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기자
닫기
박민호

dducksoi@etomato.com

삶과 철학 그리고 피아노
(예술과 인문학의 만남)50. 헛소리

2019-05-16 18:40

조회수 : 533

크게 작게
URL 프린트 페이스북
헛소리.
참 힘들다.
잔소리도 힘 빠지게 한다.
노젓는 사람은 적고 말 하는 사람만 많다.
세상 일이 다 그런 것 같다. 
애매하다.
모호하다.
불확실하다.
그래서 좌절한다.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이면 불.
물이면 물.
딱 떨어지게 보이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다.
세상은 정확히 분리가 가능하다.
뚜렷하다. 
우리는 보지 않는 것일까.
보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


<작두까지 탈 필요는 없다. 주사위 돌려도 충분하다.>

헛소리와 헛소리가 아님을 어떻게 구분할까?
세상은 어떻게 구성돼 있나.
A면 B가 아니다.
A가 B일 수도 있다.
그러나 'A가 B일 수도 있다'는 'A면 B다' 거나 'A면 B가 아니다' 중 하나다.
즉 'A는 B이다'거나 'A는 B가 아니다' 중 하나다.
우연이라는 것은 필연이다. 
우연이 우연으로 남지 않는다.
세계는 '질서'와 '법칙'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여름에 눈이 내릴 수도 있다'
그럴 수 없다.
물론 여름에 눈이 내리는 경우도 있다.
성층권이 갑작스럽게 얼어붙어버리면 가능하다.
그것은 '여름에 눈이 내릴 수도 있다'가 아니라 '여름이지만 성층권이 얼어붙어 겨울에 내리는 비가 내린다'이다.


<사랑에 빠지면 눈이 내린다. 
사막에 눈이. 그건 감성이다.
그런데 사실 정말 사막에 눈이 내린다.>


애로우라는 경제학자가 있었다.
그는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은 양립할 수 없다를 증명했다.
그걸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따지고 보면 맞다.
민주주의면서 경제발전을 이루다니.
그런 나라는 없다.
잘살면 독재와 횡포가 있다.
못살면 반대때문이다.
잘생각해보자.
한국은 어떻게 부를 이뤘나.

어쨌든 세상은 명확히 갈려진다.
선과 악.
착하기도 하면서 나쁘기도 한 사람이 있을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신체도 아메바처럼 흐물흐물 해진다는 의미다. 
남자이면서 여자인 사람은 없듯이.
남자 거나 여자거나.
착하거나 나쁘거나.
선이거나 악이거나.
둘은 명확히 갈린다.
빵이면서 밥인 것은 없다.
빵은 빵이고 밥은 밥이다.


<케네스 조셉 애로우. 경제학자.
불가능성의 정리.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은 양립할 수 없다.
중국을 보자. 쿠바를 보자.
어디가 민주주의인가. 어디가 경제대국인가.>


그럼 사람을 보자.
성악설이 맞을까 성선설이 맞을까.
알 수는 없다.
어쩌면 '원래 나쁜 놈'과 '원래 착한 놈'이 있을 수 있다.
본질이 있다는 것이다.
'나쁜 놈이 착한 놈으로 변신'하는 경우는 없다.
그것은 원래 나빴던 것이다. 
착해 보였을 뿐이다.
만물은 명확히 '~이다'와 '~아니다'로 나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럼 선이 존재한다와 악이 존재한다를 증명해보자.
그리고 그 둘은 각각 별개며 합쳐지지 않는다도 살펴보자.
'쿠르트 괴델'의 증명이다.
이 사람은 불완전성을 정리했다.
즉, 불완전한 것은 불완전하다는 것.
완전한 것은 완전하다는 간단한 원리다.
물론 간단하지 않다.
인간의 사고방식을 바닥에서부터 논리적으로 하나하나 증명해냈다.
그리고 본질에 대한 연속적인 가설을 증명했다.
본질에 대해서 계속적인 반론을 부정해냈다.
최종적으로 가정과 논리에 상대적 모순이 없음도 보였다.


<지구인 이놈들. 괴델이라는 사람이 있다며. 이리 데리고 와>

'대체 무엇을 어떻게 증명했길래'

'괴델의 증명'은 다섯개의 공리와 3개의 정리로 돼있다.
마지막으로 최종 4개의 정리가 더해진다.
제일 마지막 정리인 4번.

'신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이다.
이는 곧 '선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와 같다.
반대는 명확히 악이다.
선과 악은 엄연히 구분돼 있다.
선이기도 한 것이 악이기도 한 것은 없다.
루시퍼는 루시퍼다.
가브리엘은 대천사다.
루시퍼가 타락천사라고 해서 천사는 아니다.
마찬가지다. 
신.
선.
악은 엄연히 구분된다.
헷갈리면 '선이 악이 되기도 하더라'라는 가정을 나중에 생각해보자.
일단 '만물은 섞이지 않고 명확히 구분된다'만 얘기해보자.

공리란 '증명없이 옳다고 받아들이기로 한 기본명제'다.
예를 들면 '원숭이는 동물'.
'남자는 턱수염'.
'물은 위에서 아래로'.
이런 식으로 부정할 수 없는 명제가 공리다.
정의란 기호에 대한 약속이다.
즉, 설명을 하는 객관적인 언어다.
정리는 공리를 정의하면서 도출되는 값이다.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는 공리.
'하늘에서 구름이 모여 수증기가 응축된다. 만유인력의 법칙이 작용된다'는 정의.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것은 만유인력의 법칙'이라는 정리다.
이를 위해서는 만류인력의 법칙도 증명해야 한다.


<짜증나게 하지 말라고!>

예를 또 들자.
'고양이는 양탄자에 앉을 수 있다'는 우연히 참이다.
'이는 고양이는 양탄자에 앉았다' 또는 '고양이는 양탄자에 앉지 않았다'로 나뉜다. 
양탄자에 앉은 척 하며 붕 떠있다라는 말은 없다.

자. 그럼 이제 신과 선, 악을 증명하자.
어떤 성질이 긍정이면 긍정이다.
부정이면 부정이다.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다.

'배중률'.
뜨뜻미지근 한 것은 세상에 없다.
찬물 혹은 뜨거운 물이다. 
'차다'와 '뜨겁다'는 우리가 경험으로 공유하는 말이다.
사물의 성질은 '차다'와 '뜨겁다' 둘 중 하나로 갈린다.
중간은 없다는 것이다. 
크게 보면 결국 긍정이냐 부정이냐로 나뉜다.
마치 컴퓨터가 0과 1만 인식하듯이.
사람도 '참'과 '거짓'만 구분할 수 있다.


<지구인 이놈들. 또 열받게 하네. 괴델이 누구냐.>

'정직하다'는 뭘까?
착하다는 것이다.
정직한 것이 나쁠리는 없다.
성질이 긍정적이면 거기서 나오는 것도 긍정적이다.
긍정적이면 인식이 가능하다.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
어떤 성질이 긍적적이면 그것을 가지는 어떤 것이 존재할 수 있다.
정직한 사람이 없으면 정직이란 세상에 없다.
악한 사람이 없으면 세상에 악도 없다.

긍정적 성질이 있으면 존재할 수 있다.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은 존재하거나 혹은 없거나다.
그것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착한 사람을 봤으니까.
긍정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정직하면 정직하지 않은 것이다.

Godlike.
신성은 존재하는가.
신성을 가진 사물이 있는가.
긍정이 신성이라고 하자. 
전지하고 전능하다.
우리가 부르는 신은 그것이다.
긍정은 부정이 전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이 부정적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신이 동양인이었던 건가..>

신성을 가지는 무언가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 
신성은 긍정적이다.
신성을 가진 어떤 것이 존재할 수 있다.
그것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고양이가 양탄자에 앉을 수 있듯이.
'앉아있는 것'은 '존재하기 때문에 앉아있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다면 우리는 인식조차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앉아 있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 없는 것이다. 
결국 신도 고양이 처럼 확실하게 있거나 혹은 확실하게 없는 것이다.

우린 가능성을 보는 것이 아니다.
존재의 유무를 가려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신은 어렵다.
그럼 사람을 보자.
이성은 소크라테스의 본질이다.
맞다.
소크라테스는 이성적이다.
맞다.
소크라테스가 생각하고 판단하고 추리하는 모든 것은 이성적이라는 성질로부터 나온다.
맞다.
본질과 성질이다. 
성질은 본질에서 나온다.
소크라테스에서 악마의 시가 나올리 없기 때문이다.
나오적도 없었다.
나왔다면 본질은 악으로 뒤집어진다.


<수천년부터 소설쓰려고 '선과 악'을 이야기 한게 아니다.
실제 존재한다. 그것을 보려고 하는 작업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신은 어디있는가. 루시퍼는 어디에. 가브리엘은 어디에.>


다른 성질을 도출하는 것을 본질이라고 한다. 
긍정적 성질은 필연적이다.
신성을 가지면 신성은 결국 본질이다.
신은 신성이 있다.
신은 키가 크다고 하자.
키가 본질일까?
아니다.
신성이 본질이다.
사람도 여백과 환경이 본질이 아니다.
본연의 본질이 있다.
사물처럼 사람도 명확하다.
'착하거나 나쁘거나' 하는 사람은 없다.

"쟤는 나쁘기도 하고 착하기도 해"
그건 사람 속을 모르는 것이다.
열길은 알아도 사람속 모른다는 것처럼.
그리고 행동에 대해서 '무엇이 착하고 무엇이 악한지'에 대한 구분을 못하기 때문이다. 
1부 다처제. 
조선시대때는 상식이다.
그것은 당시 '선'이지만 지금은 '악'이다.
하지만 그 현상에 대한 '본질'은 선인지 악인지 둘중 하나다.
단지 우리가 판단을 못하는 것 뿐이다.


<인류가 2진법을 계속 썼다면 어땠을까? 
만약 2진법으로 계산하고 사고 한다면?
신을 볼 것이다. 오래 걸릴 뿐.>


어쨌든 사물의 본질이 하나이듯.
본질은 다른 모든 성질을 도출하는 것이다.
다른 성질을 보지 말고 본연의 '본질'을 봐야 한다.
긍정적 성질은 신성에 속한다.
사람의 성질은 정해져 있다.
성악설과 성선설로 끊임없이 싸우는 이유다.

'무엇'이 본질을 가지고 있다면 그 '무엇'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본질이 있고 이를 만족시키는 현상이 있다.
필연적이다.
본질이 있는데 중간에 수증기 처럼 사라진다?
이런 건 없다.
그건 사라졌다는 것이지 '없었다'는 아니다.
결국 '필연적으로 존재한다'로 돌아돈다. 
결국 본질을 만족시키는 존재는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헛소리인가?
아니다.
우리는 뇌에서 일어나는 가장 기본적인 '논리'에 접근하고 있다.
걸음마를 때듯이 동작 하나하나 일어나고 있다.

