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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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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수의 한국철학사 36화)황진이: 위선적인 주희성리학 조선의 지배계층을 농락하다

당시 남성 중심 사회이던 조선 지배계급의 상층부 주요 인사들…황진이 미색·재능 앞에 무너지는 설화 양산

2024-01-08 06:00

조회수 : 2,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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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덕을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아웃사이더가 한 사람 있습니다. 남존여비(男尊女卑)의 편견과 차별이 극심했던 편협한 조선 시대에 여성으로 태어난 황진이(黃眞伊, 1506~1567)라는 인물이 그 주인공입니다. 황진이는 신분이 기생이었기 때문에,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공식 기록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많은 야사와 야담에는 적지 않은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황진이와 관련한 기록 가운데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로 꼽히는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許筠, 1569~1618) <성옹식소록(惺翁識小錄)>이 가장 신빙성이 있는 기록이라고 인정되고 있습니다. 허균의 아버지 허엽(許曄, 1517~1580)이 화담 서경덕의 제자였기 때문입니다. 허균의 문집인 《성소부부고(惺所覆?)》에 실려 있는 <성옹식소록(惺翁識小錄)>에서는 황진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진랑(眞娘, 황진이의 이름)은 개성 장님의 딸입니다. 성품이 얽매이지 않아서 남자 같았습니다. 거문고를 잘 탔고 노래를 잘했습니다. 일찍이 산수(山水)를 유람하면서 풍악(楓岳 금강산의 별칭)에서 태백산(太白山)과 지리산(知異山)을 지나 금성(錦城)에 오니, 고을 원이 절도사(節度使)와 함께 한창 잔치를 벌이는데, 풍악과 기생이 좌석에 가득하였습니다. 진랑은 해어진 옷에다 때 묻은 얼굴로 바로 그 좌석에 끼어 앉아, 태연스레 이를 잡으며 노래하고 거문고를 타되 조금도 부끄러운 기색이 없으니, 여러 기생이 기가 죽었습니다. 평생에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호]의 사람됨을 사모하였습니다. 반드시 거문고와 술을 가지고 화담의 농막[]에 가서 한껏 즐긴 다음에 떠나갔습니다. 매양 말하기를, “지족 선사(知足禪師) 30년을 면벽(面壁)하여 수양했으나 내가 그의 지조를 꺾었습니다. 오직 화담 선생은 여러 해를 가깝게 지냈지만 끝내 관계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성인입니다.” 하였습니다. 죽을 무렵에 집사람에게 부탁하기를, “출상(出喪)할 때에 제발 곡하지 말고 풍악을 잡혀서 인도하라.”고 하였습니다. 지금까지도 노래하는 자들이 그가 지은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 또한 특이한 인물이었습니다. 진랑이 일찍이 화담 선생에게 가서 아뢰기를, “송도(松都)에 삼절(三絶)이 있습니다.”하니 선생이, “무엇인가?”하자, “박연폭포와 선생과 소인(小人)입니다.”하니, 선생께서 웃었습니다. 이것이 비록 농담이기는 하나 또한 그럴듯한 말이었습니다.”
 
이 기록으로 인해서 개성(송도)에서 활동했던 화담 서경덕 선생과 황진이와 개성에 있는 박연폭포는송도(개성)삼절[松都三絶]”로 일컬어지게 되었습니다. 오늘까지도 서경덕 선생, 황진이, 박연폭포는송도 삼절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서경덕 황진이와 더불어 “송도삼절(松都三絶)”의 하나로 꼽히는 박연폭포 겸제 정선 그림. 사진=필자 제공
 
선조 때 과거에 급제하여 선조와 광해군 때 봉교(奉敎), 사간(司諫), 시강원보덕(侍講院輔德), 사도시정(司?寺正) 등의 고위직을 두루 역임한 이덕형(李德泂, 1566~1645)이 자신이 송도유수로 재임할 때 들었던 송도의 기이한 이야기들을 모아 1631년에 편찬한 설화집 《송도기이(松都記異)》에서는 황진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진이(眞伊)는 송도의 이름난 기생이다. 그 어머니 현금(玄琴)이 꽤 자색이 아름다웠다. 나이 18세에 병부교(兵部橋) 밑에서 빨래를 하는데 다리 위에 형용이 단아하고 의관이 화려한 사람 하나가 현금을 눈여겨보면서 혹은 웃기도 하고 혹은 가리키기도 하므로 현금도 마음이 움직였다. 그러다가 그 사람은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날이 이미 저녁 때가 되어 빨래하던 여자들이 모두 흩어지니, 그 사람이 갑자기 다리 위로 와서 기둥을 의지하고 길게 노래하는 것이었다. 노래가 끝나자 그는 물을 요구하므로 현금이 표주박에 물을 가득 떠서 주었다. 그 사람은 반쯤 마시더니 웃고 돌려주면서 말하기를, “너도 한 번 마셔 보아라.”했는데, 마시고 보니 술이었다. 현금은 놀라고 이상히 여겨 그와 함께 좋아해서 드디어 진이(眞伊)를 낳았다. 진이는 용모와 재주가 한때에 뛰어나고 노래도 절창(絶唱)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선녀(仙女)라고 불렀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황진이의 어머니 현금은 빨래터에서 만난 사내와 정을 통해서 황진이를 가진 뒤, 정혼한 관계에서 생긴 아기가 아니었으므로, 뱃속의 아이(황진이)를 지우기 위해, 당시의 독한 민간요법을 따르다가, 아이는 지우지 못하고, 자신만 실명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황진이가개성 장님의 딸이라는 기록이 허균의 글에 남았다는 것입니다.
 
