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나볏기자] 연극 '환도열차'가 올해 다시 달린다. 지난 2014년 예술의전당에서 초연돼 '동아연극상 희곡상', '공연과 이론 작품상' 등을 휩쓸었던 이 작품은 1953년 피난민을 싣고 부산에서 출발한 서울행 열차가 60여년의 세월을 뚫고 현재의 서울에 당도했다는 판타지를 바탕으로 한 연극이다.
탑승객 중 유일하게 생존한 인물인 이지순은 90살이 되어버린 남편과 변화한 사회상을 보고 큰 충격에 빠진다. 이지순의 때늦은 당도에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다. 정부 관계자들은 이지순의 존재를 숨기기에 급급하고, 대기업 회장이 된 남편 한상해는 양아들 한동교의 힘을 빌어 지순을 다른 사람으로 둔갑시켜 함께 살 궁리를 한다. 미국에서 조사관으로 파견된 제이슨 양은 이 모든 상황을 제3자의 시각으로 묵묵히 바라본다.
오는 22일부터 4월17일까지 자유소극장에서 앙코르로 재공연되는 이번 작품을 위해 장우재 연출가는 배우들과 함께 연습실에서 구슬땀을 흘리는 중이다. 연습하는 모습을 슬쩍 엿보니 장우재 연출가와 윤상화 배우가 중심이 돼 장면별로 연기의 세세한 부분을 하나하나 잡아가고 있었다. 배우와 연출가 모두 재공연임에도 오히려 초연 때보다 신중하게 접근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한상철 역의 윤상화 배우는 "제이슨 양의 대사 중에 '우리 모두가 물 속으로 빠져가고 있다는 말씀입니까?'라는 말이 있는데 재작년에 이 공연 끝나고 며칠 있다 세월호 사건이 터져 정말 아주 소름끼치게 놀랐던 기억이 있다"면서 "'이상하구나, 연극이라는 것은. 그렇다면 이걸 다시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고 전했다. 이지순 역의 김정민 배우 역시 "아무래도 내용이 담고 있는 게 저희가 해야 할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게 있어서 조금 더 책임감이 있는 것 같다"며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을 다시 하게 된 것은 행운"이라고 설명했다.
과연 2016년 봄, '환도열차'는 어떤 의미로 대한민국 서울 관객에게 다가오게 될까. '환도열차'를 이끌고 있는 장우재 극작가 겸 연출가를 만나 좀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장우재 극작가 겸 연극연출가. 사진/예술의전당
-앙코르 공연을 2년 만에 한다. 관객들의 요청이 있었다고 하던데.
원래 초연을 하고 나서 반응이 좋아 그 다음 해에 하려고 예술의전당 측과 조율했었다. 그런데 일정이 안 맞는 바람에 이번에 하게 됐다.
-공연이 3시간에서 2시간 반으로 짧아진다고 들었다. 2014년 버전과 어떻게 달라지나.
사실은 초연할 때는 이것저것 꺼내놓기 바쁘다. 작연출을 같이 하다보니 작가 편을 들기도 하고 그런다. 좋은 평도 있긴 하지만 객관적으로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이게 무슨 의미인가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는데, 그런 게 굉장히 큰 숙제로 다가온다. 이런 생각을 사실 재공연 때 한다. 초연 후 관객이 바라보는 의미나 관객의 시선까지 한꺼번에 녹여서 만든다는 느낌이 있다. 언제나 재연할 때 이런 느낌이 있다. 전작인 '여기가 집이다', '미국 아버지' 둘 다 그랬다. 그래서 초연하고 재공연은 다르다.
초연 때 과거에서 온 여자가 현재를 보고 환멸을 느낀다는 게 주 정서였던 것 같다. 그런데 과거에서 온 '지순'이 뛰어넘은 시간이 우리나라의 근대 아닌가. 과거에서 현재로 와서 보니 성과 중심이고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것들에 대해 지순 입장에서는 경악할 수는 있다. 근데 과연 근대라는 시기가 단지 그렇게 나쁜 것만 있었느냐고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근대의 힘 때문에 잘 살게 된 것은 부정할 수 없으니까.