한 과학자는 이런 말을 했다.
사람과 원숭이와 컴퓨터가 사고하는 방식은 같다.
사람은 참과 거짓.
컴퓨터는 0과 1.
원숭이는 모르겠다.
어쨌거나 둘 중 하나로 판단한다.
둘 중 하나가 무한히 궤를 그리면서 판단한다.
고양이를 보면 '고양이다'라고 판단할때 까지 '참'과 '거짓'이 긍정과 부정을 반복한다.
컴퓨터의 알고리즘이 사실은 인간의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가끔 이해안되는 사람들이 보인다. 혹시..?...!>

다시 돌아와서.
신성은 긍정적이다.
필연적 존재성은 긍정적이다. 
X가 신성을 가지면 신성은 X의 본질이다.
X가 신성을 가지면 신성을 가진 X는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필연적으로 '우연은 필연적'이다.
결국 '우연히 존재하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와 같다.
'우연히 존재할 수도 있다'는 없다.
그럼 '나도 우연히 펑하고 터진다'라는 말이 된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다시 정리하자.
우연은 결국 필연이다.
고양이가 양탄자에 걸터 앉든 말든 고양이의 행동은 우연이다.
두개 중 하나의 행동을 한다.
양탄자에 걸턴 앉거나 다른 곳으로 가거나.
둘다 우연이다.
둘다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어떤 성질이 긍정적이면 그 반대성질은 부정적이다.
어떤 성질이 긍적이면 그로부터 나오는 성질도 긍정이다.
긍정이면 어떤 것이 존재할 수 있다.
모든 긍정은 신성이다.
신성은 긍정적이다. 
신성을 가지는 어떤 것이 존재할 수 잇다.
다른 모든 성질을 도출하는 성질을 본질이라고 한다.
긍정은 필연이다.
신성은 본질이다.
본질을 만족하는 존재는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필연적 존재는 긍정이다.
신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신심이 돈독해진다.
이유는 '악'도 필연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누군인가.
'선'인가 '악'인가.
둘 중 하나다.
신은 아닐테니.

신은 존재한다.
예수, 부처, 마호메트만 아닐뿐.
외계인일 수도.
과학자일 수도.
아니면 우주를 둘러싼 껍데기일지도.
거기 대체 누구요?
아니.
거기 대체 뭐요?



<괴델이 누구냐?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괴델이 손가락이냐?
지구인 이놈들. 해부해버리겠다.>

........................................................................................

(예술과 인문학의 만남)④⑨늙은 말이 콩 더 달란다


옛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늙은 말이 콩 더 달란다'.
나이들수록 보수적으로 변한다는 뜻이다.
혈기가 줄어드니 가지고 있는 것을 지키기에 급급하다.
젊을 때와 달리 눈에 보이는 것이 많다. 
지켜야 할 것이 많다는 의미다. 
반면 어린 말은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 
잃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 
잘못하면 치기 어린 행동을 하는 이유다. 


<왜 범일까? 호랑이는 틀렸다. 호는 '범'.
랑은 '이리'. 이는 접미사다.
범과 이리떼가 마을을 습격했다. 조선사람이 '호랑이'라고
말하는 것을 외국인이 지금의 '호랑이'로 이해하면서 말이 
퍼졌다.> 


장수의 비결은 검소하게 사는 것일까?
아니면 욕심을 가지는 것일까?
자연환경도 중요하다.
먹는 것도 요인이다. 
보통 적게 먹고 많이 움직이면 오래 산다. 
많이 먹고 많이 활동해도 장수한다.
결국 장수의 비결은 욕망이 아닐까.
욕망은 애착이다.
갖고 싶고 이루고 싶은 욕심이 생기면 사랑을 한다. 
사랑은 욕망.
그래서 살아갈 이유가 생긴다. 
활기가 도는 이유다. 
한 정치인은 장난삼아 "정치인이 오래 사는 이유는 욕심이 많아서다"라고 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욕심이 많은데 어떻게 쉽게 죽을까.
삶에 흥분하면 에너지가 생긴다. 
즐겁게 살자. 
욕심을 많이 부리자. 
탐욕은 금물.

무엇인가를 사랑한다. 
감정이 폭발한다. 
감정은 뇌에서 나온다. 
뇌가 '흥분하라'라고 명령을 내린다. 
피가 솟구치는가?
뇌는 '전기신호'가 솟구친다. 
전류.
전류의 속도는 얼마일까?
전류는 빛의 속도와 같다. 
시속 30만 킬로미터.
전류와 빛, 파장은 속도가 같다. 
소리만 작다.
음속 전투기는 소리보다 빠르다. 


<엽기적인 그녀의 전지현. 사랑한다면 소리지르지 말라.
소리는 느리다. 그저 윙크하면 된다. 뇌의 전류는 빛의 속도다.>


가정을 해보자. 
빛의 속도로 흐르는 전류를 매일 뿜어댄다. 
빛의 속도에 가까워질 수록 시간은 느리게 간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
타임머신을 만드는 원리다. 

빛의 속도 99.9%로 달린다면 나의 1초는 상대방에게 22.37초가 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는 빛으로 시간과 공간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빛의 속도에 다다르거나 초과하면 시간이 왜곡된다. 
우주는 우리가 아는 것과 다른 구조인 것이다. 
단지 빛보다 빠른 것이 없어서 몰랐을 뿐.
빛의 99.99%의 속도로 달린다면 나에게 1초는 상대에게 70.71초다.
99.999%는 상대에게 223.61 초
99.9999%는 707.11초
99.99999%는 2236.07초다.
시간이 달라지면 공간도 달라진다. 
이상하다. 
왜 그럴까?
우리는 우주안에서 보기 때문에 이상하게 생각된다. 
우주밖에서 본다면 이해가 될 것이다.
단지 우주밖을 못 나가서 그렇다. 
이것은 '빛'의 미스터리다. 
우리는 사실 매일 타임머신을 타고 있다. 
비행기를 10년간 쉬지 않고 타보라.
0.95초 더 살게 된다.
비즈니스맨들이 돈을 많이 벌어 좋은 음식을 먹어 오래 사나?
비행기를 많이 타서 그런지도 모른다. 
그래봤자 3초.
담배 한대면 수명이 3초 줄어든다. 


<담배 한대면 수명이 3초가 줄어든다. 계단을 3층이상 걸으면
수명이 5초 늘어난다고 한다. 뭐지?>


다시 돌아와서.
빛의 속도로 흐르는 뇌속의 전류.
많이 흐를 수록 시간이 느려진다고 볼 수 있을까?
그래서 수명이 길어지는 것인가?
우스개소리다.
상대성이론을 알기 위해서 든 예다. 
물론 빛의 속도로 전류가 계속 흐른다면 '뇌'의 공간과 시간은 달라지는 것은 분명하다.

시간은 절대적이고 상대적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말을 걸고 싶다. 
따뜻한 난로에 걸터앉았다. 
난로는 뜨겁지 앉았다. 
1시간이 흘렀다.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1시간 동안 따뜻한 난로에 앉아있을 수는 없다. 
그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 사람은 '나 이제 그만 가볼께'라며 사라졌다.
1시간이 흘렀지만 내게는 고작 10분 처럼 느껴진다. 
정작 10분동안 난로위에서 버티는 사람은 없다.
같은 공간과 시간을 다르게 느끼는 것.
일반상대성원리다.
시간과 공간이 변하지 않는다.
일반상대성원리는 가다가 서기도 하고 뒤로도 가고 가속도 하며 감속도 한다.
회전도 가능하다.


<어제 본 별빛은 수억년 전의 것이다. 오늘의 지구는 화성에서 
얼마후에 보일까. 나를 잊지 말아요.>


그러나.
특수상대성원리는 시간과 공간이 변한다.  
특수원리는 같은 운동을 한다. 
허나 마이켈스와 몰리라는 미국 물리학자들이 재밌는 실험을 한다. 
빛의 속도는 1초에 30만킬로미터로 변하지 않는다.
광속불변의 원리.

우주선을 타고 가다가 헤드라이트를 켰다.
라이트는 1초 사이에 30만킬로를 날아간다.
우주선에 탄 우주인은 빛이 시속 30만킬로로 보인다 .
빛을 쫓아가는 우주비행사에게도 빛은 30만킬로보다 느리게 보이지 않는다.
100킬로 미터 시속으로 달리는 차에서 110킬로 미터로 달리는 버스를 보면 고작 10킬로미터 속도로 보인다. 
하지만 빛의 속도는 다르다.
우주선이 시속 29만 킬로로 날아가도 빛은 30만킬로 속도로 보인다.
광속은 불변이기 때문이다.  
우주선이 날아가는 것을 화성에서 외계인이 본다고 하자. 
그 외계인도 우주선의 라이트가 시속 30만 킬로로 보인다 
광속불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긴다. 
이런 이유로 우주선 안의 비행사의 시간은 더 느려진다. 

외계인이 8초 지났다면 우주인은 6초가 지난다.
빛의 속도는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그럴까?
날아간 거리도 우주선 안에 있나 밖에서 보나 거리는 같다. 
왜 그러지?
빛의 경로가 길어졌다.
우주선 안에서 보나 밖에서 보나 빛의 속도는 같다.
그런데 빛의 갈 길이 멀어졌다.
같은 속도인데 길이가 더 길어지는 현상.
결국 시간이 지연되는 결과가 나온다. 


<지구인 이놈들. 너희는 지구에 살게 해주는 댓가로
돈이라는 것을 받는다며? 전세가 대체 무엇이냐.
알려주지 않으면 해부하겠다.>


우주비행사와 외계인은 정반대 현상이 생긴다.
그럼 이게 정말로 느려지는 물리적 현상일까?
아니면 착시현상일까?
물리적이면 우주비행사의 시간은 진짜로 느려진 것이다.
우주인과 외계인간 시간이 달라진다. 

빨대를 물컵에 넣으면 휘어져 보인다.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착시라 부른다. 
사실 '타임머신'이 물리적 현상인지 착시 현상인지 모른다.
빛의 속도로 달려본 사람이 없어서다.
스티븐 호킹 박사는 우주선을 돛단배처럼 만들어서 레이저를 '바람'처럼 계속 쏘이면 가능하다고 했다. 
언젠가는 빛의 속도로 우주선이 날아간다는 것이다. 
물론 사람이 아닌 원숭이를 태우겠지만. 

당시 과학자들이 이해하지 못한 특수상대성이론.
아인슈타인은 노벨상을 못받았다.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후 '광전효과'라는 이론으로 노벨물리학상을 받기는 했다.
특수상대성 이론.
타임머신. 
얼마나 어렵고 복잡할까?

달리는 차 위에서 공을 쏘아보자.
트럭이 앞으로 나아가도 공은 직선으로 올라간다.
그런데 옆에서 본다면 공은 포물선을 그린다. 

공 자체에 주어진 힘은 같다. 
보는 것에 차이가 생긴다. 
적용되는 물리적 법칙도 같다. 
관성의 법칙이 작용하는 공간에서 물리법칙은 동일하게 작용한다.

초속 20미터로 달리는 말에서 10미터의 속도롤 활을 쏘면 초속 30미터로 날아간다. 
시속 100킬로로 달리는 차에서 라이트를 켜면? 
시속 30만킬로 속도 - 시속 100킬로미터일까?
아니다.
우주비행사 처럼 빛의 속도 초속 30만킬로 그대로 보인다.
빛의 속력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빛의 속도는 관찰자나 우주선의 속도에 관계없이 일정하다. 
광속불변원리.


<지구인 이놈들. 너희는 투표라는 것을 한다며?
그런데 뽑히는 놈이 다 똑같지? 설명하지 못하면 해부하겠다.>


그런데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
우주선 안과 우주선 밖의 사건이 한개가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다.
특수상대성이다.
이말이 맞은 이유는 뭘까?
가정을 세워서 이론을 설명한다.
이론이 맞으면 가정도 맞다.
이론이 틀리면 가정도 틀리다.
그런데 특수상대성이론의 가정이 맞다.