장윤현 감독의 2007년 영화 '황진이'의 포스터. 배우 송혜교씨가 황진이 역을 맡았다.(사진=시네마서비스)
 
허균과 이덕형의 기록에서 공통점은, 황진이가 용모가 매우 뛰어났으며 노래가 절창(絶唱)이었다는 기록입니다.
 
황진이의 출생에 관하여는 황진사(黃進士)의 서녀(庶女)로 태어났다고도 하고, 맹인의 딸이었다고도 전하는데, 황진사의 서녀로 다룬 기록이 더 많지만, 기생의 신분이라는 점에서 맹인의 딸로 태어났다는 설도 유력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황진이가 기생이 된 동기는 15세경에 이웃 총각이 혼자 황진이를 연모하다 병으로 죽었는데 상여가 나가는 날, 황진이의 집 앞에 이르자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황진이가 옷 저고리를 하나 가지고 나와 관 위에 덮어주자 상여가 움직였습니다. 이런 일은 겪은 뒤, 황진이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연인이 되겠다고 결심하고 기생이 되었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용모가 출중하며 뛰어난 총명과 민감한 예술적 재능을 갖추어 그에 대한 일화가 많이 전하고 있습니다.
 
허균의 기록에 따르면, 황진이는 자주, “지족선사(知足禪師) 30년을 면벽(面壁)하여 수양했으나 내가 그의 지조를 꺾었습니다라고 자랑처럼 이야기 하고 다녔다는 것입니다. 이 일은 당시에생불(生佛)’, “살아있는 부처님이라고 칭송을 듣던 지족선사(知足禪師)가 있었는데, 그는 천마산에서 30년 동안 면벽수행(面壁修行, 벽을 바라보고 앉아 좌선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황진이가 비가 억수처럼 퍼붓던 날 그를 찾아가서 쫄딱 비에 젖은 옷차림으로 비를 피하기를 청하자, 지족선사가 그를 맞아 안으로 들여준 뒤, 그 다음날 파계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당시살아있는 부처님[생불(生佛)]”이라고 칭송을 받던 지족선사가 황진이의 미색과 교태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파계하였다는 이야기는, 당시에 매우 유명하게 해자 되었던 모양입니다. 이 이야기를 원형으로 삼아서만석희(曼碩?)’라는 불교 승려의 이중인격을 풍자하는 인형극이 송도 지방에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옵니다. ‘만석희(曼碩?)’는 연암 박지원이 지은 한문소설인 <광문자전(廣文者傳)>에도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황진이는 그야말로 시쳇말로팜므파탈이라는 이름에 걸맞을 정도로 매우 기이한 행적을 남긴 기생이었습니다. 그가 무너뜨린 사람은 지족선사에 그치지 않고, 당시 왕족, 도학자, 고명한 선비, 고관대작 등 당시 남성 중심 사회이던 조선의 지배계급의 상층부 주요 인사들을 모두 망라하고 있었습니다.
 
지족선사 다음으로 황진이가 무너뜨린 사람은 벽계수라는 별칭을 쓰는 왕족이었습니다. 당시 이미 황진이는 미모와 출중한 재능으로 명성이 자자했습니다. 그는 황진이의 소문을 듣고도 자신은 절대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고 했던 사람입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벽계수는 황진이를 유혹하기 위해, 자신이 잘 다루는 거문고를 황진이가 오가던 길가의 정자에 앉아서 들어 보라는듯이 연주하였다고 합니다. 황진이가 나타나자 벽계수는 황진이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거문고를 챙겨서 말을 타고 떠나갑니다. ‘밀땅을 시도한 것입니다. 그러자 황진이는 벽계수를 향해서 유명한청산리 벽계수야라는 자작 시조를 한 수 느린 곡조로 발사합니다. “청산리 벽계수(碧溪水, 푸른 계곡 사이의 물, 이 왕족의 별칭인벽계수를 중의법(重義法)으로 사용한 것임)~, 수이감(쉽게 앞으로 나아감)을 자랑마라, / 일도창해(一到蒼海, 한번 푸르른 바다에 도착하다)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 명월[明月, 밝은 달, 황진이의 기생 예명이 명월(明月). 이 또한 중의법(重義法)]이 만공산(滿空山, 빈산에 가득 차다)하니 쉬어간들 어떠하리~”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황진이의 시조의 느린 곡조가밀땅을 시도하며 돌아선 그의 뒤통수를 간질이자, 벽계수는 화들짝 놀라며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고 합니다. 결국밀땅을 시전하던 벽계수는 황진이가 느린 곡조로 발사한 창작 시조 한 수에 뒤통수 한방 맞고 보기 좋게 무너진 것입니다.
 
