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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준호

(한반도)2015년 한반도 5대 '결정적 장면'

[송년특집] 광복·분단 70주년, 미·중 힘겨루기 가열…남북관계는 위기 뒤 '저속운행'

2015-12-27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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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2차 대전 종전과 함께 해방을 맞은 한반도 앞에 놓인 현실은 남·북의 분단이었다. 2000년 처음 만난 남·북의 정상들은 6·15공동선언을 통해 분단 극복 의지를 천명했다. 그러나 분단 70년이 된 2015년의 남과 북은 미·중 갈등의 풍파 속에 15년 전의 약속을 잊고 있다. 통일대박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남·북의 원심력만 커졌다. 광복 70주년 한반도의 좌표를 알려준 다섯 가지 장면들이다. 
 
#1. 미·일 방위협력지침 개정
 
미·일 방위협력지침 개정은 동북아와 한반도의 오늘을 이해하는 데 열쇠가 되는 ‘사건’이다. 4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미국 방문 당시 이뤄진 것으로, 일본 자위대가 세계 어디에서나 미군과 함께 전투를 할 수 있도록 군사협력을 크게 확대하는 내용이다. 이를 통해 두 나라는 군사적으로 사실상 한 몸이 됐고, 미국은 중국의 군사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일본에 아웃소싱 하는 체제를 만들었다.
 
김준형 한동대 교수는 “미국이 2010년부터 적극 추진한 아시아재균형 전략(중국견제 전략)과 일본 우파 정부의 재무장 시도가 수렴된 것”이라며 “미국은 원래 한·미·일 3각 군사협력 체제를 구축해 중국을 견제하고자 했지만 한·일 관계 악화 상황이 길어지면서 방위협력지침 개정을 통해 우선 미·일 군사동맹을 강화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이후 미국은 한국을 압박해 일본에 대한 태도를 바꾸도록 하면서 3각 군사협력에 들어올 것을 재촉하고 있다”고 말했다. 올 하반기부터 한·일 군사교류가 활발해지고 11월 박근혜 정부 들어 처음으로 한·일 정상회담이 열리게 된 데에는 미국의 뜻이 있었다는 얘기다.
 
미국을 등에 업은 일본은 거침없었다. 나카타니 겐 일본 방위상은 10월 한·일 국방장관회담에서 “한국의 지배가 유효한 범위는 휴전선의 남쪽"이라고 말했다. 유사시 자위대가 북한에 들어갈 경우 한국의 동의가 필요 없다는 뜻이다. 최근에는 자위대의 한반도 진출 요건을 논의하기 위한 한·미·일 3국의 실무협의가 비밀리에 몇 차례 열렸다는 보도도 나왔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 4월 미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열린 국빈 방문 환영식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뉴시스
 
#2. 미·중 사이 ‘갈팡질팡’ 한국 외교
 
한국이 한·미·일 3각 협력에 선뜻 발을 담그지 못하는 것은 일본 때문만은 아니다. 중국과의 경제적 관계가 깊어진 상황에서 중국에 대항하는 연대에 참여하기가 매우 곤란하다는 것이 더 큰 이유다. 안보는 미국과, 경제는 중국과 손잡으면 된다는 ‘안미경중론’이 나오기도 했지만 현실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안보와 경제 두 의미가 뒤섞인 여러 사안에서 한국은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느냐 마느냐를 결정해야 했다.
 
중국 주도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가입, 미국 주도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참여,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전승절 행사 참석, 미·중 남중국해 갈등,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한국 배치 문제 등 고민스러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3월 “미·중 양측으로부터 러브콜을 받는 상황은 축복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9월 중국 전승절 열병식과 10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박 대통령이 보인 모습은 과연 한국이 축복받은 나라인지를 되묻게 했다.
 
박 대통령이 열병식을 내려다본 베이징의 천안문 성루는 1954년 김일성과 마오쩌둥이 함께 열병식을 보며 북·중 혈맹을 과시했던 장소이다. 그로부터 61년이 지난 2015년, 북한의 지도자가 아닌 남한의 대통령이 중국 주석과 함께 그 자리에 선 것은 한국 외교의 새 지평을 여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다음 달 미국에 간 박 대통령은 이른바 ‘중국경사론’을 뿌리 뽑겠다는 듯 미국 쪽으로 심하게 치우치는 말들을 쏟아냄으로써 한국을 미·중 양쪽에서 갈팡질팡하는 존재로 만들어버렸다.
 
박근혜 대통령이 9월 3일 중국 베이징 천안문에서 열린 전승절 기념행사에 참석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등과 함께 자금성 망루에 올라 박수를 보내고 있다. 사진/뉴시스
 
#3. 비무장지대 위기와 8·25합의
 
미·중의 각축이 심해지면 한반도 문제는 꼬인다. 북한 핵문제 해결이 요원해지는 것이 대표적이다. 미국이 중국 견제를 위해 북한의 위협을 내세우는 데 있어 북핵만큼 ‘유용한’ 명분은 없다. 그 때문에 미국이 북핵 해결에 적극 나서지 않고 중국의 대북 영향력도 제한적이라면, 남은 것은 한국뿐이다. 한국이 북한과의 대화를 통해 북핵 해결의 실마리를 잡고, 남·북 사이의 문제도 풀어야 한다.
 