거울과 거울로 빛을 왕복시켜보자.
그 기기를 우주선에 태운다.
비행사는 그것을 보면서 여행을 한다.
초속 30만킬로로 달려보자.
앞으로 나아가는 우주선안에서 보면 빛은 항상 위아래로 왔다갔다. 

시간=거리/속도.
빛의 속도는 정해져 있다.
거리는 어떻게 될까? 
왕복을 초속 30만킬로라고 하자.
거울에서 거울로 가는 것은 절반인 초속 15만 킬로다.
1초에 한번 왕복.
우주선 밖에서 이를 보자.
빛이 이동한 거리가 더 길어진다.
우주선이 빛의 속도로 날아가기 때문이다.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것을 빛의 속도로 태워서 그만큼 날아갔다.
초속 60만 킬로미터다.
같은 1초가 우주비행사에게는 2초로 늘어난다.
정지해 있는 외계인이 볼때 빛의 속도로 날아가는 우주선안의 시간은 느리게 간다. 
외계인의 1초는 우주비행사의 2초다.
반대로 보자.
우주선안에서 화성의 외계인을 보면 시간은 빠르게 간다.
난 2초 지났는데 외계인은 1초가 지났다. 
착시현상인가?
아니다.
물리법칙은 불변이다.
거리=속도 X 시간.
빛의 속도로 달리는 우주선을 타고 이동을 한다 .
1초에 30만킬로를 60만 킬로로 갔다.
30만킬로 미터를 60만킬로로 갔다고?
1미터를 2미터로 걸었다고?
둘의 거리에 차이가 생긴다. 
거리가 늘어난다.
거리가 늘어난다 것은 공간이 왜곡된다는 것이다.
거리가 늘었는데 빛의 속도는 같다.
그럼 시간도 늘어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외계인의 1초는 비행사의 2초다.


<지구인 이놈들. 몇십년동안 키보드만 치면 이렇게 손가락이
가늘어진다. 모니터만 보고 있으면 목도 가늘어진다.
머리는 많이 쓰니 커진다.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니 눈도 커진다.
미세먼지 때문에 속눈썹도 길어진다.
외계인은 속눈썹이 없다. 미세먼지가 없어서>


공간이 왜곡된다고?
실험을 해보지 않아서 모른다.
어쩌면 우주선이 작아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거리가 늘어나지 않으면 우주선의 길이가 줄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주선이 줄어들어도 공간이 왜곡되는 것은 같다. 

철학과 과학은 분리할 수 없다.
물리학는 철학이다.
철학은 물리학이다. 
수학도 마찬가지다. 
그럼 결국 '생각'이 씨앗이라는 의미다. 
우주에는 '인간'외에 다른 생명체는 없다.
생각을 할 수 있는 존재는 인간이 유일하다.
축복아닌가?
그러니 맘껏 생각하라. 
실컷 생각하라.
즐겨라.
누려라.
삶은 짧다.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 감정이 솟구치면 일반적으로 시간과 공간이 왜곡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도 왜곡된다. 감정은 뇌에 전류를 흘려보낸다. 전류는
빛의 속도다.>

.................................................................

(예술과 인문학의 만남)④⑧숫자놀이


딸 아이가 요즘 숫자놀이를 한다.
엄마가 잘때마다 묻는다.
"3+5는?"
"8"
"박수~"
"8+7은?"
잠시 정적이 흐른다.
15라고 할때도 있고 14라고 말할때도 있다.
어쨌거나 맞힌다. 
틀리기도 한다.
어떻게 맞혔냐고 물어보면 "손가락을 허벅지에 올려놓고 세"라고 말한다.
손가락을 직접 안보고 허벅지에 닿은 손가락 감으로 세나 보다. 

나는 어렸을때 어떻게 수를 셌을까.
까마득하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지식을 흡수했다. 

숫자는 무엇일까?
우리는 숫자를 어떻게 인식하고 계산할까?


<거짓말 하지 말자. 수학을 포기한게 아니다. 수학을 포기하게
만든 것이다. 내 자식만 SKY보내기 위해서다. 족집개는 답맞히는 법을
가르친다. 기술을 가르칠 뿐이다. 그래서 수능보면 다 까먹는다.>


수와 숫자는 다르다. 
우리는 숫자를 알지 수를 모른다. 
정확히 말하면 숫자도 모른다. 
수를 모르고 숫자를 모른다.
단지 숫자를 다룰 뿐이다. 
'數'가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왜 그럴까?

1+1은 무엇인가.
2다.
누구나 안다

2+9는 무엇인가.
11이다.
이것도 안다

그럼 974389437718+678495743773는 무엇인가.
모른다. 
보통 우리는 두자릿수를 넘어가면 계산을 못한다. 
왜그럴까?
두자릿수까지만 보통 계산하기 때문이다.
수를 경험으로 때려 맞히는 것이다. 
974389437718+678495743773는 경험해보지 못해서 모른다. 
물론 답은 있다. 
계산기로 맞힌다. 
그것은 계산기가 아는 것이다. 
만약 계산기가 없다면?
일일이 저 많은 수를 손가락과 발가락으로 세야 한다.
즉, 저 수까지 일일이 경험을 해봐야 한다. 


<사람은 태어나면 도화지처럼 하얗다. 갓난아기가 160의 
IQ를 가질 수 있을까? 아니면 우월한 유전자 때문에 후천적으로
지능이 높아질까? 혹시 노력아닐까? 친구 잘때 공부하는
사람이 똑똑한 것이다.>


8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여덟개다. 
그럼 8의 의미는 무엇인가?
8개다.
그렇지만 8개가 모인 사물이 8일까?
컵이 8개 있다면 우리는 '8개'라고 말한다. 
'8개'는 경험에서 유추한 것이지 '8개'가 컵들을 의미하진 않는다. 
숫자는 사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8개'라는 것은 일종의 집합개념으로 인식한다. 
우리는 '8'이 뭔지도 모르면서 대충 '사물의 집합의 형태'를 8로 지정하는 것이다. 

8은 여덟개인가?
8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답을 못한다.
'원숭이 닮은 진화된 포유류?'
이외에 답이 없다. 
인간자체를 물으면 인간이 무엇인지 답을 어떻게 할까?
그런데 8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여덟'이라고 답한다. 
그것은 착각이다. 
인간이 무엇인지 물으면 답을 못하는 것처럼 우리는 8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모른다. 
심지어 數라고 하는 것은 경계가 없다. 
1.2.3.4.5.6.7..
수들을 나눈다. 
1과 2.
3과 4. 
우리가 숫자를 인식하는 것은 '사물들을 하나로 모은' 집합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가 8이라는 숫자를 정확히 이해한다면 다른 수도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럼 974389437718+678495743773 쯤은 쉬운죽 먹기다. 


<단기기억력은 침팬지가 인간보다 우월하다. 침팬지는
수를 아는 것일까? 아니면 패턴을 아는 것일까?
침팬지는 패턴을 외우는 것이다. 그래서 사칙연산은 못한다.>


물론 974389437718+678495743773를 단숨에 계산할 수 없다. 
수는 '무한'이기 때문이다. 
만약 974389437718+678495743773를 계산한다면 '인간이 지각하는 집합의 범위'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수가 아니다. 
'수'는 '무한'이다. 
974389437718+678495743773는 무한의 한 범위를 칼처럼 잘라서 정해놓은 '구역'이다. 

수학적으로 유한과 무한은 같다. 
무한은 계속 커져가지만 유한을 못넘어간다. 
철학자들은 이 문제를 고민했다. 
우주는 무한히 팽창한다. 
그런데 끝이 없을까?
우주의 끝은 있다. 
앞서 '없음'은 '없음'이기 때문이다. 
우주끝은 유한이다. 
무한은 유한보다 작은 이유다. 

'그런 이유로 우주끝에 닿아도 우주밖으로 손을 뻗을 수 없다'

어쩌면 우주밖으로 나가야 이 문제가 풀리는 것 아닐까?

어항속의 금붕어를 보자. 
어항밖을 어떻게 인식할까?
어항밖을 나가야 인식 가능하다. 
우주밖으로 나간사람은 없다.
지구밖을 나간 사람도 많지 않다. 
나가보지 않으면 이 무한과 유한의 역설에 갇힌다. 

하지만 에너지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에너지는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우주안에 에너지가 축적된다. 
폭발하거나 구멍으로 새어 나간다.
마치 풍선을 무한으로 불 수 없듯이.
어디론가 바람이 새거나 터진다. 

'웜홀' 혹은 '블랙홀'
풍선안에 한 미생물이 산다고 하자.
우주안에 사는 인간과 같이 작다. 
미생물은 풍선의 구멍이 나면 바람이 빠져나가는 것을 안다고 하자.
인간도 마찬가지로 우주안의 에너지가 어디론가 빠져나가는 것을 알 수 있다. 
너무 커서 아직 보지 못했을 뿐.
우주밖은 분명히 있다. 

'그런 이유로 우주끝에 닿아도 우주밖으로 손을 뻗을 수 없다'
이것은 우주가 여전히 팽창하고 있기 때문이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우주는 결국 경험이다. 
경험하지 못한 미지의 영역.
이성으로 예상은 할 수 있다. 
우주안에는 인간밖에 없다. 
그래서 축복이다. 
생각할 수 있는 능력.
우주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밖에 무엇이 있는지 아는 것.


<파이프가 무엇인가? 담배피우는 것? 경험상 그렇게 말한다. 
정말 파이프가 무엇일까? 파이프란 있을까? 인간이란 무엇인가?
답을 못한다. 파이프도 마찬가지다. 저렇게 생긴 것을 유추해
파이프라고 부르자'라는 개념이다.
경험을 서로 공유하는 것이다. 파이프는 없다. 미셀 푸코.>


외계인이 실험을 한다고 하자.
"8이 뭔지 알려주면 살려주고 모르면 해부하겠다"
사람은 손가락 8개를 올린다. 
외계인은 "8이 손가락이냐?"
사람은 숟가락 8개를 올린다.
"8이 숟가락이냐?"
사람은 깨닫는다. 
숟가락 4개와 손가락 4개를 들어 보인다. 
"이녀석 숟가락이랬다가 손가락이랬다가 장난해?"
사람은 결국 해부당했다. 


<지구인은 행성에 살면서 돈을 낸다. 그리고 숫자라는 이상한
언어를 쓴다. "대체 숫자가 무엇이냐?">


외계인이 맞다. 
8이라는 것은 없다. 
있지만 우리가 이해를 못한다. 
누가 손가락 8개를 '8'이라고 했나?
우리가 비슷한 것이 이만큼 모이면 '8'이라고 하자고 해서 생긴 것이다. 
그 집합은 오류를 일으켰다. 
그래서 손가락과 숟가락을 섞어 집합처럼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수를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은 숫자 개념이 있는 것이 아니다. 
수의 개념을 획일화 시켜 '제 맘대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수학자 프레게의 역설.

수는 그냥 숫자일까?
아니다. 
수는 우주를 구성하는 요소다. 
피타고라스의 역설.
숫자느 돈셀때만 있는 게 아니다. 
그럼 대체 숫자란 무엇인가?
피아노는 현의 길이에 따라 소리가 달라진다. 
그 소리의 차이는 주파수 진동수를 변화시킨다. 
고막으로 소리의 진동을 느낀다. 
그걸 뇌에서 인식해 '소리가 들린다'라고 전기신호를 보낸다.


