 극중 미란 선배가 연기한 영선이가 일우 오빠가 연기한 기우의 가족을 해체한 걸까. 아니면 그들을 구원한 걸까. 그걸 판단하는 건 저희 영화를 보신 뒤 관객 분들이 각자가 내릴 판단이 결국 결말이 아닐까 싶어요. 저희 영화의 결말은 각자가 어떻게 느끼느냐. 그게 결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배우 김슬기. 사진=눈컴퍼니
여러 해석이 생길만한 지점은 극중에서 또 있었다. 어떤 이유로 인해 기우와 그의 아내 지숙 그리고 그의 두 아이들이 헤어지게 됐다. 하지만 이후 지숙과 아이들을 찾아온 기우. 그런 남편 기우의 모습을 보고 반가워하기 보단 지숙은 두 손을 빌며 그를 밀어 냈다. 영화 초반 기우의 모든 것을 품고 가족들을 위해 헌신하는 지숙이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는 남편 기우를 밀어냈다. 이유가 궁금했다.
“사실 시나리오 읽을 때 가장 가슴에 와 닿은 장면이 그 지점 이에요. 다른 건 몰라도 그 장면만큼은 진짜 절절하게 잘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런 욕심이 너무 커서인지 실제 촬영 현장에선 오히려 집중이 잘 안됐어요. 전 완성된 장면을 보고 너무 아쉬움이 많은 데 많은 분들이 그 장면을 제일 인상 깊게 보셨다고 하셔서 기분은 좋죠. 아직 안 보신 분들을 위해 자세한 언급은 못해 드리지만 그 장면이 지숙이가 감정적으로 변화를 겪고 절정이 되는 지점이에요.”
당연한 얘기이지만 김슬기는 아직 미혼이다. 그러나 극중에선 두 아이의 엄마다. 더욱이 뱃속에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까지 있다. 무려 세 아이의 엄마다. 그리고 극중에서도 여전히 어린 나이의 엄마다. 쉽지 않은 설정이었다. 엄마가 어떤 감정인지, 엄마로선 어떤 느낌을 갖고 대해야 할지. 여기에 엄마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 것보다 느끼는 게 중요한 캐릭터가 바로 엄마다. 그런 김슬기는 ‘아주 적절한 타이밍에 엄마 역할이 왔다’고 웃었다.
배우 김슬기. 사진=눈컴퍼니
“진짜 제가 타이밍이 좋았어요(웃음). 제가 딱 조카가 생긴 시점에 엄마인 지숙을 연기하게 됐어요. 만약 조카가 아니었자면 그저 수박 겉핥기 정도로 연기했을 텐데, 마음 가짐이 많이 달랐죠. 그리고 조카를 키우는 친 언니를 보면서 엄마에 대한 느낌을 많이 잡을 수 있었어요. 극중에서 임신한 상태로 뛰는 장면이 있는데 언니에게 전화해서 ‘이 정도 개월이면 배를 잡아? 허리를 잡아?’라고 물어 보기도 했어요. 하하하.”
김슬기는 ‘고속도로 가족’을 찍으면서 더 없이 편했단다. 앞서 뉴스토마토와 인터뷰한 정일우 역시 그랬다. 촬영 현장에서 이토록 편안하게 돌아다닌 건 처음이었다고. 김슬기 역시 마찬가지였단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김슬기인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그는 그런 자유로움과 함께 극 안에서도 이 정도로 자신을 못 알아보는 배우가 되는 꿈을 꾸고 있다고 한다.
배우 김슬기. 사진=눈컴퍼니
“영화 보시면 그 옷차림 그대로 휴게소를 활보하고 다녔어요. 근데 어느 누구도 절 못 알아 보셨어요. 제가 엄청나게 유명한 스타는 아니지만 그래도 꽤 많이 알아보시는 데 진짜 휴게소에서 너무 편했어요. 궁극적으로는 이렇게 아무도 날 알아보지 못하는 배우가 됐으면 하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전 그냥 촬영하는 동안에는 배우 김슬기가 아닌 지숙이었어요. 어떤 작품에서든 제 이름이 아닌 배역으로만 기억이 되는 그런 배우가 되고 싶어요.”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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