그러나 황진이가 벽계수에게 들려준 시조는 깊은 사회적 울림을 담고 있습니다. 이 시조는 조선 시대의 상류사회 인생들에 대해서, 잘나간다고 뻐기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모든 시대에 모든 지배 계층에게 같은 경고를 날리고 있는 시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배 계급에 대한 풍자와 비판정신을 읽을 수 있는 시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명성이 드높던 승려 지족선사와 고명한 왕족 벽계수에 이어서 황진이가 무너뜨린 사람은 당대 최고의 도학자로 손꼽히던 소세양(蘇世讓. 1486~1562)이었습니다, 부수찬 · 정언을 역임했고, 직제학 · 동부승지 · 왕자사부 등을 지냈고, 전라도관찰사로도 나갔다가 대제학을 역임한 익산 출신 당대의 대학자 소세양은 평소에여색에 빠지는 것은 남자가 아니다라고 호언장담하였습니다. 그는자신의 소신을 못 지키면 사람이 아니다라고도 호언장담하였습니다. 그랬던 그가, 황진이를 만나고 나서는나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황진이에게 매달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황진이가 이런 기행을 남긴 것은, 남성 중심의 세상,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과 편견이 뿌리 깊게 박혀 있던 조선 사회에 대한 통렬한 풍자와 대결 의식의 발로였다고 해석해야 될 것입니다.
 
황진이에 대한 이런 많은 설화들이 다 사실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이런 많은 설화들이 만들어진 배경에는, 당시의 조선 사회의 상층부를 구성하고 있던 벽계수로 대표되는 왕족, 도학자, 고승들 모두를 황진이라는 당시 최하층 계급에 속하는 기생의 발아래 고개를 숙이도록 만든 일화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런 설화가 만들어 지고 기록으로 남겨진 배경에는 조선시대의 경직된 남성 중심주의에 대한 강렬한 반감이 크게 작용을 했다고 봐야 될 것입니다.
 
허균의 기록에 따르면, 황진이가 죽은 뒤에 집안사람들이 그의 유언대로 풍악을 잡혀서 큰 길가에다 장례를 지냈었습니다. 그의 무덤은 몇 백 년 전까지도 송도 대로변에 있어서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7)는 평안도사(平安都事)로 부임하던 길에 일부러 제문(祭文)을 지어 가지고 그의 무덤까지 가서 제사를 지내 주었습니다. 그것이 조정에서 말썽거리가 되어 그 일로 좌천까지 된 일이 있었습니다.
황진이는 철저한 남성 중심 사회이던 조선에 큰 파문을 일으키고, 주희 성리학의 이중인격적인 도학의 위선이 지배하는 조선에 본질적인 문제 제기를 던지고 간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11년 11월 북한 당국이 개성시 선정리에서 복원한 황진이의 무덤과 비석.사진=필자 제공
 
조선 사회의 상층부를 이루고 있던 왕족, 승려, 도학자들은 황진이의 미색과 재능의 무너졌지만, 조선 주희 성리학자들에 의해서 이단으로 취급 받아온, 기철학자 서경덕만은 황진이가 무너뜨릴 수 없는 유일한 진정한 도학자였습니다. 황진이에 관한 많은 기록들은 황진이가평생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호)의 사람됨을 사모하였으며, 서경덕을 스승으로 섬기며, 그와 대화를 즐겼다고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허균의 기록에 따르면, “진랑이 일찍이 화담에게 가서 아뢰기를, ‘송도(松都)에 삼절(三絶)이 있습니다.’하니 선생이, ‘무엇인가?’하자, ‘박연폭포와 선생과 소인(小人)입니다.’하였다고 합니다.
 
조선에서 관념적이고 자기중심적인주리론(主理論)’ 철학인 주희 성리학이 주류로 형성되기 전에 자기의 사고에 의지해주기론(主氣論)’의 기철학을 확립한 매월당 김시습과 화담 서경덕이 잇따라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교의 통섭과 융합에 관심을 기울였던 이 땅의 풍류도의 전통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조선 주희 성리학자들에 의해서 이단 취급을 받아온, 기철학자 서경덕이, 황진이가 무너뜨릴 수 없었던 유일한 진정한 도학자로 등장하는 황진이 관련한 수많은 설화들은, 이 땅의 민중들이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주희성리학을 넘어설 것을 갈망해왔음을 보여주는 자료로 읽어낼 수 있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필자 소개 / 이상수 / 철학자·자유기고가
2003년 연세대학교 철학 박사(중국철학 전공), 1990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 2003~2006년 베이징 주재 중국특파원 역임, 2014~2018년 서울시교육청 대변인 역임, 2018~2019년에는 식품의약품안전처 대변인 역임. 지금은 중국과 한국 고전을 강독하고 강의하고 이 내용들을 글로 옮겨쓰는 일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 신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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