<피타고라스 때문에 많은 사람이 수학을 포기했다. 
아니다. 피타고라스는 어려운 말을 안했다. 수학교육방식이
문제였다. 점수따려고 수학하니 될터가 있나.>


수는 무엇일까?
440헤르츠로 거문고를 퉁겨보자.
들린다. 
880헤르츠로 거문고를 연주해보자. 
한 옥타브 올라간다. 
둘을 같이 연주하자.
880헤르츠만 들린다. 
더 큰 대역의 주파수에 작은 것이 뭍힌다. 
왜 따로 놀지 않나?
주파수를 '수'로 나눠 놓은 것은 의미가 없어진다. 
수의 경계가 없어진다. 
원래 수는 경계가 없다. 
우리가 8이라고 집합으로 인식해서 '임시'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440헤르츠와 660헤르츠를 동시에 퉁겨보자.
이상한 음이 나온다. 
불완전해서 듣기 거북하다. 
수는 이렇다. 
하나의 질서가 있다. 
정확하게 떨어진다. 
1.2.3.4.5.6..처럼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줄기처럼 이어진채 정확하게 떨어진다.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 사람들은 '시간이 없어'라고 말한다.
맞다. 시간은 원래부터 없었다.
수를 알지 못한다. 그럼 시간은?
시간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놀라운 일이다. 공간은? 혹시 뇌의 착각 아닐까?>


음악에서는 화음이 중요하다. 
칼로 자른 듯 정확히 나눠진다. 
좋은 화음과 나쁜 화음.
조화다. 

이런 이유로 수학은 논리학이다. 
숫자놀이가 아니다. 
논리의 싸움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질문은 무엇일까?
석박사일까?
아니다. 
"이것은 무엇인가?"이다. 
사물은 무엇이다라고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종이컵은 종이컵이다는 우리끼리 약속한 멘트다. 
종이컵이란 대체 무엇일까?
설명할 수 있을까?
종이로 물받으려고 만든 컵?
컵이 뭐지?
담는 것?
사물은 경계가 없는데 어떻게 담아질까?

이 문제는 예전에 풀렸다.
뉴턴.


<사과가 떨어진 것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게 아니다.
사과가 떨어진 것을 보고 독수리도 땅에 앉는다를 유추했다.
독수리는 왕의 상징이다. 그런데 왕은 매일 가마를 타고 다닌다. 
땅에 발을 딛지 않는 것이 독수리처럼 신성하다는 이유다. 
사과도 독수리도 땅에 닿았다. 왕도 땅에 발을 딛는다를 생각했다. 
그래서 만유인력의 법칙이 나왔다. 권위를 의심하고 자유를 갈망하는
생각이 자연과학을 낳았다.>


F=ma
F는 힘. 
m은 질량.
a는 속도다.

하지만 세상에 거저먹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생각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으면 머리안에 그냥 들어오지 않는다. 
힘을 가하면 위치가 변한다고 한다. 
아니다. 
위치가 아니라 속도가 변한다

속도가 '변하는 것'이지 속도가 '생기는 것'이 아니다.

"아니! 가만 있는 차를 밀면 속도가 0에서 10km/h로 가던데?"
분필을 위로 던지면 떨어진다. 
던질때 없던 속도가 생기고 잡을 때 있던 속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속도가 있다. 
멈춰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분필 안에서도 물질이 흐른다. 
공기와 빛의 흐름을 받는다. 
보지 못할 뿐이지 속도는 있다. 

음소거한 TV.
소리가 0이다. 
안들리나?
가만히 스피커에 귀를 대보면 소리가 들린다. 
음소거가 아니라 소리를 최저로 줄인 것이다. 
소리가 0이면 전류가 안통한다는 뜻이다. 
소리 끄려다 TV가 꺼지게 된다. 

마찬가지다. 
힘은 사물의 속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속도의 변화를 주는 것이다. 
그래서 F=ma에서 a는 속도가 아니라 가속도다. 
속도와 가속도는 천지차이다. 
8을 칼로 자르듯 정확히 8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엘리베이터에서 마주보는 거울.
무한히 뻗어간다. 
서로를 비추는 거울.
한 거울을 지정해서 크기를 잴 수 있을까?
무한히 뻗어가면 각 거울마다 크기가 계속 달라질텐데.
크기 차이를 느끼지 못할뿐 분명히 각 거울들은 달라지고 있다. 

추상적이다.
하지만 이 추상적인 생각이 현실을 감싸고 있다. 
F=ma의 발견으로 우주 해성의 움직임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위성을 쏘면서 구체적으로 적용도 한다.

'넌 너무 추상적이야'
이는 매우 현실적이라는 말과 같다.
단지 '현실적'이라는 것은 '작은 경험에 기초해 맞다고 스스로 만족하는 것'에 불과하다. 
8+3은 11이라고 답한다. 
하지만 11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답을 할 수 없다.
생각의 힘은 결국 추상능력에 있다. 
생각은 가르칠 수 없다. 
단지 '생각함'만 가르치는 게 가능하다. 


.......................................................

(예술과 인문학의 만남)④⑦내게 없는 것은 나를 흥분시키지 않는다


마음속엔 무엇이 있을까?
그리고 마음속에 무엇이 없을까?
우리는 어떤 것에 반응하고 흥분할까?
우리 마음속에 없는 것에는 반응하지 않는다.
마음속에 있는 것에 사람은 반응한다.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하자.
그 말을 듣는다면 상대는 반응을 한다.
좋아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그것은 사람 마음속에 '애정'이라는 감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감정이 없다면 벽에 대고 소리치는 것과 같다.
 
누군가에게 욕을 한다고 하자.
상대는 흥분한다.
이유가 있으면 그 이유를 알기 때문이다.
이유 없이 욕을 하면 '행패'를 부린다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무엇인가 마음 속에 있기 때문'이다.


<대체 무엇이 그대를 가슴떨리게 하는가. 경험? 기억?
착각?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가가 중요하다.>


없을 無.
있을 有.
없다는 것은 없는 것이다. 
없다를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없는 것은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반면 있다는 존재하는 것이다.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강아지 한테 '사랑한다'라고 말하면 '저도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람한테 '사랑한다'라고 말하면 '왜?'라고 묻는다. 
강아지한테는 사람의 감정이 없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같은 감정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없는 것에는 반응하지 않는다.
마음 속에 있는 것에만 반응한다.

언어와 논리.
사람은 '있는 것'과 관련해서만 인식한다.
그래서 언어로 소통하고 논리로 대화한다.
논리가 없다면 '없는 것'이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면 '無'다.
없는 것에는 반응하지 않고 표현할 수도 없다.
다른 얘기지만 이런 이유로 '신은 없다'.

언어와 논리는 피부에 와닿는 것부터 추상적인 것까지 포함된다.
일상적인 것은 언어와 논리로 모두 풀어낼 수 있다.
그럼 추상적인 것은 어떤가?
우리가 쉽게 알지 못할 뿐 언어와 논리로 알 수 있다.
단지 낯설 뿐.
추상적, 관념적인 것과 일상적인 것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수학은 어떤가?
숫자로 정확히 일치한다.
인간의 마음은 어떤가?
마찬가지로 숫자로 일치한다.
단지 인간의 마음이 더 복잡하고 범위가 넓어서 시간이 걸릴 뿐이다. 
인간의 마음은 우주보다 더 정교한 수학이다. 
우주나 마음이나 언어와 논리로 파악이 가능하다. 

고로 우리는 없는 것에 집착말고 있는 것을 그대로 바라봐야 한다. 
신이 있다면 아마 천재적인 과학자였을 것이다. 
조물주가 있다면 철저하게 수학적으로 인간을 빚었을 것이다. 
아름답지 않은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사람과 자연이 돌아간다는 것이.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 
단지 결과를 보고 이유를 추적할 뿐.
이유는 반드시 존재한다.
이유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이유다.


<끝이 있을까 없을까?>

있는 것과 있는 것의 충돌.
대화다. 
대립과 모순이 생긴다. 
한쪽이 막히면 보완이 된다. 
정-반-합으로 '있는 것'들끼리 뭉치고 발전한다.
사람도 세계도 '있는 것'들끼리의 대립과 모순으로 변화한다. 

그럼 이 문제를 한번 풀어보자. 
사무실에 여러명이 앉아있다. 
이 사람들은 한사람일까 여러사람일까?
한사람이다. 
만약 2개 이상이 존재하려면 그 사이에 틈이 있어야 한다.
경계선.
그 틈은 2개의 '있는 것' 사이에 박혀야 한다. 
그 틈은 결국 '없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없는 것은 없다. 있는 것만 있다".
없는 것이 없는데 '없다'라는 틈이 존재할까?
그래서 논리적으로는 하나가 된다. 

말장난인가?
아니다.
사람이라서 그렇지 산소를 보자.
산소가 결합한다. 
두개의 식물이라고 보자.
접붙인다.
하나가 된다. 
산소나 식물이나 두개는 떨어져 있지만 경계선이 어디일까?
경계선이 없다.


<원래 두개였나? 원래 하나였나?>

이것은 파르메니데스라는 철학자가 생각한 것이다. 
궤변일까?
이로인해 사람들은 '원자'의 개념을 알아낸다. 
경계선을 찾기 위해 쪼개고 쪼갠다. 
마침내 쪼개지지 않는 원자를 발견한다. 
그 원자론으로 우리는 과학기술을 누리고 있다. 
모든 것이 원자까지 쪼개지지 않는다면 경계선은 없다. 


<Atom. tom은 그리스어로 '자르다'다. 마지막 한개가 될때까지
자른다. 사람들은 미쳤다고 했다. 그런데 결국 '원자'가 발견됐다.> 


왜 그럴까?
우주가 탄생하던 빅뱅을 보자.
우주의 6가지 원소.
산소, 탄소, 질소, 수소, 황, 인, 마그네슘 등등.
태초에 생명에 결합되지 않는 원자들로 구성됐다. 
2019년 지금의 '나'도 결국 원자들로 구성됐다. 
형체는 결국 하나다. 
원자들만 서로 경계선을 갖고 있다. 

"응? 너랑 나랑 서로 다른 개체인데 무슨 하나?"

그렇다. 
시간과 공간은 이렇게 상대적일 뿐이다. 
상대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그럼 이건 어떤가?

"있는 것은 스스로 변화하거나 운동하지 못한다"

뜬구름 잡는 소리인가?
화살을 쏴보자.
휙 하고 날아가 꽂힌다. 

'나는 화살은 움직이지 않는다'

양궁대회에서 쏜 살.
슬로우 모션으로 돌려보자.
화살이 곧게 날아가지 않는다.
뱀처럼 꾸물꾸물 난다.
놀랍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닌 것이다.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정지된 것이 이어지는 것이다.
뇌는 항상 착각을 일으킨다.>


그럼 화살은 정말 나는 것인가.
시간은 쪼개진다. 
1시간.
1분.
1초.
0.1초
0.01초
계속 '순간'으로 쪼개보자. 
계속 쪼개자. 
그러다보면 멈춰진 '순간'이 나타난다. 
순간은 0에 가까울 뿐 無는 아니다. 
그 순간들이 이어져서 우리는 '화살이 난다'라고 생각한다.
나는 것이 아니다. 
순간은 멈춰있다. 
멈춘 순간들이 이어지는 것이다. 

'이상하다. 화살이 날아가는데 왜 멈춰있다고 하지?'

그렇다고 날아오는 화살앞에 멍하니 서있으면 안된다. 
앞서 언어와 논리를 말했다. 
논리적으로 본다면 화살은 순간의 연속이다. 
순간은 멈춰진 상태다. 
멈춘 상태라서 변화도 운동도 없다. 