그러나 정부는 상황을 주도해 보겠다는 의지를 올해도 보이지 않았다. 미·중의 눈치를 보면서 북한이 조성해 놓은 국면에 대한 단기적 대응에만 힘썼다. 긴 호흡의 기조는 없고 대증요법만 있다 보니 남·북 관계는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금방이라도 남·북 정상회담이 열릴 것 같은 1월과 한·미 군사훈련으로 경색되는 3~4월의 사이클이 되풀이됐다. 4월 5·24조치 이후 첫 대북 비료지원 승인, 5월 교류확대 선언, 6월 6·15공동행사 무산과 북한인권서울사무소 개소, 8월 이희호 여사 방북 등 일정한 흐름 없는 상황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8월4일 북한이 매설한 지뢰로 남측 장병 2명이 크게 다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정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날 고위급회담을 제의하는 대북 전통문을 보냈다가 10일이 돼서야 지뢰사건을 발표하고 대북 확성기방송을 11년 만에 재개하는 등 강경기조로 돌아섰다. 이에 북한은 서부전선에서 포격 도발을 감행했고, 준전시상태를 선포했다. 이같은 일촉즉발의 군사적 긴장은 8월25일 남·북 고위당국자 접촉이 극적으로 타결되면서 해소됐다.
 
비무장지대(DMZ)에서 8월 4일 지뢰 폭발사고가 발생해 군 수색대원 2명이 중상을 입었다. 사진은 합동참모본부가 공개한 영상의 한 장면으로 지뢰 폭발 뒤 연기와 흙먼지가 솟구치는 모습이다. 사진/뉴시스
 
 
#4. 남·북 이산가족 상봉과 당국회담
 
8·25 고위당국자 접촉에서는 대북 확성기방송 중단과 준전시상태 해제 외에 이산가족 상봉, 당국회담 개최, 민간교류 활성화 등에도 합의했다. 그러면서 하반기 ‘약한 대화국면’이 펼쳐졌다. 박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직접 나서서 합의 이행을 강조했지만, 남·북 어느 쪽도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는 적극성을 보이지는 않았다.
 
약속대로 남·북은 10월 금강산에서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진행했다. 그러나 북측은 남측의 당국회담 제의를 거듭 외면하다가 11월 말이 되어서야 호응해 나왔다. 그에 따라 12월11~12일 개성공단에서 제1차 차관급 당국회담이 열렸지만 남측은 이산가족 문제 해결, 북측은 금강산관광 재개 등 각자 중시하는 의제만 꺼내놓고 씨름하다가 다음 회담 일정조차 잡지 못하고 돌아섰다. 남·북은 회담 결렬의 책임을 서로에게 떠넘기는 말싸움을 벌였다. 박근혜 정부가 대북정책을 획기적으로 전환하지 않는다면 남은 임기 2년 동안의 남·북 관계 역시 달라지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남·북 관계가 지체와 서행을 반복하는 가운데 개성공단은 근근이 버텼다. 상반기 개성공단의 위기를 불러왔던 최저임금 문제는 8월 ‘최저임금 5% 인상’이라는 기존의 규정을 지키는 쪽으로 최종 타결되어 반년 가까이 이어진 줄다리기를 끝냈다. 11~12월에는 올해부터 처음으로 부과되는 토지사용료 협상이 진행되어 입주기업이 생산활동을 하는 토지만을 대상으로 1㎡에 연 0.64달러씩 매기기로 합의했다. 개성공단의 두 쟁점은 모두 남·북이 한걸음씩 양보하면서 해결됐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10월 20~26일 금강산에서 열렸다. 상봉행사 중 북측의 리흥종씨가 남측의 가족들에게 들려줄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다. 사진/뉴시스
 
#5. 북·중 관계 ‘뉴 노멀’ 정착 진통
 
중국의 시진핑은 2013년 국가주석에 취임한 이후 북·중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려는 시도를 본격화했다. 2015년은 시 주석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북·중의 ‘새로운 정상상태’(뉴 노멀)가 어느 정도 자리 잡은 해로 기록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핵실험을 해도 중국이 결국 끌어안는 것이 과거의 정상상태였다면, 약소국 북한이 핵실험을 감행해 강대국 중국의 이익이 침해된다면 그 약소국에 응분의 대가를 치르도록 하겠다는 것이 새로운 정상상태다.
 
2년가량 그 원칙을 견지해온 중국은 올 들어 대북 유화정책을 일부 가미했다. 시 주석이 7월 동북3성 지역을 방문하며 북한에 유화메시지를 보낸 일, 북한이 10월 노동당 창건 70주년을 기념하는 장거리로켓 발사 움직임을 보이자 물밑협상을 통해 만류하면서 중국 공산당 서열 5위 류윈산 상무위원을 당 창건 기념식에 보낸 일 등은 북한에 준 ‘당근’이었다.
 
하지만 김정은 제1위원장이 직접 챙기는 모란봉악단이 12월12일 베이징 공연을 몇 시간 앞두고 철수한 사태에 대한 중국 정부의 태도를 보면, ‘채찍’을 놓지 않겠다는 뜻을 읽을 수 있다. 중국은 북한에 양보하거나 북한을 애써 달래지 않았다. 반면 자리를 박차고 가버린 북한은 평양으로 돌아가서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이후 김 제1위원장이 모란봉악단 철수 사태를 사과하기 위해 각료급 특사를 베이징에 보냈다는 <니혼게이자이신문>의 보도가 나왔다. 북한 역시 중국이 추구하는 새로운 정상상태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는 조짐들이다. 
 
북한 모란봉악단 단원들이 중국 베이징에서 악기를 챙겨 이동하고 있다. 모란봉악단 철수 사건은 새로운 북·중 관계가 정립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진통이었다. 사진/로이터
 
 
황준호 기자 jhwang7419@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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