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데뷔 30년 차 시인 겸 영화 감독인 ‘유하’란 이름은 상업 영화 시장에서 꽤 의미 있는 상징성을 지닌다. 그가 선보인 이른바 ‘거리 3부작’(말죽거리 잔혹사, 비열한 거리, 강남 1970)은 흥행과 평단의 고른 지지를 받았다. 상업적인 측면과 영화적 예술성의 비율도 탁월했다. 무엇보다 유하 감독은 그 시대를 바라보는 조금은 다른 심안(審眼)으로 접근하는 방식을 알고 있었다. 이건 충무로 관계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영화를 사랑하고 영화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부인할 수 없는 색깔이다. 이런 유하 감독이 변신을 선언했다. 사실 이건 변신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보기에 따라선 ‘변절’이란 단어를 써도 될 듯싶을 정도로 선을 넘어섰다. 그렇다고 유하 감독은 언제까지나 비슷한 소재와 비슷한 스타일에만 매몰돼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결과적으로 유하 감독은 자신이 지금까지 선보여 왔던 방식에서 완벽하게 탈피해 전혀 다른 ‘유하의 영화’를 만들어 냈다. 이건 ‘새로운 유하 감독의 스타일’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너무도 낯선 유하 감독의 스타일’이 될 수도 있다. 그 경계는 유하 감독이 상업 영화 시장에서 극단적으로 오락성이 뚜렷한 ‘케이퍼 무비’에 손을 댄 이유에 있을 것이다. 그가 지금까지 상업성과 거리를 뒀던 연출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스타일의 변화는 연출자로선 당연한 것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무리한 선택이 될 수도 있다. 영화 ‘파이프라인’이 이런 논쟁의 기준점이 될 것 같단 점에서 아쉬움은 너무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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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프라인’은 국내 언론을 통해 몇 번 보도가 됐고, 실제로도 국내에서 벌어졌던 도유(盜油) 범죄를 그린다. 땅 속 파이프라인을 통해 전국으로 뻗어나가는 기름을 훔치는 과정은 사실 상상만으로도 흥미롭다. 소재적으로도 기상천외하다. 국내 상업 영화 시장에서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바꿔 말하면 영화적 소재와는 거리 분명했기에 선택 받지 못했었단 해석도 된다. 이런 해석을 상쇄시킬 만한 특별한 킬링 포인트 그리고 관객들이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셀링 포인트가 분명해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 유하 감독은 데뷔 30년 차 내공을 전혀 사용하지 못한 초보적인 결과물을 내놨다. 의아스럽고 또한 기이할 정도다. 무엇보다 인물들이 훔쳐야만 하는 ‘기름’이 관객들에게 영화적 상상력을 전달하는 데 큰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 듯한 결과물이 안타깝다.
영화 '파이프라인' 스틸
캐릭터 구성은 기존 범죄 오락물(케이퍼무비)와 별반 다르지 않다. 업계 최고 천공 기술자 ‘핀돌이’(서인국), 용접공 ‘접새’(음문석), 괴력의 인간 굴삭기 ‘큰삽’(태항호), 여기에 땅속 지리를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는 ‘나과장’(유승목), 팀원들의 안테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카운터’(배다빈)가 한 팀이다. 하지만 이 팀, 어딘가 모르게 어수룩하고 또 믿음직스럽지도 못하다. 뭔가 좀 모자란 듯한 느낌이 강하다. 영화는 이런 점을 ‘인간미’로 희석시키려 노력한다. 이들 ‘도유꾼’들을 잡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사건에 달려드는 경찰 ‘만식’(배유람)조차 뭔가 허술하다. 유하 감독이 어떤 선을 긋고 ‘파이프라인’을 출발하는지 짐작이 된다.
영화 '파이프라인' 스틸
이런 팀원들이 정유회사 후계자 ‘건우’(이수혁)의 큰 판에 섭외된다. 수천억 원 기름을 빼돌려 상상 이상의 이익을 취하려는 계획을 세운 건우는 핀돌이를 팀장으로 위험천만한 도유 작전을 수행한다. 실제 땅속으로 지나가는 엄청난 길이의 송유관은 그저 그냥 그런 드릴로 뚫는다고 되는 게 아니다. 그리고 송유관을 뚫기 위해 땅을 파고 들어간다고 해도 쉽게 뚫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송유관을 관리하는 중앙센터의 감지 장치를 무력화 시켜야 한다. 무엇보다 송유관 천공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유증기는 엄청난 폭발 위험을 안고 있다. ‘도유꾼’들은 이런 위험을 감수하고 사상 최대의 ‘도유’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하지만 여러 난관이 하나 둘씩 등장한다. 계획에 차질을 빚게 되자 건우는 본색을 드러낸다. 자신의 계획이 틀어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는 건우는 무자비한 폭력성을 드러낸다. 이제 핀돌이를 팀장으로 한 ‘도유꾼’들은 한 몫 잡기 위해 뛰어든 이 판이 문제가 아니다. 이들은 모두가 새로운 계획을 새우고 그 계획을 위해 진짜 ‘도유’를 따로 계획한다.