거북이와 아킬레스의 달리기 게임.
거북이가 불쌍해서 몇걸음 앞에서 달린다. 
준비 '땅'.
아킬레스는 평생 달려도 거북이를 못이긴다. 

'응? 왜? 미쳤나?'

거북이가 멈추지 않는 한 아킬레스는 절대 거북이를 못 이긴다. 
둘다 멈추지 않으면 무한으로 근접할 뿐 따라잡지는 못한다. 
이런 논리로 본다면 결국 '운동'이라는 것은 없게 된다. 


<그림판에 올려 a와 b만 남겨놓고 지워보자. 
a와 b는 같은 색깔이다. 착시. 착각. 인간의 뇌는
불완전한 신체다. 그럼 우리가 느끼는 시간과 공간은 어떤가?>


논리가 맞다면 존재한다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틀리지 않았다는 의미다. 
그런데 왜 이런 논리가 풀리지 않을까?
어쩌면 우리는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 완전히 잘못 알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실제 지구에서 시간과 우주에서 시간은 다르다. 
지구에서 공간과 우주에서 공간도 다르다. 
화성과 지구는 말할 것도 없다. 

이 문제는 파르메니데스의 제자 '제논'이라는 철학자가 제기한다.

그럼 이 문제는 어떻게 이해하고 풀어야 할까?

다음 시간에는 이 문제를 풀어줄 열쇠 '상대성 이론'을 알아보자.


<아인슈타인이 신을 믿지 않는 이유.
메롱.>



....................................................................

(예술과 인문학의 만남)④⑥보이는 소리


공감각.
두가지 감각을 동시에 느끼는 것.
소리안에서 색을 발견한다.
색을 보면서 맛을 느낀다.
가능할까?
고등학교 다닐때 문학교과서에서 '푸른 손짓'이라고만 배웠다.
두개 감각을 합쳐놓으면 그것이 공감각이라고 했다.
지금도 모르겠다.
공감각을 느껴본 적이 없다.
하지만 공감각을 느끼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다.
하기야 공감각을 느끼지 못하면서 '느끼는 사람이 많다'고 얘기하는 것도 웃기다.
어쩌면 '많다고 하더라'가 맞다.
랭보는 알파벳에서 색을 본다고 한다.
스티비 원더는 소리에서 색을 느낀다고 한다.

 
<이 소리는 어떤 색인가? 처음에 들을때 '너만 보면 노랗고 밝아'.
점점 갈수록 '왜 우리는 점점 멀어지지. 아마 어두워서 그런가봐'.
마지막에는 '하얗다. 그럼에도 사라지지 않는 얼룩은 바로 그대'.
그녀는 왜 삐쳐서 말이 없을까. '바흐'.>


공감각 능력은 누구나 있는데 성장하면서 잃는다고 한다.
맞는 것 같다.
어린 시절 할머니들이 '아이들은 넘어지면서 특유의 능력을 잃게 된다'고 농담을 하셨다. 
농담이 아닐 수도 있다. 
어린 시절.
누구나 알지 못하는 '감각'이라는 것이 서서히 사라진다. 
때가 뭍으면 없어지는 것일까?

몽고 초원에 사는 유목민은 시력이 10.0에 가깝다.
숲속 저멀리서 알을 낳는 새를 보기도 한다.
또렷하게.
신체나 정신이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능력이 있다.
한계를 계속 넘어서는 사람이 있듯이.
감각도 잃어버리지 않고 계속 발전시키면 진화한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을 달리해야 한다.
안풀리더라도 계속해서 답을 찾아보는 것.
답이 중요한게 아니다. 
어떤 답을 찾아가는지 과정이 중요하다.
사고력은 맞힌 개수 동그라미가 아니다.
그건 SKY가서 '형님먼저 아우먼저' 서로 밀어주며 살때 필요한 것이다.
생각은 틀린 개수 X에서 나온다.
많이 맞히면 불행이 시작된다. 
틀리기 시작하면 행복이 찾아온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하는 사람은 감각이 뛰어나다.

뇌는 3층 구조로 돼있다. 
제일 아래가 뇌하수체로 생명을 담당한다.
소뇌가 감정.
대뇌가 이성.
피는 아래에서 위를 돌아 다시 심장으로 들어온다. 
피와 산소가 생명에서 감성을 돌아 이성으로 흐른다. 
이성은 감성이 담당한다.
감성은 생명이 담당한다.


<조규석 화백의 '생명의 소리'.>

바흐의 토카타. 
1708년 독일 바이마르에서 작곡한 오르간 곡.
안정된 삶. 
교우관계도 행복한 시절
오르간 칸타타로 비발디와 북스테후데의 영향을 받은 곡.
바흐 '토카나-푸가 BWV 564번'

토카나는 이탈리아어로 '닿다'라는 의미다.
중후한 화음과 급속한 전개.
푸가는 '도망'이 어원이다. 
악기로 하나의 패턴 음을 변칙적으로 따라하는것. 
모방하는 것.
바흐 시대는 토카타-푸가 작곡이 유행이었다. 
바흐 '토카나-푸가 BWV 564번'
여기에는 느린 악장이 있어서 다르다.
실험적인 작품이다. 

삶도 같지 않다.
언제나 모방과 실험이어라.
그래서 새로운 '나만의 것'이 나온다.



<소리가 보인다. 옆에서 재잘대는 것 같다.
왜 사랑해주지 않냐고 칭얼거리는 연인처럼>


공감각을 느낄 수 있는 시 한편.
물이 나무뿌리를 넘어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그대는 아름다운 사람이다.

그는 물소리는 물이 내는 소리가 아니라고 설명한다. 
그렇군, 
물소리는 물이 돌에 부딪히는 소리,
물이 바위를 넘어가는 소리, 
물이 바람에 항거하는 소리, 
물이 바삐 바삐 은빛 달을 앉히는 소리, 
물이 은빛 별의 허리를 쓰다듬는 소리, 
물이 소나무의 뿌리를 매만지는 소리,
물이 햇살을 핥는 소리, 
핥아대며 반짝이는 소리, 
물이 길을 찾아가는 소리,

가만히 눈을 감고 귀에 손을 대고 있으면 들린다. 
물끼리 몸을 비비는 소리가. 
물끼리 가슴을 흔들며 비비는 소리가. 
물이 젖는 것도 모르고 
뛰어오르는 물고기들의 비늘 비비는 소리가

심장에서 심장으로 길을 이루어 흐르는 소리가. 
물길의 소리가.

강은교 시인의 '물길의 소리'.


물소리는 물이 내는 소리가 아니라는 깨달음.  
물이 무언가와 마찰이 일어날 때 나는 소리다. 
그러고 보니 물의 소리는 참 요란도 하다. 
바다에서는 놓칠 수 없는 파도 소리가 있다.
작은 개울물 흐르는 소리에서 나이아가라 폭포처럼 고막을 찢을듯한 낙차에 의한 소리까지.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다.
물 흐르는 소리는 불안을 잠재운다.
자연의 경건함을 일깨워주기도 한다. 
물에서 태어나고 물의 땅으로 돌아가는 생명들.
물이 스쳐지나갈때 오감의 기억이 소리를 내며 부서진다. 
부서지는 느낌이 모두 느껴지는가.
물소리는 태어나고 죽는 과정에서 오감의 기억이다. 


..........................................................................

(예술과 인문학의 만남)④⑤똘레랑스

Tolerance.
프랑스는 똘레랑스라고 읽는다.
관용이다. 
공자의 '恕(서)'와 같다.
상대를 이해하는 것.
공감하는 것이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
쉽지 않다.
이유는 '인간은 자신의 몸속에 갇힌 동물'이기 때문이다. 
관용은 '자기성찰'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금수와 다를 것이 없다.

똘레랑스는 어디에서 시작됐을까.
과거 프랑스는 종교의 자유가 없었다.
한 아버지는 아들을 죽였다는 혐의를 받았다.
'개신교에서 카톨릭으로 개종하려는 아들' 때문이다.
알고보니 이 아들은 종교문제로 자살을 했다.
프랑스는 카톨릭을 신봉했다. 
개신교를 신봉하는 아버지가 아들을 카톨릭으로 바꾸지 못하게 죽였다는 것이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종교를 바꾸면 배신이었다.
타인과 내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의견이 다른 것.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
관용이 없는 사회다.
획일성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이다.


<흑인, 백인, 황인종 아니다. 초콜릿빛, 분홍빛, 복숭아빛 사람이다.
까만색이면 밤인가? 흰색이면 도화지인가? 노란 얼굴이면 뭘까?
언어는 사고를 지배한다. 흰색은 순결, 검은색은 악마, 노란색은
원숭이를 의미한다.>


볼테르는 이 시대를 살았다.
관용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관용과 다르다.
철학사전에서 관용은 '인류의 특권'이다.
약점과 오류를 지닌 존재가 인간이다.
우리의 어리석음을 서로서로 용서하는 것.
이것이 첫번째 자연법칙이다. 
사상의 차이=생각의 문제.

동물은 힘의 우월로 개체를 통제한다.
인간은 다르다.
공리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등 여러사상을 만들고 사회를 구성한다.
한개의 사상도 사람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인다. 
동일한 생각을 못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여기서 관용론이 나온다.


<볼테르>

볼테르는 생각의 자유를 사상의 자유로 옹호한다.
타인의 사상을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박해의 대상으로 삼으면 안된다.

"생각과 사상의 차이를 박해하면 괴물이 된다"
-볼테르


볼테르는 독특한 철학자다.
18세기 워렌버핏.
투자의 달인이다.
그가 위대한 작가이자 철학자가 된 것은 바로 돈 때문이다.
프랑스의 계몽사상사.
프랑스 사상의 아버지.
볼테르는 부유한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났다.
볼테르는 필명이고 본명은 '마리 아루에'.
자산계급의 계몽운동을 이끌었다.
프랑스의 가장 훌륭한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플라톤의 철인통치를 계승해 입헌정치를 주장했다.
진보적인 군주통치를 원했다.
하지만 군주에게 지배항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조선을 세운 삼봉 정도전과 비슷한 생각을 했다.
볼테르는 전제주의와 봉건제를 반대했다.
입헌군주제를 추진하다 두번이나 추방당했다.
그러던 중.
영국에서 2번째 망명생활에서 인생의 태도가 바뀐다.


<부르주아와 프로레탈리아는 같이 전제군주제를 무너뜨렸다.
그리고 부르주아의 배신.>


"개인의 독립과 자유를 보장하는 것은 돈이다"
진정한 사상적 자유는 물질적 바탕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볼테르는 조건이 충분하다.
많은 유산을 물려받았다.
법률과 경제에 밝았다.
정부연금도 받고 찬조금, 출판소득이 많았다. 
복권으로 50억원도 벌었다.
확률을 계산해 복권을 대량구입함으로써 막대한 부를 쌓았다.
옛날 복권이니까 가능했었다.

이후 은행가 형제들을 만나 군량사업과 대미계약으로 60억을 더 번다.

"비즈니스는 인생의 소금이다"
-볼테르


평민출신의 최고의 부자는 단연 볼테르다.
그는 돈을 바탕으로 사상계몽과 문학창작에 힘을 쏟는다.
봉건제를 거부한 볼테르.
그를 중심으로 천한 상인들은 혁명에 성공한다.
부르주아 혁명.
혁명은 배신의 장미인가.
부르주아는 프롤레타리아의 잡은 손을 놓아버렸다. 

