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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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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은행은 없다

은행이 메워주는 공공의 영역

2023-02-22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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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토마토 신유미 기자] 얼마 전 서울의 한 시중은행 무인점포에 취재차 방문했을 땝니다. 수십년 간 은행이 있던 자리였는데, 영업점이 사라지고 화상기기와 키오스크를 들여놨습니다. 오전 시간, ATM을 이용하기 위한 중년 고객들이 계속해서 들어왔습니다. 한 시간가량 지켜봤지만 아무도 화상기기와 키오스크는 사용하지 않더군요. 방문객들에게 화상기기 부스를 사용한 적이 있는지, 다른 사람이 사용하는 걸 본 적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한 명을 제외하곤 모두 '없다'고 답했습니다. 그조차도 사용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고령자들이 느끼는 감정은 불편함만이 아니었습니다. 한 명씩 바톤 터치를 하듯 기자를 둘러싸고 릴레이 성토회가 열렸습니다. 그들은 수십년 전, 이곳 은행이 처음 생겨날 당시를 떠올렸습니다. 이용해달라고 할 때는 언제고, 효율화를 내세우면서 하루아침에 점포를 없애버리니까 홀대받는 기분이 든다고 말했습니다. 심지어는 배신감마저 든다고도 했습니다. 은행은 업무를 보는 곳이기도 했지만,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한때 오랫동안 이곳 주민들의 업무를 맡았을 행원들과 직원들 역시 아쉬움이 컸을 거란 생각이 들더군요.
 
서울의 한 시중은행 무인점포. (사진=신유미 기자)
 
기술이 발전하면서 오프라인 점포를 줄이는 건 은행만의 일은 아닙니다. 코로나19로 오프라인 판매 감소세가 가속화된 대형마트는 다크스토어 전략을 펼치고 있습니다. 매장의 일부를 물류기지화 하는 거죠. 화장품 가게도 심심찮게 사라집니다. 외식 업체는 줄었지만 배달전문 업체가 늘기도 했고요. 하지만 이들 점포가 사라진다고 해서 고령자들의 접근 편의성이나 소외감 등이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대체재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이곳들은 단지 상품을 '판매'하기만 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들 점포와 은행 영업점을 다르게 바라보는 이유죠. 은행 영업점은 금융이라는 일종의 공공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수십년 간 한 자리를 지키며 주민들과 라포를 형성하기도 하고요.
 
미국의 인류학자 제임스 스콧은 도시의 작은 가게들이 공공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재미있는 통찰을 제시합니다. 이들 가게 경영자는 전형적인 '소유자'이지만, 동네에서 친목 커뮤니티를 형성하기도 하고, 주변의 변화를 예리하게 살피며 공공안전에 기여한다는 겁니다. 이들이 한 커뮤니티에서 오랫동안 장사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해당 지역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거죠. 이런 작은 가게의 경영자들이 수행하는 역할은 우리 삶을 부드럽게 만들어준다는 측면에서 가치가 있습니다. 공공기관이나 공무원이 완전히 채워줄 수 없는 무상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제임스 스콧은 가게 경영자들, 소상공인에 주목했지만, 공공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은행 점포가 수행하는 역할도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공공성을 지니면서 비슷한 예로 우체국 집배원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집배원들이 집집마다 살피면서 주민들이 안전한지, 필요한 도움은 없는지 알게모르게 작은 서비스를 제공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어려운 일이죠. 효율화를 이유로 인력을 줄이기도 했거니와 현대 도시에서는 맞지 않는 측면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종이통장을 고수하는 이들이 있듯, 사회 변화의 속도에 발맞추지 못하는, 이런 공공의 영역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라고 예외는 아닐 겁니다. 언젠간 저도 늙기 마련일테니까요.

한 시중은행 영업점에서 고령자가 대기표를 손에 들고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사진=신유미 기자)
 
정부는 공공성을 강조하며 은행과 금융권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금리에 개입하는 등 금융기관의 독립성을 저해하는 방향을 두고 공공성이라고 하긴 어렵습니다. 고령자들이나 장애인 등 디지털 취약계층의 금융 접근성을 두고 정부가 해야 할 역할은 없을까요? 지난해 금융위는 금융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은행과 우체국, 편의점 공동 점포나 시중은행 통합 창구와 같은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실효성도 없어보입니다. 정부가 강조해야 할 공공성은 차라리 초과이익을 환수하거나 금융취약계층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교육 지원을 은행과 함께하는 등의 제도적인 차원이 있겠지요.
 
코로나19를 거치면서 미국 자치주에서 화두로 떠오른 '공공은행' 논의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공공은행은 시민이나 주민 등을 대표해 지방자치단체가 소유하고 운영하는 금융기관을 말합니다. 지속가능한 미래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돈이 적시에 융통돼야 한다는 인식이 공유되면서 지속가능한 금융의 대안으로 떠올랐습니다. 특히 공공은행은 '관계형 금융'을 실현할 수 있는 모델이기도 한데요. 정량적인 정보뿐만 아니라 정성적 가능성을 토대로 금융 거래를 하는 방식입니다. 시중은행에게만 책임을 물을 게 아니라 정부와 공공기관, 공무원이 메우지 못하는 빈틈을 함께 고민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신유미 기자 yumix@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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