영화 '파이프라인' 스틸
‘파이프라인’은 유하 감독이 데뷔 이후 처음 선보이는 범죄 오락물이다. ‘훔친다’는 개념에서 ‘케이퍼 무비’ 형식에 가깝다. ‘기름’을 훔치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어떤 목적에 의해 힘을 합치는 과정. 힘을 합친 그들이 기름을 훔치는 과정 등이 상세히 스크린에 구현된다. 물론 ‘케이퍼 무비’의 또 다른 기본 전제 조건은 ‘복잡한 플롯’이다. ‘훔친다’는 은밀함과 비밀스러움이 담보돼야 한다. 스크린에 구현되는 결과물 역시 이를 뒷받침하는 플롯이어야만 한다. 이 같은 전제조건을 ‘파이프라인’에 적용시키면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모호한 결과물이 된다.
영화 '파이프라인' 스틸
다시 한 번 설명하면 ‘파이프라인’은 ‘훔친다’는 기본 전제에서 ‘훔치는 것’을 모의하는 인물들이 모였고, 그들의 훔치는 과정을 전면에 투영시킨다. 완벽하게 ‘케이퍼 무비’다. 하지만 ‘훔치는’것을 보여주는 과정의 ‘복잡한 플롯’은 등장하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바 있는 성격상 허술한 캐릭터들의 조합이 ‘복잡한 플롯’과 어울리지 않는다. 이런 점을 의도한 것인지 의도치 않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만약 의도했다면 유하 감독은 결과물에 오롯이 스며 들어 있는 ‘블랙코미디’적인 요소를 끌어 들여 이를 상쇄시키려 노력했다. 반대로 의도하지 않았다면 ‘범죄물’에 대한 이해 부족이라고 하기엔 기이할 정도로 허술한 면이 곳곳에 드러난다.
영화 '파이프라인' 스틸
‘훔친다’에 방점이 찍혀야만 하는 케이퍼 무비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파이프라인’은 인물의 드라마가 메인이다. 그들이 어떤 이유로 ‘도유 프로젝트’에 모여 들게 됐는지, 그리고 그들이 왜 분노하게 됐는지. 결과적으로 그들이 ‘진짜 도유’를 위해 전혀 다른 계획을 세우게 됐는지를 상세히 그리는 데 집중한다. 특히 ‘케이퍼 무비’에서 눈길을 끌어야 하는 점은 ‘복잡한 플롯’을 한 번에 풀어 낼 수 있는 가장 완벽한 ‘결말’ 또는 ‘해답’이다. 쉽게 설명하면 빌런의 뒷통수를 시원스럽게 쳐야 할 마지막 한 방이다. 이건 관객이 절대 눈치를 체지 못하게 해야만 한다. ‘파이프라인’은 영화의 이 같은 결말을 중반 이후쯤 등장인물 한 명이 친절히 설명을 한다. 유하 감독의 이 같은 연출과 의도가 무엇인지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지점이었다.
영화 '파이프라인' 스틸
한정된 제작비로 지하 세계에서 벌어지는 기상천외한 ‘도유’ 작전을 그리려 노력한 점은 충분히 와 닿는다. ‘도유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도유꾼’들을 한 자리에 모은 정유회사 후계자 건우의 소시오패스적인 섬뜩함도 눈에 띈다. 건우를 연기한 이수혁의 서늘함 그리고 조금은 어설퍼 보이는 아마추어적인 모습이 오히려 기괴함으로 다가올 정도다. 서인국의 음문석 태항호 유승목 배다빈 배유람 등 각자가 충분히 제 몫을 이어간다. 하지만 한 방을 기대할 만한 묵직한 무게감의 배우가 없다. 배우보단 이야기 이야기 보단 감독의 이름 값이 먼저 다가온다. 감독의 이름 값에서 관객들이 기대한 결과물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조차 흐릿해 보인다. 여러모로 기이할 정도로 아쉬운 결과물이다. 개봉은 오는 26일.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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