아이러니하다. 
관용과 富.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를 이기지 못했다. 자본주의는
너무 화려하고 황홀했다. 그럼 여기가 가장 진보한 세상인것인가?
아니면 더 나은 세상이 있는 것일까? 살아봐야 안다.
그림은 1830년 7월 혁명의 3일간 이야기.>


.......................................................

(예술과 인문학의 만남)④④나는 그대에게 어떻게 기억되나

친구가 문자를 보낸다.
'날씨가 정말 좋다. 싱그러운 꽃향기가 자꾸만 콧속으로 날아들어. 마음이 어지럽다'.
약 올리나.
창밖을 본다. 
햇발이 마치 처음 뻗친 양 눈부시게 비친다.
바람이 분다.
자유로운 남녀의 사랑.
머릿속으로 떠올려본다.
사소한 일상은 멀리 날아간다.
상상속의 낙원이 현실처럼 펼처진다. 
아프리카로 가보자.
뜨거운 아프리카 대륙과 사람들. 
자유로운 영혼들. 
한 여성은 남자를 사랑한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현실 탈출이 가능한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


<케냐에 카렌 브릭센의 집. 잘 보존돼 있다.>


카렌 블릭센.
실제 영화의 주인공.
케냐에서 커피농장 경영한다.
연인과 농장을 모두 잃고 글쓰기에 나선다. 
1937년 그녀의 회고록을 기반으로 한 영화.
그녀의 글.
지난 시대의 삶의 넓이와 깊이가 담겨있다.
영화는 아프리카의 풍경과 인간을 함께 담아놓았다.
깊은 감정의 세계.
흐르는 모차르트의 선율.
장엄함과 낭만을 보여준다. 

그녀는 남편과의 결혼식 기쁨도 잠시.
커피재배로 언쟁을 벌인다.
남편은 돈을 벌기 위해 홧김에 전쟁에 참가한다.
다시 홀로 남은 그녀.
어느날 사자의 공격의 받게 된 카렌.
우연히 데니스가 나타나 도와준다.
그리고 남편과의 이혼.

결혼을 바라는 데니스.
그녀는 결혼이라는 구속을 바라지 않는다. 
커피농장도 결국 도산하고 아프리카를 떠나는 카렌.
'데려다 줄께'.
허나 데니스는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한다.
영원히 데려다 주지 못한다.
추억을 가슴에 담고 고국 덴마크로 떠나는 카렌.
운명적 사랑을 했지만 아프리카 추억을 간직한 채 결국 떠난다.
모차르트를 사랑했던 남자 데니스.
더불어 아프리카와 자유를 사랑한 남자.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 out of는 '~의 밖'이 아니라
'~로부터' 'from'이라는 뜻이다. '안에서 밖으로'라고 외우면
편하다. 모차르트 클라리넷 협주곡.>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는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이 흐른다.
카렌에게 데니스로 기억되는 장면.
데니스에게 카렌으로 회상되는 '머리감겨 주는 신'.
이 곡은 모차르트의 흔치 않은 클라리넷 협주곡이다.
모차르트가 남긴 최후의 협주곡이다.

1791년 10월에 완성.
모차르트가 죽기 두달 전이다.
영롱하면서도 아련한 선율.
나는 그대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는가. 
선율을 따라 기억이 만져진다.



...................................................................

(예술과 인문학의 만남)④③나를 사랑해줘

인간의 사랑.
어렵다. 
가족간의 사랑은 쉽다.
가족외의 사랑은 어렵다. 
왜일까.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똑똑하고 용맹했다. 
한 여인은 항상 그 남자 주위에 있었다.
하지만 전쟁에서 불구가 됐다. 
그 여자는 여전히 그 남자를 사랑할까?
그 여자는 알고보니 그 남자의 어머니다. 
만약 애인이었다면 우리는 'No'라고 답했을 것이다. 
어머니임을 알고나면 대답의 강도가 달라진다. 
그 누구도 어머니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모의 사랑은 자연적이다. 
매우 도덕적이다. 
사람은 사랑을 받기 때문에 남을 사랑한다.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사랑을 할 줄 모른다.
사람을 격리하면 안된다.
좋은 사람은 좋은 딸,아들이 된다.
친구, 시민,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은 가족간의 사랑에서 시작된다. 
인류애는 가족의 사랑에서 가능성을 본다.
공자다.


<오늘은 사랑이 풍년이로세>

국민을 아이낳는 도구로만 생각하면 안된다. 
정작 잘 기르도록 하지도 않으면서.
부국강병의 대상으로 여긴다. 
시민은 증오심만 키운다. 

기원전 517년. 
공자.
여인의 울음소리. 
무덤에서 운다.
제자 '자로'에게 알아보라고 한다.
기구한 사연이다.
사나운 호랑이가 시아버지 죽였다.
남편도 죽였다.
아들도 죽였다.
왜 호랑이가 없는 곳으로 안가냐고 물었다.
여기는 가혹한 정치가 없다고 답했다.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


<요즘 '녹두꽃' 드라마가 한창이다. 동학을 만든 최제우. 그의 
뒤를 이은 최시형. 최시형은 전봉준을 찾아가 '이제 그만하자'라고
한다. 우리 삶도 닮았다. 처음과 달리 신념을 포기하는 사례가
많다.>


공자의 무덤은 공림이라 부른다. 
인류 4대 성인 중 한명.
자공이 6년간 스승의 묘를 지켰다. 
자공은 돈도 많이 모을 정도로 사업수완도 좋았다고 한다. 

정치란 무엇인가.
군사력과 백성.
신뢰와 식량.
위급한 상황이라면 무엇을 먼저 포기해야 하나.
군사.
다음이 경제다.
마지막 남는 것이 신뢰다. 
나라를 믿을 수 없다면 망한다.
군사력과 경제력을 키우면 강해진다고 한다.
아니다.
군사력과 경제력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신뢰다. 

하지만 가족애도 가혹함이 있다. 
위나라에 '악양'이라는 장수가 있있다.
그의 아들 '악사'는 적국에 포로로 잡혔다. 
적이 그를 협박했다.
악양은 아들을 죽이라고 했다.
적국은 '중산국'이다.
어느날 중산국의 사자가 '국'을 한그릇 가져왔다. 
아들을 죽여 고깃국으로 만든 것이다.
악양은 경악했다. 
도리어 그걸 먹어버렸다.
결국 중산국은 악양에게 망한다.
이를 안 위나라 왕은 악양을 멀리했다.
악양은 스스로의 행위를 나라 위한 가족의 희생으로 명분으로 삼았을 것이다. 
하지만 '자식을 잡아먹는 자는 무엇을 못 잡아먹겠는가'.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친자관계.
기본적인 인간관계를 외면하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욕심의 화신.
악마.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못할 짓을 한 것이다.
악마의 세상으로 바뀐다.
비판받아 마땅하다.
국가의 충성은 핑계일 뿐이다 .
따지고 보면 계백장군도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긴 것이다. 
목적을 위해 본성을 버리는 것.
그것은 광기를 넘어 악마가 된다.


<계백은 영웅인가 미친놈인가. 가족을 살해하고 나라를 구한다고 했다.
자기 욕심에 가족을 희생시킨 것 아닐까? 사랑하는 가족마저 죽이고 전장에 나선다는
것은 핑계다. 유가사상의 왜곡이다. 사상을 나라충성에 끌어들이는 위정자들.
사상은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이지 부국강병하라는게 아니다.>


간혹 가족을 저버리고 충성을 맹세하는 사람들.
가족조차 사랑하지 못하면서 세상을 어떻게 구제할까.
일보다 국가보다 가족이 먼저다. 

이번엔 맹자다.
한번은 맹자가 관직에 있었다.
기원전 5세기.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를 고발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신이 선하면 백성도 선해진다'.
아들의 불효를 처벌하려는 관리를 막는다.
'정치가 왜 살인을 하나'
맹자는 부자를 같은 감옥에 가둬놓았다. 
아버지는 울화통이 터진다. 
부자간 소송은 시비를 가릴 수 없다. 
내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이다.
결국 아버지는 소송을 철회한다.

아버지가 아들을 이해하고 용서하는게 중요하다.
기본적인 가족의 애정을 지킬 수 없으면 이웃이나 마을, 공동체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토대를 상실한다.
용서하고 이해 .
타인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모범.
호수에 물한방울이 떨어진다.
동심원이 퍼지듯이 인간에게 확장된다.
무엇이?
공감이.


<이 사진을 보고 우유광고가 생각나면 꽤 오래 산 것이다.>

만약 모두가 빗방울이 돼 떨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그 동심원이 퍼진다면 대동사회가 된다 .
과연 가족사랑의 확대는 가능할 것인가.
이웃으로의 확장은 실현될 것인가.

자공이 평생동안 실천한 만한 과제는 무엇이 있냐고 맹자에게 물었다.
맹자는 '恕'라고 했다.
용서 서.
'기소불욕물시어인'
'자기가 하기 싫은 것은 남에게도 하지말라'.
恕는 같을 여 마음 심.
공감을 의미한다.
머리가 아닌 몸이 느끼고 반응하는 것.
서로 돕고 싶은 마음이다.
사람이 도덕적인 존재로 성장하기 위한 것.


<우리는 개와 고양이에 측은지심이 든다.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인도사람은 흰소에 측은지심이 든다. 이슬람은 돼지에 측은지심이 든다.
모두 다 멀리 있는 것은 측은지심이 안든다. 측은지심은 객관적인 감정이다.
발생하는 곳은 주관적이다.>


이기심을 넘는 방법.
공감이다.
나비를 잡으려는 아이.
우물에 빠지기 직전.
서양에서는 일종의 '사고실험'이다.
아이를 본 사람.
측은지심을 느낀다.
인간이 가진 직접적인 감정이다. 
본능적이다. 
아이 부모에게 잘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에 영향을 받고 감정변화가 생긴다. 
맹자의 측은지심이다.
인류애의 시작이다.
나와 관계가 없어도 그 고통을 느끼는 것. 
이것이 타인과 내가 연대하는 이유가 된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부과해서는 안된다는 것과 연결된다.

물론 측은지심이 가끔 오류도 일으킨다.
어느날 소가 끌려간다. 
제물로 바쳐질 예정이다. 
사람들은 소를 놓아 주라고 한다. 
그럼 고기를 어떻게 먹나.
소 대신 양으로 바꾸자고 한다.
양은 안불쌍한가?
사람들은 비난한다.
'소보다 양이 싸서 바꾼 것인가?'라고.
맹자가 이를 해결했다.
소는 눈으로 보았고 양은 보지 않아서다.
옛말에 군자는 푸줏간을 멀리한다는 말이 있다.
가까이 있는 존재부터 측은지심을 느끼기 때문이다.
푸줏간에서 죽어나는 동물 소리를 들으면 고기를 먹지 못한다.
푸줏간에서 떨어진 곳에서 고기를 맘껏 먹으라는 말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측은지심도 생기기 힘들다는 것이다.