근대에는 이성 중심의 사유를 한다. 과학적 방법론이 들어오기도 했고. 그걸 추동력 삼아서 갔던 시대인데 대신 지나치게 이성 중심의 사유를 하는 데서 오는 폐해들이 있다. 낡은 것과 새로운 것, 문명과 야만, 이렇게 나눠버린다든가 서양의 것이 좀더 우월한 듯한 인상을 주는 식으로 한쪽에 쏠렸다. 조금은 과잉 이성 중심이었다고 볼 수 있다. 낡은 것 중에서도 꺼내볼 만한 게 있고 야만스럽다고 치부할 수 없는, 순수한 인간의 면모도 있는데 이런 것들이 사실은 누락된 거다.
연극 '환도열차' 초연 중 한 장면. 왼쪽부터 이지순 역(김정민 분), 한상철 역(윤상화 분), 한동교 역(안병식 분). 사진/예술의전당
이번에는 지순, 아니, 만드는 우리가 두루뭉술하게 볼 게 아니라 그런 것들을 정확하게 보자는 생각이다. 그냥 환멸을 느끼는 게 아니라 무엇이 성취되었고, 무엇이 그 과정 속에서 잃어버려졌는가 하는 것들을 조금 면밀히 볼 필요가 있겠다 싶었다. 과거의 것을 싸잡아서 묶어내는 방식보다는 얻은 것들과 탈락된 것, 변화된 것을 하나씩 하나씩 잘 정리를 해보려 하고 있다. 지금의 모토는 좀 정확하게 보자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감정을 과잉해 표현하기보다 정확하게 그 상황을 표현하는 쪽으로 정리가 되고 있다.
그리고 과거로 지순이 회귀하겠다는 설정에 대해 '제이슨 양'이 납득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나와서 지금은 지순이 '과거로 돌아가겠다'는 이야기를 하는 대신 '진짜 현실로 돌아가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대표적으로 제이슨 양의 캐릭터가 좀 바뀐 것 같다. 이전에는 제이슨 양이 (한국에는) '뭔가 있어'라는 식의 의심의 눈초리를 품었다면 지금 현재는 중립적으로 거리를 두고 이성적으로 사유하려고 하는 사람으로 나온다. 시작부터 극을 관통하게 되는 거다.
-예전 대본을 보면 첫 머리에 '정겹지만 쥐처럼 살 것인가, 위대하지만 제3자로 살 것인가'라는 메모가 적혀 있다. 이번 공연에서는 이 말을 좀더 분명히 표현하는 쪽으로 간다고 보면 될까.
글쎄. 그 질문에도 약간의 과잉이 있는 것 같다. 지금 굳이 질문을 꺼내자면 '60년을 어찌됐건 그렇게 살았는데 그것에 온몸을 다 적시고 있어야 그 삶의 진실이 보이는가, 아니면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 거리를 두고 바라볼 때 볼 수 있는 것인가' 라는 식으로 조금 바뀌었다.
-관객들이 제3자라 볼 수 있는 제이슨 양에 기대어 극을 바라보길 원하는지.
지순의 정서적 힘이 크기 때문에 관객은 아무래도 지순에 기대어 보게 되긴 할 거다. 그런데 그 속에서 제이슨 양이 끊임없이 환기를 할 것 같다. 예전에는 제이슨 양이 추궁하고 파고들었다고 한다면 지금은 환기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 같다.
2014년 연극 '환도열차' 초연 중 미국 조사관 제이슨 양(이주원 분)의 모습. 사진/예술의전당
-판타지적 요소가 큰 연극이지만 실제로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또 초연 직후에 세월호 사건이 터지기도 했다. '우리가 모두 물 속에 빠져가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같은 비유적인 대사는 마치 이후의 일을 예고하는 듯했는데. 기분이 어땠나.
