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최기철 기자]이진성 헌법재판소장이 27일 취임사에서 김종삼 시인의 <장편 2>라는 시를 다시 한 번 낭독하면서 작품과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 소장이 공식 석상에서 <장편 2> 전문을 낭독한 것은 이번이 두 번째고, 언급까지 포함하면 세 번째다.
<장편 2>는 1977년 '신현실사'에서 펴낸 김종삼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시인학교>에 실린 시다. 김 시인은 1951년 시 <돌각담>으로 등단했다.
<장편 2>는 총 자수가 95자 밖에 안 되는 짧은 시다. 권영민 서울대 명예교수는 “손바닥만큼(掌) 짧은 문학 작품을 이르는 ‘장편(掌篇)’이라는 장르명을 제목으로 차용해 거지 소녀가 전 재산을 털어 부모의 생일상을 마련해 주는 뭉클한 장면을 담았다”고 평가했다.
시는 일제 강점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옛날 얘기하듯 담담하게 전개된다. 거지소녀가 거지장님 어버이를 이끌고 와 밥집 앞에 서 있었다. 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 거지소녀는 태연했다. 이후 반전이 벌어진다.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 10전짜리 두 개를 보였다.” 거지소녀는 생일을 맞은 부모에게 따뜻한 밥 한 끼라도 대접하려 손님으로 방문한 것이다.
이 소장은 2012년 9월12일 헌법재판관 인사청문회 때 국회의원들 앞에서 이 시를 읽었다. 그리고 “흔히 사람을 출신이나 지위, 행색이나 장애 유무와 같은 겉모습으로 선입견을 가지고 속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 속의 소녀와 같이 사회의 밑바닥에서 고달픈 삶을 살지만 의연함을 잃지 않는 많은 국민이 계십니다. 저는 그들이 내미시는 손을 따뜻하게 잡고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헌법재판관이 되고자 다짐합니다”라고 말했다.
2012년 9월20일 헌법재판관 취임식에서, 이 소장은 <장편 2>를 낭독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저는 청문회 절차에서 김종삼 시인의 '장편 2'라는 시를 낭송했습니다. 그 시 속의 소녀처럼 우리 사회에는 고달픈 삶의 여정에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고 있는 많은 국민들이 계십니다. 저는 그들이 내미는 손을 따뜻하게 잡고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헌법재판관이 되고자 다짐합니다. 그리고 소수자와 다수자가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열과 성을 다하겠습니다”라고 강조했다.
이날 헌재 소장 취임식에서 이 소장은 <장편 2>를 다시 한 번 낭송했다. 그는 “헌법재판소의 주인은 고단한 삶이지만, 의연하게 살아가시는 우리 국민입니다. 우리는 헌법재판소의 관리자에 불과합니다. 우리에게는 이 기관을 맡겨주신 국민을, 이롭게 하여드릴 의무가 있습니다. 그 분들의 손을 따뜻하게 잡고, 눈물을 닦아드릴 의무가 있습니다”라고 당부했다.
권 교수의 설명대로 <장편 2>에 등장하는 거지소녀는 ‘가난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다하고 사는 고귀한 품격’을 드러내고 있다. 현실의 엄혹함을 볼 때, 거지소녀는 국민과 등치된다. 이 소장이 공식석상에서 <장편 2>를 애송하는 것은 국민에 대한 공직자로서의 각오를 다지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장면 2>를 취임사 등에 인용하는 공직자는 흔하지 않다. 법조 쪽에서는 김진태 전 검찰총장 정도가 있다. 김 총장도 공식석상은 아니지만 2015년 5월 간부회의에서 <장편 2>를 낭독했다.
당시 대검 관계자에 따르면, 김 총장은 시를 낭독한 뒤 “가슴이 찡하면서 한편으로는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가난은 죄악도 아니고 사회적 차별 대상은 더더욱 아니다”며 “주위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저렇듯 당당하고 의연하게 할 일을 다 하고 있는 소녀의 기개를 배웠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음은 시 전문
<장면 2>
- 김종삼
조선총독부가 있을 때
청계천변 10전 균일상(均一床) 밥집 문턱엔
거지소녀가 거지장님 어버이를
이끌고 와 서 있었다.
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
태연하였다.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
10전짜리 두 개를 보였다.
이진성 헌법재판소장이 27일 헌재 대강당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최기철 기자 lawch@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