<개고기를 먹고 안먹고가 중요한 게 아니다. 이유는 간단하다.
지구의 1/3이 개고기를 먹는다. 중국과 인도만 해도 몇십억이다.
이슬람이 세계를 지배한다면 돼지를 먹지 말라고 할 것이다.
만약 지금의 간빙기가 끝나고 다시 지구가 얼어붙는다면?
그땐 뭐라도 먹어야 할텐데..아마 지금의 사진은 추억이 될 것이다.
고로 개고기를 먹고 안먹고가 중요한게 아니다. 왜 개를 불쌍하게
생각할까가 더 중요하다.>


개고기를 먹지 말라고 한다.
그럼 소고기는 어떤가?
개는 곁에 있고 소는 멀리 있어서다.
그말은 개는 가까이 있고 사람은 멀리 있어서다. 
다시 말하면 사람과 가까이 지내지 않는 경우 개를 친하게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개는 귀엽다.
창밖에 걸인은 더럽게 느껴지는 것.
측은지심은 이런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가족애. 
이걸 확장하라. 
가까이 있는 것에 측은지심이 생긴다. 
멀리 있는 것은 안보여서 그렇다. 
비맞은 강아지가 측은해 보이는 것.
배고픈 걸인이 거리에 쓰러진 것.
둘다 측은하다. 
한쪽이 측은하지 않으면 그만큼 심리적 거리가 멀다는 의미다. 

가끔은 측은지심을 오해하기도 한다.
주나라의 폭군이 있었다.
그는 전쟁을 좋아했다.
하지만 따뜻한 가슴이 부족하다. 
똑똑하기만 하다.
죄인은 마당에 불구덩이를 걷게 했다.
고통을 보고 즐거워 한 것이다.
측은지심이 없다. 
결국 혁명은 이런자를 제거하기 위해 일어난다.
지구위 모든 혁명은 목적이 하나다.

주왕, 걸왕.
모두 폭군이지만 신하에게 살해당한다.
폭군을 '잔적'이라고 한다.
일명 필부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왜 왕을 혹은 대통령을 끌어내리는가라고 반문한다.
맹자는 답한다.
'필부를 죽인 것이지 왕을 죽인것이 아니다'.
왕은 측은지심이 있는 사람이다.


<맹자는 왕을 죽이라고 한 적이 없다.
어리석은 필부를 없애라 했다. 
왕은 자비롭고 명석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왕위에 오르면 왕일까?>


양혜왕이라는 자도 있었다.
위나라 사람이다. 
욕심이 강했다.
아들이 죽어가면서도 전쟁에서 승승장구한다.
천민들에게 시혜를 베풀었다.
자신은 덕이 많다고 자랑한다.
그런데 왜 나라가 승승장구 못하냐고 맹자에게 물었다.
맹자가 이렇게 답했다.
 
탈영한 군인 100걸음 걸었다. 
또 한명이 50걸음 걸었다.
앞선 병사에게 소리쳤다.
"야 이비겁한 놈아"
둘다 차이가 없다. 
달아났다는 것이 중요하다.
즉, 옳지 못하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래놓고 왜 안되냐고 묻다니. 
자혜롭지만 전쟁을 좋아한다.
똑똑하지만 정직하지 못하다.
둘은 다를 바가 없다. 
50보 달아난 놈을 칭찬해서 뭐할까.
맹자가 왕에게 되물었다.
'애민이 전쟁터에 보내는 것인가?'
근본적인 이유는 측은지심이 없어서다. 
그러니 왕을 백성이 못믿는다.
시혜를 베푼들 효과가 없다. 
자비로운 정책도 효과가 없다.
공감을 가진 지도자가 필요하다.
공감을 잃지 않으면 된다.


<돌위에도 꽃은 피더라.>

유가에서는 '入世'라고 한다.
생명의 공동체.
규칙과 권력을 받아들이지 말라. 
불의라면 변화시켜야 한다. 
사람에게 애통하지 않으면 대체 누구를 위해 애통해 할까. 
춘추전국시대나 지금이나 최악의 시대다.
따지고 보면 태평한 세월은 없었다.
배불러서 평안한가?
옆동네만 가면 테러다.
전염병은 여전하다.
한쪽은 온난화로 섬이 가라앉았다.
인구폭발은 한반도도 예외는 아니다.
모든 것은 연결돼있다. 

지구위에서 산다는 것은 상호 의존적인 존재다. 
물론 함께라면 가능하다. 
독자적으로 하면 승자와 패자가 생긴다. 
독단은 모두가 죽는 것.
공감은 모두가 사는 것이다. 
웃어라 같이 웃을 것이다. 
울어라 혼자 울게 될 것이다.
공자와 맹자는 인간의 '공감'을 끝내 믿었다. 

웃어라,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만 울게 되리라.        

낡고 슬픈 이 땅에선 환희는 빌려야만 하고, 
고통은 그 자체만으로도 가득하니까.        

노래하라, 언덕들이 응답하리라.        
탄식하라, 허공에 흩어지고 말리라.        

메아리들은 즐거운 소리에 춤을 추지만, 
너의 근심은 외면하리라.        

기뻐하라, 사람들이 너를 찾으리라.        
슬퍼하라, 그들은 너를 떠날 것이다.        

사람들은 너의 즐거움을 원하지만, 
너의 고통은 필요로 하지 않는다.        

즐거워하라, 그러면 친구들이 늘어날 것이다.        
슬퍼하라, 그러면 그들을 다 잃고 말 것이다.        

네가 주는 달콤한 술은 아무도 거절하지 않지만, 
인생을 한탄할 때는 너 홀로 술을 마시게 될 것이다.        
 
축제를 열라, 그럼 너의 집은 사람들로 넘쳐나리라.        
굶주리라, 세상이 너를 외면할 것이다.        

성공하여 베풀라, 그것이 너의 삶을 도와주리라.        
하지만 아무도 죽음은 막지 못한다.        

즐거움의 방들엔 여유가 있어 길고 화려한 행렬을 들일 수 있다.        
하지만 좁은 고통의 통로를 지날 때는        
우리 모두는 한 줄로 지나갈 수밖에 없다.

-엘라 휠러 윌콕스 '고독'



........................................................................


(예술과 인문학의 만남)④②이기적인 사람

사람은 이기적이어야 한다.
그래야 이익이다.
이기심은 사회도 풍족하게 만든다.
각 개인은 자신의 이익을 좇으며 살아야 한다.
개개인이 밝게 빛나면 전체는 더 화려해진다. 


<그림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그림을 보라. 
이는 점으로 그려진 것이다. 
붓이 아니다. 
유난히 밝다.
색깔을 섞지 않았다. 
한점 한점 찍어서 표현한 그림이다. 
색은 섞이지 않으면 본연의 빛을 낸다.
탁하지 않다.
본래의 색을 뚜렷히 보여준다.
그래서 유난히 환하다.
점들은 모두 하나의 그림을 위해 존재한다.
개개의 색과 목소리를 내면 전체도 아름다워진다. 

아담 스미스.
인간은 이기적인 행동으로 이익을 좇는다고 했다.
그런 작동원리가 시장이며 이는 국가의 부를 증가시킨다고 말한다.
물론 개인적인 이익이 사기나 협잡, 카르텔, 담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경제학은 뿌리가 도덕이다. 
물질적인 이익을 위한 이기심이다.
탐욕과 사람을 해하려는 이기심과는 거리가 멀다.
시장은 선의 이기심을 보장한다.
법은 악의 이기심을 막는다.
법과 정부는 악의 이기심 편을 들어서 문제다.


<도덕철학자 아담 스미스. 철학과 역사였던 경제학.
이후 알프레드 마셜에서 부터
수학이 됐다. 마셜은 케인즈의 스승.>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랑에 눈이 먼 사람.
어린 아이나 어른이나 마찬가지다. 
사랑에 빠지면 답이 없다.
사랑은 이기적이어야 한다.
이익이 없으면 사랑이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사랑을 얻고 누군가는 얻지 못한다.
왜 그럴까?
우리는 오해하고 있다. 
사랑은 '좋아하는 것을 해주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이다.
좋아하는 것을 들이대는 것.
괴롭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매너로써 해준다. 
사랑하지 않으면 상대가 싫어하는 것을 하게 된다. 
사랑하면 상대가 싫어하는 것을 안하게 된다. 
좋아하는 것을 해주는 것은 환심을 사는 것.
싫어하는 것을 안하는 것은 사랑을 얻기 위한 이기심이다. 


<새가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 
가둬놓고 들었더니 죽더라.
새를 사랑했던 사람. 새는 갇히는게 싫었던 것이다.
싫어하는 것을 안하는게 사랑. '장자'>


시리아 알레포 참사 현장.
박애주의와 인류애를 생각한다.
연민만 베풀고 노력을 안한다면 무슨 가치가 있을까.
몇푼 쥐어주고 스테이크를 써는 것은 박애가 아니다.
인간은 이기적이어야 한다.
직접 돕고 구호하는 것이 이기적인 것이다. 
박애를 위한 이기심.


<사랑도 이기심이 발동한다.>

사랑은 혈연관계에 기초해서는 안된다.
하늘의 뜻인 것 처럼.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만물을 두루 적신다.
평등하고 전반적이다. 
태양의 빛도 마찬가지다.
누가 뭐라해도 이기적으로 비춘다.
우리 삶도 그래야 이익이다.

장님과 앉은뱅이.
하루를 보내는 앉은뱅이는 장님을 본다.
동병상련을 느낀다. 
장님에게 이기심이 발동한다.
나는 앞을 보고 자네는 걷는다.
서로 돕자.
발이 되고 눈이 된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빠르게 이동한다.
장님이 앉은뱅이를 업은 것이다.
서로를 도우면 모두가 이익이다.
서로를 사랑하며 이익을 준다.
모두가 이기적이면 삶이 풍족해진다. 
물론 '환자의 죽을 뺏어 먹는 동냥아치'는 이들을 괴롭힌다. 
그것은 이기심이 아니다.
동냥아치질이다.


<이기심이 사람을 움직인다. 물질을 위한 이기심. 정신을 위한
이기심. 자기만족을 위한 이기심. 사랑을 위한 이기심. 사랑에
빠지면 이기적으로 변한다. 댓가를 바라지 않는 이기심. 연인
말고도 타인에 대해 이기심이 발동한다.>


사람은 이기적이어야 한다.
그래야 사랑도 한다.
립서비스는 이기적이 아니다.
그냥 '농'을 던지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을 할때나 누군가를 도울 때 물질적인 것을 줘야 한다.
이기적으로.

어떻게 하면 모두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인가.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면 안된다.
그 이기심은 너무 옹졸하다.
더 큰 이기심은 더 많은 부를 가져다 준다.

박애.
그 안에도 이기심이 작동한다.
무마자라는 사람은 묵자에게 묻는다.
"난 세상을 사랑하지 않아도 전혀 해를 끼치지 않는다. 누구나 사람을 사랑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묵자는 답한다.
"누군가 화재현장을 지나간다고 하자. 한명은 마시려는 물을 화재현장에 뿌렸다. 다른 사람은 어차피 못끄니까 그냥 지나친다. 차라리 땔감을 던진다. 무엇이 옳은가?"
무마자는 "당연히 물 뿌리는 사람이 옳지"
묵자는 말한다.
"난 물을 붓고 당신은 땔감을 던지는 사람이다"
나만의 이기심과 세상에 대한 이기심.
합쳐지기 힘들다.
하지만 내 이익과 전체의 이익이 연결됐다고 생각한다면?
개인의 이기심과 사회의 이기심은 같은 뿌리라는 것을 알게된다.