나도 놀랐다. 근데 지금 현재 세월호 문제는 대단히 잘 다뤄야 한다. 잘 다룬다는 게… 정말 그것을 온전히 잘 담을 수 있는 그릇에 잘 담지 않으면 그 자체의 문제가 희석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까 말한 의미가 (공연에) 붙기도 했지만 그것들을 '옳다꾸나' 하고 잡고 싶지 않다. 오히려 원래 하려고 했던 이야기, '근대라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것을 정확하게 보자는 쪽으로 내가 살아내야 언젠가 그 문제도 오롯이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좀 기다리고 있다. 지금은 부화뇌동할 일이 아니다.
-상황에 따라 이름을 바꾸면서 살아가는 인물들을 즐겨 사용한다. 그런데 작가 본인도 본명이 따로 있고 지금 현재 예명을 쓰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또 한 때 영화 일을 하다가 다시 연극으로 돌아온 경력도 있다. 이름을 바꾼다는 것, 변신한다는 것이 본인의 작가 세계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해석이 그렇게 되는 것 같은데… 내가 아마도 그런 것을 보통 사람보다는 좀더 겪는 편일 거다. 의도적인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흘러가다 보니 그렇게 됐는데… 최근에 결정을 했다. 두 이름 사이에서 느끼는 어떤 약간의 혼돈을 내 몫의 삶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자고. 그래서 본명과 예명을 평생 같이 쓰며 사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불편한 것도 있지만 그런 쪽으로 정리가 됐다. 근데 배우들 보면 일이 잘 안풀리면 이름 바꾸는 경우가 있지 않나. 그런 걸 보면 나는 그게 많이 이해가 된다. 그래서 아마 그런 모티프들이 극에 자연스럽게 들어오긴 할 것 같다. 하지만 거기에 특별한 의미 부여를 하지는 않았다. 이름을 바꾼다는 게 드라마틱 하지 않나. 정체성의 혼란을 표현하기 위해 쉽게 가져올 수 있는 것이라 잘 등장하는 것 같다.
-캐릭터 중 SY전자 회장의 양아들인 '한동교'도 재공연에서 더욱 중요해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젊은 세대를 대변하는 '동교'라는 캐릭터를 다른 작품에서도 몇 번 썼는데 그 때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부정적인 인물이다.
'환도열차'의 동교는 연극 '여기가 집이다', '햇빛샤워'의 동교와는 많이 다른 인물이다. 동교라는 이름 자체가 갖고 있는, 미완의 어떤 청년상은 여전히 있는데 그것에 대해서 해석하는 부분들을 조금 털어버리고 싶다(웃음). 그래서 '한동교, 얘도 동교입니다', 이런 식으로 보여주려고 만들어진 캐릭터다. 이런 동교도 있고, 저런 동교도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지순'은 순수함을 대표하는 캐릭터다. 극의 내용을 보면 '순수한 인물은 변신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도 같다. 다들 변해가고, 적응하고, 나름대로 살아 남는데 지순은 그렇게 못하지 않나. 지순을 통해 보여주고 싶은 생각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순수하긴 하지만 변신하지 못하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지 않나.
'좋다, 나쁘다'를 떠나서 지순은 확실히 정서적 인물이다. 장우재가 즐기는(웃음) 정서적 인물의 전형이다. 그 정도이지 그것 이외에 과도한 해석이 들어간 것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냥 옛날 사람, 정서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이다.
