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최기철 기자]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처음으로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했다. 종교적 양심을 형법상 처벌 예외 사유인 정당한 사유에 해당한다고 본 것이다. 동일한 사유로 대법원에 계류 중인 상고심 사건 227건도 모두 같은 결론이 날 전망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1일 '병역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여호와의 증인 신도 오모씨에 대한 상고심 선고 공판에서 오씨에게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다시 심리하라며, 사건을 창원지법으로 되돌려 보냈다. 또 "양심적 병역거부가 정당한 사유’에 해당하는지에 관해, 종래 판례에 따라 유죄로 판단한 원심판결을 파기환송하고 종래 대법원 판례를 변경한다"고 밝혔다.
종교·양심적으로 병역을 거부해 기소된 여호와의 증인 신도 오승헌 씨가 1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병역법 위반 전원합의체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후 법정을 나서고 있다. 대법원은 종교·양심적 병역거부를 정당한 사유로 인정했다. 사진/뉴시스
대법관 13명 중 다수의견을 낸 김명수 대법원장 등 8명은 "법 위반자를 처벌할 수 없도록 정한 병역법상 '정당한 사유'는 구체적인 사안에서 법관이 개별적으로 판단해야 하는 불확정개념으로서, 실정법의 엄격한 적용으로 생길 수 있는 불합리한 결과를 막고 구체적 타당성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며 "정당한 사유가 있는지를 판단할 때에는 병역법의 목적과 기능, 병역의무 이행이 헌법을 비롯한 전체 법질서에서 가지는 위치, 사회적 현실과 시대적 상황의 변화 등은 물론 피고인이 처한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정도 고려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 "병역법은 국민 중 병역의무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해 합당한 의무를 부과해 과도한 부담이 되지 않도록 하고 있다"면서 "병역의무자가 처한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정이 병역 이행을 감당하지 못하도록 한다면 정당한 사유에 해당할 수 있고, 그 사정이 대다수의 다른 이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라고 강조했다.
재판부는 양심적 병역거부와 헌법상 양심의 자유의 관계에 대해 "개인 스스로 양심을 적극 표출한 것이 아니라, 국가가 양심에 반하는 작위의무를 부과한 것에 대해 단지 소극적으로 응하지 않은 것이라면, 국가가 그 사람에게 형사처벌 등으로 의무이행을 강제하는 것은 기본권에 과도한 제한이 되거나 기본권의 본질적 내용에 대한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헌법상 국방의 의무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병역의무를 이행하는 방법으로 정한 집총이나 군사훈련을 할 수 없다는 것이고, 그 이행이 자신의 인격적 존재가치를 스스로 파멸시키기 때문에 어떠한 제재라도 감수하고 있다"며 "이들에게 형사처벌로 집총과 군사훈련을 수반하는 병역의무의 이행을 강제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에 대한 과도한 제한이 본질적 내용에 대한 위협이 된다"고 판단했다.
또 "자유민주주의는 다수결 원칙에 따라 운영되지만 소수자에 대한 관용과 포용을 인정해야만 그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면서 "국민 다수의 동의를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존재를 국가가 언제까지나 외면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진정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라면 병역법 88조 1항의 '정당한 사유'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지난 6월 헌법재판소가 도입을 결정한 '대체복무제'와 관련해 "대체복무제는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했을 때 제기될 수 있는 병역의무의 형평성 문제를 해소하는 방안일 뿐"이라며 "현재 대체복무제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거나 향후 도입될 가능성이 있더라도, 병역 거부로 기소된 피고인에게 정당한 사유가 인정된다면 처벌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병역을 거부할 수 있는 '정당한 사유'로 볼 수 있는 구체적인 양심에 대해 "신념이 깊고, 확고하며 진실해야 한다"고 기준을 제시했다. 재판부는 "신념이 깊다는 것은 그 사람의 삶의 일부가 아닌 전부가 그 신념의 영향력 아래 있어하는 것이고, 확고하다는 것은 분명한 실체를 가진 것으로서 좀처럼 쉽게 바뀌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진실하다는 것은 상황에 따라 타협적이거나 전략적이지 않은 것으로 그 신념과 관련한 문제에서 상황에 따라 다른 행동을 한다면 그러한 신념은 진실하다고 보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다만, 이에 대한 판단은 법관의 재량이다. 따라서 종교적 양심을 이유로 병역을 거부했다가 기소당한 경우 형사처벌을 받을 가능성은 항시 존재한다. 이때 병역을 거부할 '정당한 사유'가 있다는 사실은 병역 거부자가 소명해야 한다. 재판부는 "적어도 검사가 이에 대한 반박으로 정당한 사유가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정도로 구체성을 갖춰야 한다"고 밝혔다.
이동원 대법관은 별개 의견으로 "국방의 의무는 개인의 양심의 자유보다 더 우선시되는 의무"라면서 "국가 안전보장에 우려가 없는 상황을 전제로 진정한 종교적 신념에 따라 병역을 거부하는 경우에만 정당한 사유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소영·조희대·박상옥·이기택 대법관 등 4명은 '종교적 양심'은 병역거부의 정당한 사유가 될 수 없다며 반대 의견을 냈다.
김 대법관 등은 "병역 거부에 대한 병역법상 정당한 사유는 특정한 입영기일에 입영하지 못한 것을 정당화 할 수 있는 당사자의 질병이나 재난 등 일반적이고 객관적인 사정에 한정되고, 개인적인 신념이나 가치관, 세계관 등과 같은 주관적 사정은 정당한 사유에 해당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 "양심적 병역거부가 비록 소극적 부작위이기는 하지만 역시 양심을 외부로 실현하는 행위"라며 "국가안전보장과 국방의 의무 실현을 위해 제한될 수 있고, 그 제한은 양심의 자유를 과도하게 제한하거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하는 것은 아니다"고 판단했다.
이들은 이어 "병역거부와 관련된 진정한 양심의 존재여부를 심사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다수의견이 제시한 사정들은 형사소송법이 추구하는 실체적 진실 발견에 부합하도록 충분하고 완전한 기준이 될 수 없다"면서 "세계 유일의 분단국인 우리나라의 엄중한 안보상황, 병역의무 형평성에 관한 강력한 사회적 요청 등을 감안하면, 양심적 병역거부는 인정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오씨는 2013년 7월, 경남지방병무청장으로부터 '육군 39사단 현역병 입영' 통지를 받고도 거부한 혐의(병역법 위반)로 기소됐다. 오씨는 수사기관과 법정 진술에서 종교적 양심을 이유로 입영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오씨는 1심에서 유죄 인정과 함께 징역 1년6월을 선고받자 항소했으나 기각당해 상고했다. 대법원은 지난 8월30일 이 사건에 대한 공개변론을 진행하기도 했다.
현행 병역법 88조 1항은 '현역입영 또는 소집 통지서(모집에 의한 입영 통지서를 포함한다)를 받은 사람이 정당한 사유 없이 입영일이나 소집일부터 일정 기간이 지나도 입영하지 않거나 소집에 응하지 않으면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최기철 기자 lawch@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