<만화로 보는 철학>

무마자는 다시 묻는다.
"아무도 안보는데 굳이 착한 일을 왜 하는가? 미친 것 아닌가?"
묵자가 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두명의 종업원이 있다.
한명은 주인이 있을때만 일한다.
나머지 한명은 알아서 성실하게 일한다.
당신이 주인이라면 누구를 뽑을까.
무마자는 "당연히 성실한 사람"이라고 답한다.
묵자는 "내가 바로 그 종업원이다"라고 말한다.
무엇이 더 현실에 가까울까?
누가 더 해괴할까?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면 불을 지나친다.
자기집이라면 다르다.
내가 종업원이라면 다르게 생각한다.
하지만 고용주 입장이라면 상황이 달라진다. 
이도 마찬가지로 이기심을 어떻게 보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나는 어떤 물감으로 물들었을까. 그대는 어떤 색깔로.
세상은 어떻게 물들고 있을까. 어떤 색깔을 넣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글쓰기도 그렇다. 글은 물들이는 작업이다. 
세상 사람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투쟁이 바로 '글쓰기'다.
글쓰기는 정치적인 행위다. 이기심으로 쓴다. 
물들이는 작업.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모든 글은 '헤게모니' 쟁탈전
이다.>


세상에는 전쟁이 넘쳐난다.
전쟁이 약처방이 될까?
대부분 죽는다.
전쟁으로 전세계에서 절반만 살아남아 부유해진다고 하자.
그럼 의사 처방으로 260여 사람 중 4명만 살아남은 것 아닌가.
이게 좋은 약일까.
이기심도 승자가 아닌 패자의 입장에서 봐야 한다.
이기심은 힘이 세다. 
물감으로 물드는 천처럼.
색깔이 달라지면 천 색깔도 달라진다. 
사회와 나라도 마찬가지다.

이기심으로 물들여야 한다.
물감처럼 내가 먼저 시작하면 세상도 물든다.
좋은 물들임.
나쁜 물들임.
세상은 양쪽의 물들임 싸움이다. 


............................

(예술과 인문학의 만남)④①싸움의 기술
 
싸움은 어떻게 하면 이길까?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자신을 알아야 한다.
상대를 알아야 한다.
지식이 있어야 한다.
기술과 지혜, 경험이 필요하다.
많이 맞아본 사람이 이긴다.
알지 못하면 이기지 못한다.
제갈량은 싸우지도 않고 이긴다.
이미 훤히 들여다 보고 있기 때문이다.
싸움의 기술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다.
그것은 '앎'에서 시작된다.


<권투를 배우면 상대의 움직임이 보인다. 권투를 모르면
주먹질이 얼마나 느리고 허공만 가르는지 보인다.
그런 주먹을 휘두르는 사람은 겁을 먹었다는 뜻이다.
그럼 이미 진거다.>


기원전 771년.
사대폭군 주나라의 유왕이 죽었다.
유왕의 죽음과 함께 주나라 왕실은 무너진다.
낡은 왕국의 시체 위에 춘추전국시대라는 난세가 시작된다.

전쟁은 기존의 가치를 붕괴한다.
약자가 짓밟히는 세상.
전국시대에는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다
심지어 짐승이 사람을 잡아먹게 하는 야만이 벌어진다.
혼란과 폭력.
기존 이념과 가치가 사라졌다. 
새로운 생각의 밑거름이 된다.

절망을 이기는 싸움.
의로운 싸움이다.
의롭지 않은 싸움은 깡패다.
기원전 440년..
초나라에 한 초라한 사람이 찾아온다.
초나라는 '운제'라는 살상무기로 작은 송나라를 공격할 예정이다.
묵자.
송나라와 무관한 사람이다.
벼슬도 아니다.
왜 목숨을 걸고 초나라 왕을 만날까?
혼자서 막을 수 있을까.
묵자는 혼자서 수천군사를 막았다.
정의없는 세상에 분노.
정의로운 싸움.

중국설화에는 이런 얘기가 있다.
초나라 남쪽에 '교'라는 민족이 있었다.
기괴한 풍습이 있다.
첫째아이가 태어나면 잡아먹는다.
맛이 좋으면 임금에게 바친다.
그러면 상을 받는다.
야만인.
묵자는 말한다.
초나라 중국의 풍습도 마찬가지다.
전쟁터에서 아비를 죽이고 아들에게 상을 주면 그것과 같지 않느냐.
초나라는 야만인가?
우리는 야만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아닌가?


<묵자는 평생 가죽옷 한벌만 입고 살았다. 도울때는 댓가를
바라지 않았다. 나올때는 미련없이 나갔다.>


춘추전국의 전환점. 
춘추가 막 내리고 전국시대가 시작된다.
춘추는 평온했다.
전국시대에는 죽음이 일상화된다.
포로는 벼랑에서 밀어죽인다. 
식량 때문이다.
직접 잡아먹지 않을 뿐이지 사실상 잡아먹었다.
묵자는 이에 분노한 것이다. 
정의로운 싸움을 벌인다.
그리고 이긴다.
싸우지도 않고.

어떤 풀이 시들지 않으리오
어느 날에 행군이 끝나리오
어느 누가 부역을 피하리오
사방에 전쟁이오 부역이라오
어떤 풀이 마르지 않으리오
어느 누가 홀아비가 아니리오
슬프다 나는 군인이 되어
어찌 악한 백성이 되었는가.

-'시경' '소아'의 하초불황


평화의 전사. 
묵자와 제자들.
'묵'이라는 한자는 '경면'이라고 한다.
얼굴에 천민이라고 새긴 데서 비롯됐다.
묵자와 제자들은 천민이나 형을 받은 죄인이라는 설이 있다.

또 '묵'자는 목수의 먹줄을 의미한다.
뛰어난 목수들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건축으로 유명한 먹줄 전문가. 
그들은 공성무기에 정통한 사람들.
목수와 직공들.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 중심이 돼 약자의 편에 서서 전쟁터에 참가한다.
묵자는 그래서 혼자 초나라로 갔다.

초나라 왕은 비웃었다.
중국의 공수반 이라는 사람.
그는 대량 살상무기 '운제'를 만든 사람이다. 만듦
중국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불렸다.

공수반은 묵자와 같은 동네 사람이다.
산동성 등주시 근교.
목수의 신이라고 불릴 정도다.
운제는 돌격대가 사다리 타고 올라가는 기계다.
성벽을 넘어 성을 친다.
일종의 트럭에 크레인을 올린 것.

 
<'전쟁'의 반대말은 '예술'이다.>

초나라 왕은 묵자와 공수반을 싸움 붙인다.
인류 최초의 시물레이션 전쟁 '워게임'이다.
공수반은 사다리를 이용해 공격할 것이라고 말했다.
'비아부' 전략.
'부'는 개미라는 뜻이다.
개미처럼 떼로 성벽을 오른다. 
병사가 도망치면 성벽 아래서 목을 베어 버린다. 
개미처럼 성벽을 탄다.

묵자는 말한다.
"병사들이 성벽을 기어오른다는 것은 장수가 성이 나서다"
높은 위치에서 불과 끓는 물을 붓는다.
'뢰'라는 무기.
원반에 가시가 달려있는 철퇴.
기어오르는 병사들의 머리위로 내려친다.

공격실패.
운제로 두번째 공격을 하는 공수반.
운제는 19세기까지 사용됐을 정도로 정교하다.
이동도 편리하다.
하늘의 구름까지 닫는다는 뜻의 운제.
운제는 불화살을 여러발을 쏘면 막을 수 있다
불과 재를 던져 더불어 공격하면 타버린다.

공수반의 3번째 공격.
땅꿀.
멀리서 굴을 파 성안으로 침투한다.
목적은 난동을 일으키거나 불을 지르는 것.
묵자는 답한다.
성안에 5걸음마다 우물을 파고 항아리에 사람이 들어간다.
소리를 듣는다.
소가죽을 씌어놓은 항아리 .
땅을 파는 고체파동은 기체보다 크다.
옹청이라는 이 기술로 적들이 땅파는 방향을 알수 있다. 
거리도 어림짐작이 가능하다.


<묵수. 혹은 묵적지수. 묵자의 이름이 '적'이었다.
묵자의 정신.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지켜나간다.>


그런 후 반대방향에서 적들을 향해 파들어간다.
충돌지점에서 아궁이를 만들어 급히 풀무질을 해 연기를 뿜는다. 
독한연기로 숨을 못쉬게 한다. 
독가스다.
묵자는 공수반을 능가하는 기술자이자 과학자다.
과학적 지식은 놀라웠다.
묵자는 사진기에 대한 기록도 남겼다. 
빛의 직진원리.
핀홀 효과 실험.
어두운 방.
그리고 작은 구멍.
핀홀효과를 기록에 남겨 사진기술의 기원이 된다.
지렛대와 도르레의 원리.
기원전 440년 묵자가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아르키메데스 지렛대보다 300년 먼저 나왔다.

'묵격'의 과학이론을 본 영국의 조지프 니덤이라는 사람.
묵자 과학사상을 보고 놀랐다. 
과학사상으로 풍부한 사람이었다.


<중국의 4대 발명품. 조지프 니덤이라는 영국 학자가
발견하고 정의했다.>


이후 공수반은 9번 공격을 했지만 한번도 못이겼다.
공수반은 "난 당신을 물리칠 방법을 안다. 근데 말하지 않겠다"
묵자는 초나라 왕에게 말한다.
"공수반의 마지막 방법은 날 죽이는 것이다"

이어 "나의 제자 금활리가 제자 300명을 거느리고 송나라 성문에서 대기중이다. 그러니 절대 이기지 못한다"

초나라 왕은 포기한다.
결국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묵자와 제자들은 약자를 위해서는 어디든가리지 않고 달려갔다. 
댓가도 요구하지 않았다. 
'마정방종'
종아리 털이 다 빠지고 허벅지 살이 없을 정도로 약자를 돕는다는 말이다.
묵자와 제자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상해도 세상 사람들을 도우러 다녔다.

변함없이 세상 사람들을 위해.
;겸상애 교상리'
이를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묵자는 "아무리 내가 상해도 여전히 돕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오류가 있다.
방어기술이 향상되면 공격기술도 발전한다.
언젠가는 전쟁이 터진다.
좀 더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했다.
묵자는 사상을 발전시킨다.
겸애.
세상의 모든 이를 사랑하라.
위대한 사랑이자 순수한 사랑.
배울 만한 사랑.
예수의 사랑.


<영화 '콘택트'. 조디 포스터. 영화 마지막 아버지는 딸에게
'인간은 좋음과 나쁨을 가진 모호한 존재'라고 말한다.
마음이 보이지 않으면 없는 것일까. 마음이 닿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일까. 사람의 마음. 사랑의 마음. 형제애의 마음.>


하지만 모순이 생긴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내 부모가 소중하지만 남의 부모도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을까.
내 자식처럼 남의 자식을 대할 수 있을까?
가족간의 사랑을 이웃집 사람들에게도 전할 수 있을까?
근본적인 모순이 발생한다.
공자는 가족의 사랑.
묵자는 인류의 사랑.
둘다 맞은 듯 틀린다.
둘다 틀린 듯 맞게 된다.

우리는 어디까지 가족이라 생각하고 어디까지 인류애를 대해야 할까?
어려운 문제다.

겸상애.
묵자에서 예수로.
예수에서 체 게바라로 이어진다. 
가족에 대한 사랑은 가능하다.
하지만 동족에 대한 사랑은 어떤가.
가능할 것이라고 믿는가?
답은 명확하다.
단지 찾지 못했을 뿐.

고로 인간은 '모호'한 동물이다.
  • 박민호

삶과 철학 그리고 피아노

  • 뉴스카페
  • email
  • face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