2014년 연극 '환도열차' 속 인물 이지순. 사진/예술의전당
-그럼 이렇게 묻겠다. 말한 대로 '장우재표 정서'를 담당하는 인물들이 늘 극 속에 등장하는데, 왜 그런 것인가.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거리를 두며 바라보면서도 특유의 강한 정서가 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지 않나. 그 둘이 어찌보면 모순된다고 볼 수도 있는데 그걸 꼭 같이 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내 나름대로의 기준인데 '감, 식, 촉', 이렇게 부른다. '감'은 정서적인 거다. 인간에게 있는 정서성을 건드리는 것. 이런 패턴이 한 층위를 차지하고… '식'은 말 그대로 인식을 건드리는 패턴이다. 그리고 '촉'은 촉감을 건드리는 거다. 소리나 질감 같은 것을 말한다. 이 패턴들이 각자 자기 몫을 한다고 생각한다. 무엇이 더 우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연극 '환도열차'를 예로 들면 지순이 정서를 담당하고 있다고 본다면, 거리를 두고 인식을 하려고 하는 게 제이슨 양이다. 그리고 '촉'은 이렇게 강력한 플롯 속에 열차 소리가 계속해서 들리게 함으로써 우리가 마치 현대사를 통과하는 듯한 인상을 주려 하는 식이다. 그게 피부로 느껴지는 듯한 촉감으로써 다가오게 말이다. 그리고 또 지순의 옷이 벗겨지면서 검사 받는 장면 같은 경우도 대사가 없어도 피부로 느껴지는 거다. 그러한 세 가지 층위들이 같이 있을 때 '진짜 무엇'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균형이 맞춰져서 관객이 스스로 답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 되는 거다. 입체적인 표현이라고 해야 할까.
-마지막 질문이다. '환도열차'를 볼 관객들에게 한 마디 부탁한다.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지.
낯선 시간이 충돌한다는 게 이 연극이다. 그 충돌 때문에 수면 아래 있었던 것들이 수면 위로 올라오고, 또 그 충돌로 인해 이 극 안의 시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진다. 근데 그 벌어진 일도 또 지나간다. 초연 당시였던 2014년이라는 것도 현재 지나가지 않았나. 그러면, '이렇게 어떤 큰 일이 생기고 그것이 또 지나가버리고 근데 또 무언가를 꿈꾸고 하는 이 시간 자체는 뭔가' 하는 생각을 관객이랑 같이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열차가 당도함으로써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비끌어지는 어떤 일이 생긴다. 그리고 이제 열차는 떠나갔다. 그러고나서 사실 큰 별 일은 없다. 근데 이 가상의 일, 왔다 가버린 이것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매번 실패한 역사를 직면하게 되는데 근데 우리가 또 그 속에서 살고 있지 않나. 이 유한한 역사, 실패할 수도 있는 역사를 우리가 어떻게 바라보고 또 살아내야 하는가. '시간의 유한성이란 건 무엇인가, 시간의 유한성을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에 최종적으로 다가갈 수 있다면 좋겠어요.
숙제가 그런 게 남아 있다. 요즘 시간에 대한 생각을 정말 많이 한다. 연극은 시간 예술이고, 소멸하는 게 연극의 특징이기도 한데, '그렇다면 왜 이걸 하지? 시간을 어떻게 해보겠다고 이걸 하는 거지?' 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마음 속에 이 시간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는 생각이 있다. 삶을 영생의 과정으로 보는 게 아니라 소멸의 과정으로 보고 싶다. 사라질 것, 지나갈 것으로 바라볼 때 어떤 자유로움이 생기는 것 같다. 굳이 얘기하자면 잘 포기하고 싶은 것, 잘 실패하고 싶은 것이다. 실패의 데이터가 더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이를 테면 김정호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데 지도를 죽자고 그렸다. 나는 그 사람은 잘 산 것 같다. 그게 나중에는 쓸모가 있어진다고 하면 그 사람은 시간을 극복한 것 같다. 지금 현생에서 핑퐁게임을 해봐야 결과를 볼 수 없는 게 있다는 얘기다. 이 시간의 유한성을 뚫고 지금 현재 명백하게 짚어야 할 것들을 잘 짚는 것, 그게 굉장히 소중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자유를 얻는 것인 것 같다.
김나볏 기자 freenb@etomato.com